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땅 좀 사둘 걸 하면서 한 번쯤 후회하는 곳

조회수 2019. 3. 15. 11:35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우리나라 땅값 3,600배 올랐다. (서울편)
52년 동안 우리나라의 땅값이 무려 3,617배 올랐다. 금액으로 따지면 1964년 1조 9천 300억 원에서 2016년 6천 981조로 상승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은 단연코 서울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도 가장 비싼 동네는 어디일까? 그렇다 강남구이다. 강남구가 1위를 차지하고 그 뒤로는 서초구, 송파구, 용산구, 양천구 등이 순서대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가장 비싼 동네는 어디일까? 아마도 대부분이 강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틀린 대답이다. 중구에 가장 비싼 동네가 있으며, 충무로1가가 서울에서 가장 지가가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네이처리퍼블릭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서울타임스
1960년대, 중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동 성당이 보인다. 세운상가가 건설되기도 하였으며, 1970년대 초까지 급성장을 했다. 세운상가는 70년대 말, 용산에 전자상가가 들어서고 백화점까지 들어오게 되면서 추락하게 되었다.
강남구는 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그 이후,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강북의 인구가 600만을 넘어서면서 인구 분산을 위해 진행되었다. 그때의 강남은 그야말로 논과 밭, 과수원으로 이루어진 한적한 농촌의 모습이었다. 제대로 포장되어있는 도로 하나 없이 흙길이 가득했다.
서초구 말죽거리의 모습이다. 강남과 마찬가지로 논과 밭으로 가득했다. 자연 그대로 훼손되지 않은 양재천이 흘렀다. 60년대 말, 서초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현장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서래마을 역시, 그 이름에 걸맞게 수수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용산은 각종 분지와 논으로 높은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들어온 미8군이 주둔했으며, 용산 기지 근처로 각종 노점상이 가득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용산 전자상가가 있던 자리에는 청과물 시장이 있었는데, 전국의 농식품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전국 땅값을 다 합쳐도 서울에 못 미친다. 이런 초거대 도시 서울이 탄생한 배경은 무엇일까? 조선 도읍 직후에 한양 땅 인구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침략 이후, 해방 당시 서울 인구는 100만으로 40년 만에 1,000만 명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끝나면서 서울 인구가 급격하게 팽창했다는 말도 있다.
전쟁 기간, 많은 사람이 남쪽 지방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때 지방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서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고, 후에 서울로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구의 유입과 더불어 정부에서 주도한 이런저런 대규모 사업과 프로젝트가 맞물리면서, 초거대 도시 서울이 탄생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강남’, 강남은 박정희 대통령의 공포 정치와 함께 성장한 도시이다. 김신조 사건 이후, 서울의 개발이 치밀해지고 가속화되었다. 경부고속도로와 강남 개발 사업이 진행되었고,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정부가 땅 주인으로부터 일부 토지를 받는 대신, 공공시설을 지어, 전체 땅값을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강남 부동산 졸부들이 탄생하게 된다. 개발의 가치를 미리 알고, 땅을 구매했던 사람들이 거대한 부를 획득하면서 새로운 계층이 형성된 것이다. 그 이후, 서울의 땅값은 멈추지 않고 올랐다. “왜 그때 강남에 땅을 사지 않았을까?”라는 후회가 생길 정도로 말이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