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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의거 최고령자로 기록된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

조회수 2021. 2. 8. 09: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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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 거사의 주인공이 65세의 노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강우규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 투척 의거였다.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사형집행으로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순국했다. 1919년 9월,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 거사를 감행한 지 14개월 만이었다. 그는 처형 직전에 유언 대신 ‘사세시’ 한 수를 남겼다.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사람으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했고, 청소년기에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이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는 서른 살이 되던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했다.




65살 백발 독립투사 강우규


홍원 남문 앞에서 한약방(잡화상이라는 기록도 있다)을 열어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된 뒤 그는 신교육과 육영사업에 뜻을 두게 됐다. 또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귀의했는데 그는 이를 국권 회복의 한 경로로 여겼다고 한다.


강우규는 홍원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교회 설립에도 힘을 쏟았지만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홍원을 떠나 북간도 두도구로 망명했다. 그는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의술을 베풀고 뜻있는 이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이때의 강우규 의사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1915년에는 다시 중국 지린성 요하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농토를 개간해 신흥촌을 건설하고,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웠다. 동광학교에서는 역사, 제조, 창가, 물리, 생물 등의 신식 교과목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드높이고자 했다.

▲ 노인 중심 항일투쟁단체 대한민국 노인동맹단 명부. 노인동맹단은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됐다.
출처: EBS 지식채널 갈무리
▲ 노인동맹단의 가입조건은 단 하나, 45살 이상 70세 이하였다.

1919년에는 ‘노인동맹단’ 요하현 지부의 책임을 맡았다.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이후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김치보(1859~1941, 1996 독립장)의 집에서 결성된 노인 중심의 항일투쟁 단체였다. “우리가 이역을 떠돌며 늙고 병든 목숨이지만 우리가 조국의 독립을 되찾지 못하면 식민지 백성이 된 자손에게 재산과 학식을 물려준들 무슨 소용이랴”라고 주장하며 이들이 결성한 이 조직의 가입조건은 단 하나, 45살 이상 70세 이하였다.


▲ 사이토 마코토

그해 5월, 노인단원 이발(1851~1928, 1995 애국장)과 정치윤(1845~?, 2012 대통령 표창)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에 분개한 강우규는 요인 암살 등을 결심하고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해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1876~1933, 1990 애국장), 허형(1894~1963, 1963 독립장) 등 동지와 거사계획을 세웠다. 8월에 그는 서울로 잠입했다.




사이코 총독 암살 미수 의거


1919년 9월 2일, 군대와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 일행이 탄 열차가 오후 5시 정각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했다. 사이토는 출영객과 악수한 뒤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할 때 부근에 은신하고 있던 강우규가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류탄은 사이토 총독을 촬영하던 사진기자 바로 옆에서 폭발했고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뒤따랐다. 폭발 소리에 기병들의 말이 마구 날뛰는 등 폭발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 거사는 수류탄이 빗나가 사이토 폭살은 실패했지만,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를 비롯한 총독부 요인과 관리 등 34명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 강우규 의사의 사형 선고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경찰은 현장에서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35일 만에 서울 시내에 은거하던 강우규는 독립운동가 탄압으로 유명한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김태석에게 검거됐다. 일제는 이 거사의 주역이 65세의 노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60년대 한국인 남자 평균 수명이 51세였으니 그 무렵 65세는 엄청난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강우규는 총독부 고등법원의 재판 결과 총독 암살미수 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강우규는 변호인도 없이 치른 신문과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일본 경찰까지도 감동하게 했다.


“우국지사였지요. 그는 정말 과장 안 하고 우국지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 격해지자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독립연설을 시작합니다. 예순 몇 살이 된 노인이 탁상을 두드리며 독립의 열정을 피력합니다. 비장했습니다.”


- 지바료(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강우규의 폭탄 의거는 국내 폭탄 거사의 효시였고 이후 1920년대 의열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실제로 강우규 의거 이후 국내와 만주, 상하이 등에서 의열 지향적 비밀결사가 속속 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 의열투쟁의 기폭제 되다


이 의거는 일제의 ‘문화정치’가 식민지 지배의 장기화를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경고한 것이었다. 또 그것은 3·1운동 이후의 독립투쟁 방향과 방법에 관한 전범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강우규 의거는 3·1만세 이후 민족진영에서 ‘독립투쟁의 한 방략으로 정립’된 의열투쟁 노선을 실천한 거사로 안중근 의사의 의열투쟁(1909)의 맥을 계승한 것이었다. 의열투쟁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청장년층이었는데 반해 강우규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사상 최고령자의 폭탄 투척 의거였다.

▲ 독립기념관 강우규 의사 어록비. 유언으로 남긴 한시를 새겼다.
▲ 옛 서울역사 입구에 있는 강우규 의사 의거 기념 표지석
▲ 서울역 광장에 세운 강우규 의사 동상
▲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강우규 의사의 묘. 그의 유해는 감옥묘지와 우이동 묘지를 거쳐 여기 안장됐다.

사형집행 후 강우규의 유해는 서대문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광복 뒤 서울 우이동 이장을 거쳐 마침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됐다. 1962년 정부는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2011년 9월에는 옛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됐고 독립기념관에 사형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한시를 새긴 어록비를 세웠다.


당대 기준으로 보면 상노인 격인 65세 노인이 감행한 의열투쟁의 전모를 살펴보면서 문득 요즘 서울역 광장에서 분전하는 21세기 노인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을 기꺼이 극우단체의 행동대원이 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가 품었던 뜨거운 마음과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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