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대우의 부도 소식이 충격적이었던 이유

조회수 2019. 3. 15. 10: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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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국가부도의 날

”대우가 위험하다고 합니다. 특별면담 요청하고 있습니다” 개봉예정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나오는 대사다. 1990년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IMF 외환위기였다. 1997년 한보그룹의 부도가 기업들의 연쇄도산을 불러왔고 재벌들도 IMF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재계 4위, 대우의 몰락까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수많은 회사들이 도산하는 와중이었지만 대우의 해체에 국민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만큼 대우의 몰락이 시사하는 바도 상당했다. 오늘은 당시 사람들이 대우의 부도에 이처럼 큰 충격을 받은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 한다. IMF의 실질적인 한창이자 절정의 시작이었던 1998년도로 돌아가보자. 

1999년 8월 26일, 대우그룹은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를 매각하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한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 수순을 밟은 셈이었다. 한때 재계 2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대우의 마지막은 지켜보는 사람도 힘이 빠질 정도로 허망했다. 대우의 몰락에는 1인 지배체제에서 오는 불안정성, 무모한 사업 확장, IMF 사태, 부실경영 등 점철된 사유들이 있었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무너져버린 대우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대우는 한 때 삼성과 함께 대한민국 재계 2-3위를 다투던 기업으로 ‘대한민국 4대 그룹’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 현대, 삼성, LG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대우그룹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무너져내렸으니 믿기 어려웠을만도 하다. 또한, 대우는 붕괴 직전까지 대한민국 경제를 이끈 기업이었기 때문에 대우의 몰락은 곧 대한민국 경제가 마지노선까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대우의 부도는 국민들에게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험난한 여정의 예고와도 같았다. 눈 앞의 현실을 믿기 싫었던 국민들의 마음도 일정부분 이해가 간다.  

당시 대우가 어느정도의 규모와 위상을 지닌 기업이었는지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2018년 기준, 재계순위를 살펴보자. 현재 재계순위 4위를 차지한 기업은 LG이다. 즉, 현재의 LG만큼이나 대단했던 기업이 대우그룹이었다. 외국에서는 현재 삼성만큼의 인지도를 가진 회사였다고 한다. LG로 예를 들자면 주요 계열사인 LG화학과 LG전자가 매각되고 LG생활건강과 LG유플러스가 워크아웃 신청을 한 셈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회사가 공중분해되어 산산이 찢겨져버리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너도 나도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만약 대우그룹이 외환위기 당시에 위기를 잘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LG 보다 재계서열이 더 높은 회사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전자 사업체에서는 대우가 LG에 뒤처지는 면이 있다. 현재도 냉장고, 세탁기 등의 대우사 전자제품은 LG 제품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성능 면에서 LG가 더욱 우수한 것은 사실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하지만 대우는 LG가 사업체를 가지지 못한 자동차 생산에도 성과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규모적으로 더욱 큰 회사로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재계 순위 1-2위를 다투는 기업으로까지 성장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1999년 공식 해체된 대우그룹은 당시까지만 해도 총 고용인원 15만명, 계열사 41개,국외법인 396개의 대형 기업이었다. 대우는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 등에서 성공을 거두자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며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그룹에 입성한다.  

이처럼 무역과 건설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대우는 본격적으로 GM사의 지분을 전량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까지 뛰어들었다. 김우중 회장은 불과 3-4년만에 전세계에 대우자동차 판매점을 300-400개를 만들어내며 대우그룹의 위치를 공고히했다. 그렇게 사업을 확장시킨 대우는 순식간에 재계 4위의 자리에 오르게된다.

출처: 한겨례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는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등으로 추려볼 수 있는데 이외에도 다양한 사업군을 가지고 있어 국민들의 생활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컴퓨터, 통신기기, 자동차부품을 생산했던 대우통신,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중인 대우건설, 대우증권 등이 있다. 


심지어 교육계에도 진출하였는데 거제도의 대우조선 직원 자녀들이 다닐 수 있도록 대우 초등학교, 거제 중고등학교, 거제대학교를 대우에서 운영했었다. 아주대학교 역시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학교법인 대우학원에서 인수했다. 이처럼 생활 전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대우였기에 몰락의 여파가 크게 다가온 것이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 두고 사업 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그 부채 규모가 엄청나 국민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로 현재 환율로 56조 1000억 원에 이르는 돈이다. 따라서 대우그룹은 회사 자본금 총액 대비 부채가 4배가 넘는 빚 덩어리 회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문어발식 확장으로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데 주력했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부실을 피할 수 없었고 김우중 회장은 이를 감추기 위해 41조원의 분식회계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부실기업임이 드러나면서 대우는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  

대우의 몰락이 아직까지도 충격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잔존하는 대우의 흔적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대우’라는 브랜드 가치는 살아남아있다. 대우건설은 ‘푸르지오’ 브랜드로 국내 TOP3의 대형건설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대우 등 '대우'의 이름을 내 건 수많은 회사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심지어 대우조선해양은 2018년 기준 재계서열 23위이며 대우건설도 33위에 랭크인 되어있다. 비록 이제 찢어진 계열사들은 엄연히 다른 회사가 되었고 대우그룹은 사라졌지만 대우의 흔적이 남아있는 한, 충격적이었던 대우의 부도는 끊임없이 회고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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