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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살인자, 유보트의 모든 것

조회수 2021. 1. 23. 08: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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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강력하고 '야비한' 무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향후 전쟁의 판도를 바꿀 네 가지 무기가 등장했다. 항공기, 전차 그리고 기관총과 잠수함이었다. 그중 잠수함은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크게 바뀐 것이 없을 정도로 당시로선 첨단무기였다. 1918년의 항공기가 1940년대 초반의 것과 비슷했다면, 미국 조종사는 F4F 와일드캣 대신에 천을 씌운 개방형 복엽기를 타고 태평양 항공에서 일본기와 격전을 벌였을 것이다.


초기 잠수함은 수면 바로 아래에서 천천히 나아가는 배에 불과했다.

1620년 영국 템즈강에서 시험한 반 잠수함

1897년 아일랜드계 미국인 존 필립 홀랜드는 6차례에 걸친 제작 끝에 잠수기술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는 잎담배 모양의 잠수함에 75톤짜리 가솔린 엔진을 장착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전기를 충전해 잠수 중 전기모터가 돌아가게끔 했다. 그리고 안쪽으로 좁아지는 사각형 모양의 날개를 달아 물고기처럼 위 아래로 오르내리게 했다. 홀랜드의 경쟁자였던 사이몬 레이크는 잠수함이 수평을 유지한 채로 잠수했다가 부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903년, 독일 조선소에서 진정한 의미로 최초의 잠수함(Unterseeboot) 뼈대가 놓이며 독일 유보트의 신화가 태어났다. 하지만 독점적인 기술은 아니었다. 유보트에 사용된 잠수추진용 전기모터, 충전배터리와 엔진구동 제너레이터, 날렵한 모양의 이중선체, 밸러스트 탱크, 잠수와 부상용 날개, 공기추진 어뢰 등의 기술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고 세계 곳곳에서 시도하고 개발해 내는 중이었다.


당시 독일은 무엇이든 늘 다른 나라보다 앞서갔다. 1906년에 배치시킨 U-1은 흠잡을 데가 없는 잠수함이었다. 50년 동안의 혁신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특히 독일의 첨단 내연기관 기술과 러시아 납품용 잠수함을 제작하던 크루프(Krupp)의 킬(Kiel) 조선소 시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U-1은 프랑스 해양공학자 막심 로뵈프(Maxime Laubeuf)의 초기 디자인을 차용했다. 독일의 유명한 군수업체 크루프는 나중에 러시아 해군용 잠수함의 시제품을 만들었고 로뵈프 디자인의 잠수함을 3대 판매했다. 해외에서 소형 잠수함을 주문하던 독일 해군도 1904년에 U-1을 주문했다.


1954년에 원자력잠수함이 등장하기 전까지 독일의 디젤엔진은 잠수함의 심장이 되었다. 당시 사용되던 가솔린엔진에 비해 디젤엔진의 뛰어난 연비 덕분에 순항거리가 늘어났고 좁은 공간에서 휘발성 가솔린 가스와 악취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다. U-1은 수면에서는 200마력 엔진 2개로, 수면 아래에서는 2개의 충전배터리 동력의 100마력 전기모터로 움직였다.

U-1의 선체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튼튼한 내부 선체는 잠수 시의 높은 압력을 견뎌냈고 얇고 날렵한 모양의 외부 선체는 연료와 물을 채워 잠수하는 밸러스트 탱크를 가지고 있었다. 이중 선체가 구현되면서 압력을 버텨낼 구조물을 더 이상 좁은 실내공간에 집어 넣지 않아도 되었다. 외부 선체도 어느 정도의 압력은 견뎌낼 수 있었다. 물론 외부로 옮긴 연료탱크가 폭뢰 공격을 당하면 연료가 새어나가 잠수함의 위치를 노출시킨다는 단점도 있었다.


U-1은 선수 어뢰관 하나와 3발의 어뢰(한 발은 어뢰관, 두 발은 재장전용)를 가지고 있었다. 무인 미니잠수함이라고 할 수 있는 어뢰는 크기는 작아도 상대적으로 큰 폭발력을 냈고 전함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 근거리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정확도도 매우 높았다.


22명의 승무원을 실은 U-1은 30.5m까지 잠수할 수 있었다. 수면 최대속도는 11노트 정도였고 10노트 속도로 1,500해리(약 2,775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잠수 항해속도는 8.7노트로 알려져 있으며 5노트의 속도로 93km를 항해했다. 그리고 통제탑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잠망경을, 공격적인 부리모양의 선수에는 어뢰발사관을 숨기고 있었다.


U-1은 혁신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실전에 쓰이진 못했다. 1900년대 초반의 잠수함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서 1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에는 이미 구식이 되었고 훈련용으로만 사용했다.


그렇지만 U-1은 디젤엔진 잠수함의 원형이 되었고 직계인 U-9은 1914년 9월에 한 시간도 채 안되어서 3척의 영국 순양함을 격침시켰다. U-9은 2주 만에 넬슨 제독이 평생의 해전에서 잃은 것보다도 더 많은 영국 해군을 죽였다.


핵잠수함은 모항을 떠나자마자 잠수해서 몇 개월 동안 떠오르지 않아도 되지만, 1950년대까지의 잠수함은 필요한 경우에 잠수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지 작전기간 중 99%는 수면에 떠 있어야 했다. 공격하거나 숨을 때에만 잠수했는데 그것도 수심 깊이 내려가지 못하다가 1944년이 되어서야 스노클을 수면 위로 내놓고 흡기배기를 하게 되면서 잠수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유보트는 수면속도와 내항성능(Seakeeing)이 중요했다. 겨우 5노트의 속도로 넓은 지역을 순항하며 적의 상선을 찾아 다닐 수는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유보트는 사방의 압력을 견디는 구조보다는 통제탑이 달린 어뢰정에 가까웠다.


독일은 잠수속도를 높이기 위해 잠수함을 날렵한 입담배 모양으로 만든다면 거센 물결에 선체가 요동을 쳐서 승무원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유보트의 통제탑은 난간, 사다리, 마스트, 방수테두리(Coaming, 갑판승강구 주변의 침수를 막는 테두리)가 더해지면서 크기가 커졌다. 갑판에는 86mm~105mm의 포를 얹을 수 있는 고항력 나무갑판(High-drag teak deck)이 더해졌다.


배터리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유보트 선장은 목표물과 어뢰사정거리를 잘 계산한 후에 잠수할 타이밍과 위치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선박이 평상시에도 지그재그로 항로를 자주 바꾸며 잠수함의 공격을 봉쇄했다.


한 번만 항로를 틀어도 유보트 선장이 고생스럽게 만들어낸 계산은 모두 수포가 되었다. 이렇게계산이 틀어지면 수면 아래에서는 20노트로 순항하는 전함은 물론이고 10노트 속도의 상선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잠수함의 속도는 겨우 5~6노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보트는 수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헐리웃 영화를 보면 폭뢰를 맞은 잠수함이 마지막 수단으로 수면에 떠올라 갑판포로 구축함을 상대하지만 그건 그냥 영화일 뿐이다. 사실은 1차 대전 당시의 주 목표물인 상선을 상대하기에 갑판포가 훨씬 더 효과적이며 경제적이었다. 어느 함장도 몇 발 없는 귀중한 어뢰를 작은 상선에 쏘고 싶어하지 않았다.

보통은 선체 내에 들어가 있다가 상선을 공격할 때에 갑판을 뒤집어 포격을 가했다.  모양새는 볼품없어도 75mm였기 때문에 소형 상선에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1차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유보트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였는데 세계 최초의 비무장 잠수수송선이었기 때문에 U-번호 체계보다는 도이칠란트로 불렸다. 길이 65m, 폭 8.9m, 배수량 2,272톤의 미니 제플린(독일의 대륙간 비행선)이었다. 1916년 도이칠란트는 미국을 2번(볼티모어와 뉴런던) 방문했는데 미국에 화학물과 염료를 가져가고 니켈, 구리, 고무와 같은 전략물자를 가져왔다.


영국은 북대서양을 봉쇄해 독일에 큰 피해를 주었는데 도이칠란트가 수면 16노트의 속도로 운항하다가 봉쇄망을 만나면 잠수해 통과했다. 그리고 영국해군이 미국 동부해안에 펼쳐놓은 경계망도 무사히 피했다. 독일은 도이칠란트를 U-155로 개명하고 6척의 자매함과 함께 장거리 상선습격 작전에 투입했다.

U-53도 1916년 가을에 미국의 뉴포트(Newport)항을 방문했었다. 10월 8일, U-53은 미군을 방문하고 항구를 빠져 나오자마자 만난 5척(영국3, 노르웨이1, 네덜란드1)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시켰다. 모두 국제수역에서, 등대선 낸터킷(Nantucket)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해상을 봉쇄 당한 독일은 잠수함을 이용해 수뢰를 설치했는데, 수뢰설치 전용 잠수함인 UC를 개발해 배치했다. 잠수함이 설치한 수뢰는 총 3백만 톤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등 큰 효과를 거뒀지만 잠수함에게도 치명적인 무기였다.


UC 잠수함은 대부분 수뢰가 미리 터지거나 이미 설치된 수뢰를 건드려서 침몰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UC1~UC15까지 모든 수뢰전용 잠수함이 침몰하거나 노획당했다. 수뢰를 많이 싣기 위해 어떤 무기도 장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UC-11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뢰만이 유일한 공격 수단이었다. 수뢰를 설치하기 위해 연근해 작전을 주로 하다 보니 좌초하기 쉬웠고 이미 설치된 수뢰를 건드리는 사고가 잦았다. UC-12는 튜브로 내보내기 전에 수뢰신관이 동작하는 바람에 자폭하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UC-15는 원인불명으로 실종되었다.

▲1950년대 초반 배치된 미국 핵잠수함의 통로. 잠수함 실내가 어느 정도로 협소한지 잘 알 수 있다.


1차 대전 당시 유보트는 모든 면에서 우수했지만 미국 잠수함에 비해 승무원 공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승무원에게 쾌적했던 미국 잠수함은 일체의 전과가 없었던 반면에 불편한 독일 유보트는 5,708척 총 1,100만 톤(당시 전세계 상선의 화물수송량의 25%)의 선박을 격침시켰다. 물론 1차 대전 중에 건조된 370척의 유보트 중 절반을 잃는 큰 대가를 치렀다.


U-35는 224척, 총 50만 톤을 격침시켰는데 대부분이 갑판포로 격침시켰다. 출항 때마다 평균 9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려서 1차, 2차 대전 중 가장 화려한 전과를 남겼다.


독일 해군은 1915년에 일방적으로 무제한 잠수함전을 시작하면서 놀라운 전과를 나타냈다. 그 이전에는 상선이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있다는 증거가 확실한 경우에만 공격했고 그 경우에도 민간인 승무원은 구조한다는 국제조약을 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해양 전문가들은 잠수함의 공간이 너무 부족해서 상선을 공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잠수함은 격침시킨 상선의 포로를 싣거나 노획한 상선을 모항으로 끌고 갈 방법이 없었다.

▲U-23의 투시도. 최대한 많은 무기와 연료를 실어야 했기 때문에 주거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그래서 먹을 것만큼은 최고로 대접했다고 한다.


영국이 해상 봉쇄로 독일을 고사시키고 있었고 독일 해군의 일반전력으로는 봉쇄망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을 오가는 상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더구나 영국 해군은 중무장한 Q 무장상선을 대거 도입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은 상선이라고 해도 함부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었다.

▲영국 해군의 Q 무장상선.


영국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해상 봉쇄로 적을 고사시키기는커녕 자신이 익사할 판이었다. 전통적인 해상강국인 영국은 잠수함을 야비한 전쟁수단이라며 혐오했다. 1914년, 한 제독은 “전세계의 어떤 나라도 악랄하고 야비한 전쟁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약간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독일의 유보트는 영국의 모든 것을 마비시키며 평화협상장으로 끌어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미국을 유럽전장으로 초대하는 바람에 독일은 제2제국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의 참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1915년 5월 7일, U-20이 영국 여객선(RMS) 루시타니아(Lusitania)를 공격해서 미국인 120명을 포함한 1,200명을 죽인 일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참전결정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윌슨이 참전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동기는 치머만 전보(Zimmerman Telegram) 때문이었다. 독일 외무상 치머만이 멕시코 시티 대사관에 보낸 비밀통신문이었는데 영국은 이것을 1917년 1월에 입수, 해독한 후에 기쁜 마음으로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치머만 전보

치머만은 무제한 잠수함전이 벌어질 예정이며 만약 미국이 6개월 동안만 중립을 지킨다면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고 미국이 영국의 구원요청에 움직일 기세가 보이면 동맹을 찾으라는 지시였다.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해 발을 묶어두면 영국과의 평화협상을 끝낸 독일이 멕시코를 도와 아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등을 회복할 수 있게 돕겠다는 제안이었다. 치머만의 계획은 국제정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망상에 불과했다.


유명한 전사학자 토마스 패리시(Parrish)는 저서 잠수함(The Submarine)에서 멕시코가 텍사스를 합병하는 일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를 처녀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결국 영국은 황금을 싣고 중남미에서 돌아오던 스페인 상선이 해적을 상대로 수송선단을 꾸려 대응했듯이 자신도 독일 잠수함을 상대로 수송선단으로 대응했다. 처음 수송선단 편성은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잠수함이 기다리고 있는 해역에 일부러 선단을 몰아넣느냐는 반대가 많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대서양에서 30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찾는 것보다 미국과 영국 사이에 흩어진 30척을 찾는 것이 더 쉬웠다.


수송선단은 유보트에 많은 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대전과가 눈앞에 보이자 함장은 어뢰를 남발하다가 호위함에 노출되기 쉬웠다. 수송선단 편성은 피해를 이전보다 90%나 줄였고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던 독일의 꿈은 사라졌다.


1919년 종전 후 미국도 해군의 주도로 잠수함 S클래스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에스보트는 그렇게 좋은 성능은 아니었지만 노획한 유보트를 참조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1927년, 해군 엔지니어링국은 “독일의 관행을 따르지 않아 처음에는 고생을 하다가 독일이 하던 방식대로 그대로 따르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1928년, 해군이 차세대 잠수함을 개발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10년이나 지난 U-135를 원형으로 사용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가토(Gato)급 잠수함 전대를 이끌고 2차 대전에 참전했는데 마치 1939년에 노획한 메셔슈미트 BF 109를 10년 후인 1949년에도 차세대 전투기 원형으로 사용하는 꼴이었다.


독일이 최소한 바다 밑에서는 세계 제일이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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