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상습 폭행을 극복하고 여신이 된 그녀

조회수 2019. 3. 13. 12: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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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성장기를 보낸 할리우드 스타들 2부

큰 성공을 이룬 스타들 중에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어려운 환경에서 나고 자란 입지전적인 인물이 많다. 마치 영화같은 그들의 성장기를 1부에 이어 돌아 본다.

1.아버지로 부터 상습구타를 당했던 샤를리즈 테론

미모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멋진 배우 샤를리즈 테론은 어린 시절 '인간 말종'이라 해야 마땅한 친아버지로부터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은 없었으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아무런 이유 없이 샤를리즈 테론과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폭행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리즈와 어머니는 그를 아버지로, 남편으로 인정하며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려 애썼으며, 혼란 스러운 가운데서도 샤를리즈 테론은 촉망받는 발레리나이자 모델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던 1991년 7월 21일, 알콜 중독자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어머니를 무차별 폭행하게 되는데 그 강도가 다른 날보다 너무 심했다. 아버지의 폭행이 15살의 어린 딸 샤를리즈에게까지 이어지자 더이상 분노를 참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갖고 있던 총으로 남편을 쏘게 된다.

▲샤를리즈 테론과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는 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지만, 정당방위로 풀려나게 되고, 모녀는 이 사건으로 더욱 끈끈한 유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샤를리즈 테론은 2003년 작품 <몬스터>에서 여성 연쇄 살인범 에일린 워노스를 연기했을 당시 자신의 힘든 과거를 회상하며 "나 보다 더 힘든 삶을 산 그녀의 인생을 연기한 덕분에, 과거의 나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2.교도소에서 태어나고 자란 레이튼 미스터

드라마 <가십걸>에서 화려하고 세련된 패션을 선보이며 주목받은 레이튼 미스터의 출생은 샤를리즈 테론과 정반대였다. 그녀의 부모는 마약 사범으로 교도소에 수감되는데, 어머니 콘스탄스가 복역 중 임신을 하였고 1986년 레이튼 미스터를 교도소에서 낳게된다.


딸이 유년기를 교도소에 보낸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그녀의 어머니는 레이튼을 조부모에게 보내 자신들과 다른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덕분에 레이튼은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성장하여 11살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연예계 활동을 하며 지금의 월드 스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레이트 미스터의 어머니 콘스탄트

레이튼은 마침내 성공했지만 그녀의 어머니 콘스탄스는 여전히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종종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저지르며 레이튼을 힘들게 하였다. 2011년, 몸이 아픈 남동생의 병원비에 보태라고 준 돈을 어머니가 쇼핑과 성형에 몰래 쓴 사실이 알려지자 참다 못한 레이튼은 어머니를 고소하게 된다. 이에 맞서 그녀의 어머니 콘스탄스는 "내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지원했는데, 경제적인 지원은커녕 폭행까지 일삼았다"라며 맞고소까지 하기에 이른다.

3.총, 마약과 함께 십 대 시절을 보낸 50센트

래퍼이자 배우인 그의 활동명 '50센트'의 유래는 그 누구보다 불우하고 처절한 십 대 시절을 보낸 그의 성장배경과 관련 있다. 1975년 뉴욕 퀸스 사우스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커티스 제임스 잭슨 3세. 생모는 퀸스의 유명한 마약판매상 이었는데, 잭슨의 유년기에 라이벌 조직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십 대 시절부터 마약 판매일을 도왔으며, 총과 마약을 소지한 채 학교를 다녔다.


유년기부터 십 대 시절까지 총과 마약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던 그에게 랩은 삶의 낙이었고, 지옥 같은 일상을 벗어나게 해 줄 탈출구였다. 이지 이,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와 같은 래퍼가 되고 싶었던 그는 1996년 부터 친구와 함께 랩을 연마하며 꾸준히 활동하다 2000년 첫 앨범인 'Power Of the Dollar'를 발매하게 된다.

앨범의 성공으로 래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게되자, 범죄와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 새 삶을 꿈꾸던 찰나, 그는 2000년 5월 할머니 네 집으로 가던 도중 한 남자로부터 총격을 당하게 된다. 9발의 총을 맞고도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혀의 앞부분이 절단돼 일상 생활에서 혀짧은 목소리를 내야 하는 불편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이 상처는 그만의 전매특허인 어눌한 랩 발음의 기원이 되고, 에미넴과 닥터 드레에게 큰 인상을 주어, 그들과 백만 달러의 계약을 이루어 내는 계기가 된다.


50센트라는 활동명은 뉴욕의 유명한 범죄자 케빈 마틴의 별명에서 가져왔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았고, 어감이 좋다는 이유에서 이 예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4.망나니 아버지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던 니키 미나즈

가수에서 연기자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니키 미나즈는 유년 시절을 고향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보내다 5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거주하게 된다. 하지만 뉴욕의 이민 생활에 지친 탓인지 그의 아버지는 마약과 술에 중독되었고, 그 분노를 가족들에게 풀었다.


니키 미나즈는 끔찍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가하며 우리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욕설을 내뱉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미나즈와 오빠가 친구 집에 놀러 간 사이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른다. 집이 불타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불을 끌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집에 갇혀있던 어머니는 혼자 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탈출해야 했다. 니키 미나즈는 지금도 그 순간은 악몽과도 같다고 말한다.

5.알코올 중독 부모들 때문에 스스로 성장해야 했던 데미 무어

데미 무어의 유년 시절부터 십 대 시절까지의 성장기는 매우 험난했다. 아버지는 결혼한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데미 무어를 임신한 상태에서 새로운 남자와 재혼한다. 데미 무어의 시련은 바로 이 계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정된 직장 없이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계부 탓에 30번이 넘게 이사를 가야 했다. 게다가 수많은 도박 빚에 알코올 중독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의 집안은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그녀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은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데미 무어의 어린시절은 암울했으며, 가정경제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나마 집안이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데미 무어가 십 대 시절부터 모델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후 무어의 친모와 계부는 이혼과 만남을 반복하다 각기 다른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실패한 삶을 산 계부는 1980년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자살한다. 무어의 어머니 또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살다 뇌종양에 걸려 1998년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6.아픈 과거를 극복한 성공의 상징 오프라 윈프리

고난과 아픔의 과거를 이기고 성공한 유명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그 주인공은 오프라 윈프리가 아닐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20세기의 가장 부자인 흑인계 미국인으로 꼽힌 오프라 윈프리의 과거사는 그 누구보다 참담했다.


1954년 오프라 윈프리는 미시시피주의 한 시골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6살 때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이후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됐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오프라에게 무관심했다. 그러다 잠시 테네시주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져 따스한 보살핌을 받기도 했지만,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되면서 혼돈과 방황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9살에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14살에 미혼모가 돼 아들을 낳게 되지만, 아들은 2주 후에 사망하고 만다. 이후 다시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 오프라는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연극부와 토론부에 들어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아픈 과거를 극복하게 된다.

▲영화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서

그 후 우연히 라디오 프로에서 일하게 되고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지역의 저녁 뉴스의 공동 진행자가 되었으며, 대학 4학년 때 볼티모어의 방송국 뉴스 앵커로 데뷔한다. 하지만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진행이 문제가 되어 앵커에서 해임되고, 대신 방송국이 제안한 토크 쇼를 진행하게 된다.


토크 쇼는 그 누구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감성적인 오프라 윈프리와 오히려 너무 잘 맞았고 능수능란한 진행 덕분에 토크 쇼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83년 시작된 그녀의 아침 토크 쇼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는 얼마 되지 않아 시카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크 쇼가 되었으며, 이후 ‘오프라 윈프리 쇼’로 이름을 바꾸어 전국으로 방영돼 전미 최고의 토크 쇼로 자리 잡게 된다.


1991년 오프라는 자신의 쇼에서 9살 때 성폭행당한 사실을 공개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다. 이는 2년 뒤 빌 클린턴 정부가 아동 성폭행범의 신상정보를 국가가 기록·공유하게 하는 '오프라 법안'을 제정, 통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11년 토크 쇼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이 설립한 '오프라 윈프리 네트워크(OWN)'와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하포(Harpo)'의 경영에 집중하고 있으며, 배우로 인생 2막을 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컬러 퍼플>, 2013년 <버틀러:대통령의 집사>, 2014년 화제작인 <셀마>의 제작과 조연을 맡는 등 영화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운과 주변사람의 도움이 있었지만 성공의 크기보다 고통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의 본질에 귀기울이며 살아온 그들의 삶에 축복을 보내는 바이다.

damovie2019@gmail.com


사진=IMDB, ※ 저작권자 ⓒ 필 더 무비.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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