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서열 7위 기업은 왜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걸까?

조회수 2019. 3. 15. 10: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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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으로 시작한 회사가 국내 재계서열 7위로 등극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년이었다. 30년만에 굴지의 재벌로 성장한 국제그룹은 84년도까지만 하더라도 연간 매출액 2조원, 수출액 9억 달러에 달하는 회사였으나 1985년, 너무나 허무하게 해체되고 만다. 국제그룹의 양정모 회장조차 해체 소식을 언론에 발표되기 30분전에야 전해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나고만 국제그룹의 신화이다. “자고 일어나니 기업이 해체되어 있었다” 당시의 충격을 양정모 회장을 이렇게 회고했다. 오늘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국제그룹의 사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국제고무의 ‘왕자표 고무신’이 생산되기 시작했던 시기는 1949년이었다. 전국을 제패한 왕자표 고무신의 시초인 셈이다. 1910년대부터 일본에서 도입된 고무신은 질긴 내구성으로 인해 빠르게 대중 신발로 자리 잡아 갔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는 고무신이 신발 점유율의 85%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신발이 되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무신을 즐겨 신었으며 이 판매량을 따라잡기 위해 부산을 중심으로 고무신 공장들이 밀집하여 세워지기 시작했다. 고무신이 일본에서 전해진 상품이다 보니 부산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양정모 회장은 고무신의 상품성을 눈여겨보고 고무신 생산사업에 돌입한다.

그는 부친의 정미소 한켠을 빌려 부산에서 고무신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왕자표 고무신’이 범표 고무신, 말표 고무신, 기차표 고무신 등 쟁쟁한 브랜드들이 즐비하던 중에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다. 이는 왕자표 고무신이 품질의 대명사로 소문이 났기 때문인데 부실한 품질의 경쟁 상품과 달리 왕자표는 손꼽리는 품질을 자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왕자표 고무신은 1960년 발생한 대형 화재로 60명의 여공이 숨지면서 성장세에 제동이 걸린다. 결국 양정모 회장은 고무신 사업을 접고 이후로 운동화 생산에 눈을 돌려 국제고무를 운동화 전문 브랜드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이름도 자연스럽게 국제화학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여파로 소득 수준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고무신보다 한 등급 높은 운동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던 시기였다. 역시 양정모 회장이 생산한 운동화는 좋은 품질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국내 최초로 미국으로 운동화를 수출하는 쾌거까지 이루어 낸다.
그리고 70년대 미국의 한 마라톤 전문지에서 '최고의 품질'이라는 인정까지 받게 되면서 국제화학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대기업으로 성장해갔다. 1975년에는 정부로부터 그 실적을 인정받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게 된다. 종합무역상사는 정부가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수출 기업들을 상대로 지정해 주는 것이었는데 이로 지정받으면 막대한 금융 특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기업들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

지정받고 나면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국제화학이 삼성, 대우, 쌍용에 이어 국내 4번째로 종합무역상사로 지정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국제화학은 국제상사로 불리게 된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고 나서 한창 수출이 늘어날 무렵에는 “미국의 세 가정 중에 한 가정은
왕자표 신발을 신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서운 성장세를 보였던 국제상사이다.

이 후, 국제상사는 당시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기업의 몸집을 불려갔다. 그러면서 국제상사는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국제그룹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건설업, 제철업, 호텔사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뻗쳤다. 80년대 초만 해도 63빌딩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국제그룹의 사옥, 국제빌딩이었으니 당시 이 그룹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양정모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사업을 준비했다. 당시는 80년대 초반으로 한국 국민들은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차 해외 브랜드에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때문에 나이키, 아디다스에 버금가는 국내 명품 스포츠 브랜드를 런칭하기 위해 애를 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로스펙스'가 출시되었다.
이 때, 프로스펙스의 인기는 해외 브랜드인 나이키, 아디다스 못지 않았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종의 ‘부의 상징’으로서 명품 브랜드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었다. 이렇듯 84년도까지만 해도 연간 매출액 2조원, 수출액 9억 달러에 달하는 국내 재벌 서열 7위의 국제그룹이었다. 심지어 그룹의 성장세는 무서웠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1985년 2월, 국제그룹의 주 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에서 “국제그룹은 부실그룹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그룹 전체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라는 발표를 내버린다. 이는 정부의 지시를 받은 결정으로 이 후, 신속하게 국제그룹은 해체되었다. 한일합섬, 극동건설, 동국제강 3개 회사에 의해 분할합병되었다.
굴지의 그룹이 정말 한순간에 해체가 되었고 이를 인수한 기업들이 오히려 국제그룹보다 작은 규모의 회사였기 때문에 국제그룹의 해체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양정모 회장은 "첫째는 내가 미워서고 둘째는 내 꺼 뺏어다가 나눠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기 위해서 국제그룹을 해체한 것이다”라고 언급했었다.

이를 틀린 말이라고 치부하기에 국제그룹을 인수한 세 그룹은 모두 전두환 대통령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내고 있던 회사들이었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국제그룹의 해체를 두고 부실기업의 정리, 기업합리화라고 아무리 선전을 해도 실상은 괘씸죄에 대한 처벌에 가까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정권은 언론을 통제했으며 쓸데없이 그룹 해체를 부각하는 것을 경계하며 쉬쉬했을 뿐이다.
이처럼 괘씸죄 때문에 해체되었다고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었지만 재계 역시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일벌백계’ 전략으로 전두환의 이와 같은 행보 이 후, 재계에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기 때문이다. 정치헌금도 더욱 잘 걷혔다고 한다. 국제그룹의 양정모 회장이 이토록 미운 털이 박혀 괘씸죄로 처벌받은데에도 후원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탓이 컸다.
전두환은 아웅 산 사건 뒤 '일해재단'을 만들어 재벌들에게 기부을 권유했다. 실상은 자발적 기부보다는 강압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당시 정주영 51억, 이건희 45억, 박태준 40억 등 재벌총수들은 정부 눈치를 보며 거액을 기부했다. 아웅 산 사고 피해 유가족들의 장학금을 위해 거두는 겁니다." 라고 발표했으나 이 기부금들은 전두환을 위한 일종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총 모금액 600억 원 중 24억 원만이 유가족들에게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그룹의 양정모 회장은 평상시에도 검소한 성격으로 유명하여 자발적 기부를 기피하였다고 한다. 결국 5억원만을 납부한 그에게 전두환은 큰 언짢음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당시 전두환은 실질적으로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부였기 때문에 기업의 생사여부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했다. 기업들도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온갖 명목으로 요구되는 후원금을 눈물을 머금고 내야했다.

이런 식으로 착복한 정치자금만 무려 1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항상 양정모 회장은 비협조적이었다. 이렇게 눈에 가시처럼 굴던 와중에 1985년 2.12 총선거가 다가왔고 이 때 전두환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전두환은 김영삼에게 큰 데미지를 주기 위해 부산에서의 선전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
전두환의 특별 지원 유세까지 이루어진 마당에 양정모 회장은 막내아들의 49제를 치르기 위해 하루만에 선거캠프를 빠져나왔다. 양정모 회장은 부산 상공회의소 소장으로서 부산 지역 재계 대표였다. 부산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양정모의 이런 태도에 전두환은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고 피의 보복을 단행한 것이었다.

부산에서 선거 참패라는 결과까지 더해지자 전두환은 바로 국제그룹의 발행어음을 모두 부도 처리해 버리며 양정모 회장의 손발을 잘라버렸다. 이렇게 국내 재계 서열 7위의 기업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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