초등학교도 못갈뻔 했던 촌놈, 160억 연매출 대한민국 기능인 되다

조회수 2020. 8. 7. 08: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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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따라 초교, 부모 졸라 중고교 진학

최초 기계가공기능사, 기능장 거쳐 기능한국인

LG 등 모터 납품, 160억원 매출 기업인


‘나는 왜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까’ 원망스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길을 개척한 기능인이 있다. 국내 1호 기능사가 되고 BLDC자체 모터를 개발해 LG와 삼성 가전제품, 포드자동차에 납품해 연매출 160억원의 기업을 일군 봉원호(57) 봉봉전자 대표를 만났다.

출처: 폴리텍
인터뷰하고 있는 봉원호 대표


◇살기 위해 기술공부


강원도 홍천에서 화전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7남매 중 셋째였다. 부모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됐음에도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쌀은 꿈도 못꾸고 감자, 옥수수로 끼니를 때웠어요. 굶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죠. 매일 농사로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부모님은 미처 아이들 학교 입학을 챙겨주시기 어려웠어요. 그러다 동네 친구들이 학교 가는 것 보고 ‘아 어디 가야 하는 거구나’ 뒤늦게 알고 학교를 다니게 됐어요.”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를 돕게 됐다. 1년이 흐르자 중학교 다니는 친구들의 교복 입는 모습이 부러워졌다. “아버지에게 간곡히 사정했어요. 어렵게 중학교에 갈 수 있었죠. 왕복 8km거리를 매일 걸어다니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중학교 졸업하면서 ‘가난을 벗어나려면 기술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남직업훈련원(한국폴리텍대학 성남 캠퍼스)에 진학했다. “입학 하자마자 선생님이 ‘얼마나 노력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매일 밤 10시까지 자격증에 필요한 공부를 했습니다. 책을 통째로 외울 정도였죠.”

출처: 봉봉전자
아버지와봉원호(오른쪽)대표가 창원 폴리텍 대학교 졸업할 때 찍은 사진.


1년 만에 2급 선반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동아건설 입사에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원하는 회사에 바로 붙을 수 있었어요. 선반, 공작 기능 등 기계를 다루는 일을 했죠.”


일하면서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밤에는 정수직업훈련학교(한국폴리텍대학 서울 정수캠퍼스)를 다녔다. “밀링, 연삭 등 기계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이후 처음 시행된 기계가공기능사 1급 자격증을 우리나라에서 첫번째로 취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능사 1급을 따자 공부 욕심이 더 생겼다. 4년간 다니던 동아건설을 그만두고, 1987년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 기계공작과에 정식 입학했다. “직업훈련원에서 만난 선생님들이 대부분 폴리텍대학 출신들이셨어요. 폴리텍대에서 제대로 기계를 배워보자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폴리텍 대학에서만 선반, 밀링 등 분야의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술능력을 더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기술도 맘껏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공장 운영 등 다양한 실무도 배웠습니다.”

출처: 봉봉전자
봉원호(오른쪽)대표와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10평 창고에서 시작, 외환위기 때 급성장


폴리텍대를 졸업하고 한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배운 기술을 제대로 펼치려면 제가 아는 기술에 특화된 중소기업에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년 7개월 동안 해당 회사를 다니면서, 자동화 설비 구축 등 일을 맡아 설계부터 가공까지 기계 제작과 관련한 대부분 일을 했습니다.”


동아건설 재직을 합쳐 직장 생활 기간이 10년을 넘어서자, 내 기술로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 천안시 쌍용동에서 10평 남짓한 창고를 빌려 자본금 1000만원으로 ‘봉봉전자’를 창업했다. 직원은 봉 대표와 아내 둘 뿐이었다. “전동공구에 들어가는 작은 모터를 생산하는 회사로 출발했습니다. 밤을 새 가며 금형 틀을 만들어서 외형을 잡고, 각종 내부 부품을 조립해서 모터를 만들었죠. 제품 검수를 철저히 해서 불량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곳 저곳 납품을 하다가 LG전자가 새로운 하청업체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찾아가 제품을 보여줬죠. 담당자가 맘에 들어하면서 곧 납품할 수 있었습니다.”


곧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봉봉전자는 어려움 대신 기회를 맞았다. “당시 은행 대출이 전혀 없었어요. 주문 들어오는대로 납품하는 체제여서 자금난과 상관이 없었죠. 그 사이 경쟁업체들이 다수 무너지면서 우리 회사로 주문이 몰렸어요. 남들 어려울 때 고속 성장을 한 거죠.”

출처: 폴리텍
봉원호 대표가 개발한 BLDC 모터


◇중국산 공세 예상하고 BLDC모터 개발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주력제품인 전동공구용 모터 시장이 어려워질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한 거래업체에서 중국산 전동공구의 성능을 검토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어요. 분석해보니 품질이 우리나라 제품과 별 차이가 없는데 가격은 훨씬 저렴했죠. 2~3년이면 설 자리가 사라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를 위해 다른 모터 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BLDC’ 모터를 차세대 제품으로 선정했다. “기존 모터의 마모되기 쉬운 부분(Brush)을 제거한 모터에요. 개발 당시만 해도 낯설었는데, 내구성이 좋고 무리없이 고속 회전을 하죠. 정밀한 속도 제어를 할 수 있고, 저속에서나 고속에서나 모터의 힘이 일정해 가전이나 자동차 뿐 아니라 항공산업에도 쓰입니다. 또 기존 모터 대비 30% 이상 에너지 효율이 높더군요. BLDC모터의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개발에 들어갔습니다.”


BLDC모터 연구개발만을 위한 전담부서를 설립하고 1년동안 연구했다. “필요한 기계를 도입하고 1억원의 연구비용를 들여 제품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두 가지 과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모터에 회전을 위한 코일을 엉킴 없이 감는 것이었어요. 정확하게 감아야 모터의 성능이 좋아지고 불량도 없죠. 코일은 비싼 구리 대신 알루미늄으로 만들었습니다. 구리는 모터에 감는 것은 쉽지만 비싸요. 알루미늄은 저렴하지만 감는 과정에서 잘 끊어지죠. 연구를 통해 알루미늄 코일도 끊김 없이 감을 수 있는 고난도 기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2006년 BLDC 모터 개발에 성공해서 백색 가전제품(공기청정기, 에어컨, 냉장고 등)용으로 삼성, LG 등에 납품하고 있다. 포드 등 자동차 회사 납품도 성공하면서 작년 160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출처: 폴리텍
(왼쪽)대한민국 기능한국인 140호 인증패와 다양한 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명장’ 남은 꿈


봉 대표는 기술 연마를 멈추지 않는다. 2014년 기계가공기능장을 취득했다. 기술 관련 자격증의 최고봉이다. 2018년에는 대한민국 기능한국인 140호로 선정됐다. 정부가 10년 이상의 숙련기술 경력을 가진 기능인 중 최고를 찾아 인증하는 제도다. 마지막 ‘대한민국 명장’이 남아 있다. 기능장 중에서 최고만 도전할 수 있다. “올해로 23년차 기술인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동원해 도전할 계획입니다.”


-스스로 성공 비결을 꼽는다면요.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시대 흐름은 모든 걸 변화시킵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시대 흐름에 뒤떨어지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공부해야 하죠. 30대에는 6시간 이상 잔 적이 없을 정도로 공부했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5년 안에 망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템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죠.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겠습니다.”


-앞으로 인생 계획이 있다면요.

“2005년부터 천안장애인자립지원센터에서 장애인의 기술 실습을 돕고 있습니다. 자립을 위한 기술훈련을 가르치죠. 그 아이들이 스스로 인생 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계속 기술을 잘 가르치고 싶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훈련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많은 후배 기술인을 양성해 한국인의 명성을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박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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