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이 특별한 이유

조회수 2021. 3. 20. 11: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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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이 몰고 간 소떼 중 암소들은 상당수가 새끼를 배고 있었다.
출처: 민중의소리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500마리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남북 교류의 물꼬를 텄다.

소 500마리 이끌고 판문점 넘은 정주영

1988년 6월 16일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이날 오전 그는 임진각에서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밝히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그의 방북은 개인적으로는 17살 때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재 강원도 통천군 로상리) 친가에서 부친의 소 판 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한 실향민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것은 이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벅찬 감회를 밝힌 정 회장이 소떼 방북을 기획한 것은 6년 전인 1992년부터였다. 그는 현대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사주면서 방목을 지시해 방북 당시 현대서산농장 70만 평의 초원에 3,000여 마리의 소들이 방목되고 있었다.


실향민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낸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해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장사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 방문이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라는 것을 명백하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9시 22분,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십 대에 실린 소들이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었고 정주영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텔레비전 방송 3사가 이를 생중계하고 있었고 미국의 뉴스 채널 시엔엔(CNN)을 통해 전 세계에도 생중계됐다.


소떼 방북은 외환위기 직후였던 당시,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남북관계가 풀리고 민간차원의 경제협력과 교류가 증가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 기업인 정주영만이 선택할 수 있었던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의 방북을 계기로 1994년 이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닫혔던 교류가 민간차원에서 열렸다.




정주영의 선택, 닫혔던 남북교류를 열었다


정주영은 6월 23일까지 8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평양, 원산, 금강산과 고향인 통천 등을 찾았다. 그리고 북측 관계자와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 서해안 공단 사업 및 전자 관련 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기업가로서 그가 챙긴 또 다른 성과이기도 했다.


4개월 후, 10월 27일에는 소 501마리를 몰고 그의 2차 방북이 이뤄졌다. 두 번에 걸친 방북으로 그가 북한에 보낸 소는 모두 1,001마리가 됐다. 그는 처음엔 천 마리의 소를 생각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싶어 거기 한 마리를 추가했다. 그 플러스 1이야말로 평화통일에 대한 실향민 정주영의 의지였다.


정주영은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간다고 고백했다.


정주영이 몰고 간 소떼 1,001마리 중에는 새끼 밴 소가 섞여 있었다. 1차로 보낸 500마리 중 절반이 암소였는데 그중 상당수가 새끼를 배고 있었다. 정주영은 암소가 새끼를 낳아 북한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어 한 것이었다.

현대그룹은 소떼 방북을 위해 트럭과 사료를 포함해 41억 7,700만 원의 비용을 부담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비록 중도에 장애를 만나긴 했지만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성과를 남겼다. 그의 방북 이후 남북한 민간 교류는 크게 확대됐다.


정주영은 2차 방북 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2차 방북 직후에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선 유람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의 뱃고동을 울린 것이다. 이태 후인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고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최초로 휴전선을 연 정주영의 소떼 방북은 비록 경제적 동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역사적 의미가 바래지 않는다. 그것은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이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까지 평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업에 관한 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이 실향민 출신의 재벌 총수는 남북이 교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소떼방북은 그만이 선택할 수 있었던 상상력의 절정이었다. 그는 결국 그를 통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모으면서 한반도에서의 남북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것이다. 

정주영 방북 직후부터 유람선 관광으로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2003년에는 육로 관광으로 발전했다.


정주영은 2001년 3월, 풍운의 삶, 86년을 마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적지 않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계속됐다.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전격 중단(2008)되기까지 금강산에는 195만 명의 남한 관광객이 다녀갔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개성공단은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이유로 중단시키기까지 성공적인 남북 경제협력 사업 모델이었다.




그가 개척한 길은 다시 이어질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주영의 부음에 당시 아태 부위원장 등 조문단 4명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조전을 전했다. 김 위원장은 정주영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2011년 10주기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대아산 측을 통해 정 명예회장을 추모하는 구두 친서와 화환을 전했다.


재벌로서의 평가를 넘어가 민족의 화해와 협력의 길을 개척한 정주영에 대한 평가는 구분돼야 할 충분한 이유다. 여전히 냉전적 사고를 벗지 못하는 수구 정치인들과 비기면 이 실향민 출신 사업가의 선택과 성취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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