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4천억 재벌그룹이 전문분야 아닌 곳에 투자해서 벌어진 일

조회수 2020. 7. 10.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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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은 60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토종 속옷 기업이다. 쌍방울은 최근 신임 최고경영자로 평사원 출신의 40대를 선임하여 많은 언론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러한 선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점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바닥을 경험한 쌍방울이 재도약을 위해 과감히 던진 마지막 한 수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한때 국내 대표 속옷브랜드로 자리잡으며 재벌의 모습을 갖춰가던 쌍방울그룹은 어떻게 쇄신을 기약해야 되는 상황에 놓인 것일까? 한번 알아보자.

6.25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기업

쌍방울 그룹의 모태는 1954년 전라북도 이리시에서 만들어진 조그만 상회이다. 6.25전쟁 이후, 이봉녕 회장은 시골 아낙네들이 장날에 가져오는 양말을 구입해 노점을 벌였다. 사업이 점차 성장하자 이봉녕, 이창녕 형제는 '형제상회'를 설립하여 메리야스 도매업을 추가했다.


1962년 동이리역 부근에 이봉녕 회장은 28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면서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설립했다. 자연스럽게 형제상회는 속옷 사업까지 개시하게 되었다. 1963년 쌍녕섬유공업으로 사명을 바꿨으나 이듬해 쉽게 기억에 남는 이름을 찾다가 "쌍방울"로 변경한다. 브랜드를 재정립한 쌍방울은 충청과 호남지역에서만 판매되던 속옷, 양말 등의 제품을 전국지역에도 판매하고 싶었다. 이에 쌍방울은 서울 진출을 위해 서울판매부를 설치했다.

서울판매부는 서울에서 높은 매출을 보이며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1960년 후반부터빠르게 성장하는 한국경제와 함께 쌍방울은 전국적 판매량의 급증을 경험한다. 쌍방울은 수요를 맞추기 위해 인력을 대폭 증원하며 전국 판매망을 구축하고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하지만 당시 섬유의 주원료인 면사의 공급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해 원료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쌍녕섬유는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녔다. 이를 통해 원사확보경쟁에서 쌍방울은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이로인해 많은 섬유사업체들이 문을 닫으며 쌍방울의 호조는 계속되었다

TRY의 성공과 다양한 사업다각화

이후 쌍방울은 경제성장과 함께 꾸준히 성장한다. 1974년 5억 2000만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1년만에 29억 8900만원에 도달하여 6배가 신장하는 여력을 선보였다. 1977년에는 내수부문 매출 100억을 돌파하면서 재계에 입성했다. 이후 장남인 이의철 사장이 자리를 이어받으며 많은 변화와 혁신을 선보였다. 이의철 사장은 쌍방울과 쌍녕방적 양사를 통합하며 사업다각화에 도전했다.


1984년에는 무역부문을 '쌍방울상사'로 분할하고 일본 다반과 합작해 '한국다반'을 출시하여 패션사업에도 진출했다. 또한 1988년 소프트웨어 업체 마이크로웨어컴퓨터를 인수하여 전혀 색다른 도전도 한다. 이외에 전화기 생산업체 동전산업을 인수하는 등 여러가지의 비관련 분야에 손을 댔다. 또한 새로운 브랜드, TRY를 출시했다

TRY는 다양한 제품라인과 효과적인 홍보전략을 통해 소비자의 관심을 유발했다. 이는 큰 성공으로 이어져 이덕화를 메인모델로 사용하는 CF를 제작했다. "편안합니다"라는 이색적인 카피가 큰 인기를 얻으며 쌍방울은 BYC와의 경쟁에서 우세를 점하게 된다. 


이 성공을 기반으로 1993년 22개의 계열사를 보유한 중견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자산규모는 1조 4천 2백억 원에 달했으며, 종업원은 6천 2백여명에 제계 순위 51위에 도달했다.

17계 계열사 그룹의 파산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업 확장은 쌍방울그룹에게 큰 리스크를 가져다 주었다. 쌍방울은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유치가 확정되자 이를 기회 삼아 무주리조트 사업을 실시하게 된다. 약 10년간 4,700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여 1990년에 무주리조트는 문을 열 수 있었다.


결국 무주, 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는 성공적을 개최되었다. 덕유산 자락 212만평에 자리한 동양 최대의 스키장은 30면의 슬로프와 리조트, 1400여개의 티롤호텔 객실을 보유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3,400억 원의 자금을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인 종금사에서 빌려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이는 결국 9,000억 원의 부채로 다가왔고, 수천억원의 빚을 얻은 쌍방울그룹은 1997년 IMF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종금사 역시 자금회수에 나서면서 쌍방울그룹의 대부분 계열사들은 폐업을 면치 못했다. 큰 꿈을 안고 창단했던 쌍방울레이더스는 10년 6개월만에 간판을 내리며 SK로 넘어갔다. 


무주리조트 또한 종금사에 공돔담도로 내놓는 등의 방안을 내놓았으나 2002년 대한전선-미국 볼스브릿지 컨소시엄에 매각되었다. 이로인해 쌍방울그룹은 해체된다. 이에 대하여 많은 전문가들은 선대 회장의 안정경영원칙을 무시하고 2세 경영진이 무주리조트 개발을 포함한 방만한 사업확장이 화근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쌍방울은 대한전선에 인수되어 계열사로 편입된다. 하지만 2010년 자금난으로 인해 투자 위주의 특수목적법인인 레드티그리스에 인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논현동 본사 사옥을 505억원에 매각하는 등 치열한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작년 한해 880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무리한 사업확장과 과도한 투자로 인한 재무안전성의 악화로 쌍방울그룹은 사실상 해체를 경험했다. 또한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던 쌍방울의 이미지는 어느새 소비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B2C온라인매장을 개설하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등, 새로운 고객들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사업을 시도 중이다. 젊은 경영을 내세운 쌍방울이 앞으로 보여줄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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