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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흡혈귀' 전설의 시작 - 블라드 2세 드라쿨라 이야기

말뚝처형 장면을 지켜보면서 식사를 즐겼던 드라쿨라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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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 스토커의 흡혈귀 소설이 아니더라도, 블라드Vlad 3세 드라쿨라Dracula가 죽은 지 550년이 지났는데도 터키에서는 그를 악마와 동일시한다. 1462년, 드라쿨라 공작은 다뉴브강 계곡에서 전투를 마치고 후퇴하면서 역사상 가장 참혹한 ‘말뚝처형 숲(Forest of the impaled)’을 남겼다. 티르고비스테(Tirgoviste) 외곽에는 2만 명의 오스만 투르크 포로가 말뚝에 꿰뚫려 썩어가고 있었다.


말뚝처형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서서히 맞이하는 잔인한 처형인데, 드라쿨라 공작은 처형장면을 지켜보고 비명과 신음소리를 즐기며 식사를 했을 정도로 무자비했다. 평소에도 사람을 삶거나 피부를 벗겨 죽이는 것을 즐겼다. 그는 영지에서 쫓겨날 때까지 4만~10만 명의 사람을 죽였는데 황당하게도 자신은 공평한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블라드 드라쿨라가 성년을 맞이 했을 당시, 왈라치아(Wallachia) 다뉴브와 트란실바이나 카르파티아(Transylvania Carpathia) 산맥 일대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15세기 당시의 왈라치아 (현재 루마니아)는 오스만 투르크나 헝가리의 외침을 막아내기 역부족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을 중립지역으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아버지 블라드 2세는 개인적인 이유 또는 종교적 문제로 조약을 깨트렸다.


아버지가 위태로운 외교정책을 펼치던 당시 블라드 3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다. 1442년, 아버지는 블라드 3세와 7살 동생 라두를 오스만 술탄 마루드 2세에게 인질로 내주고 평화를 지켰다. 그렇지만 중립약속은 깨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0년 전에 신성로마제국을 수호하겠다는 용기사단(Order of the Dragon)에게 맹세를 한 상태였다. 그의 이름 드라쿨라는 용의 아들을 의미했고 기사단에게서 받은 이름이었다.


블라드 2세는 오스만제국에게 중립약속을 한 후 1년 만에 무라드의 봉신인 상태에서 교황이 주도한 불가리아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 불가리아 신자군 전쟁은 기독교군이 1444년 바르나(Varna)에서 참패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1390년 당시의 왈라치아 영지

불가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드라쿨라와 다른 영주들은 이제 오스만제국의 보복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드라쿨라는 아들과 영지의 안녕대신에 오히려 다뉴브 지역의 오스만 요새인 지우르지우(Giurgiu)를 포위했다. 그렇지만 헝가리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추운 겨울이어서 공성전은 진전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드라쿨라는 오스만 수비군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선의의 표시로 무라드의 보복을 피해 왈라치아로 도망쳐온 12,000명의 불가리아 피난민을 넘겼다.


바르나 패전에서 책임을 미루며 원수가 되었던 헝가리 야노스 후냐디(Janos Hunyadi - 헝가리의 유명한 지휘관, 그림참조)는 이 처사에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왈라치아공으로 드라쿨라의 적대가문인 다네스티의 블라디슬랍 단 2세를 지지했다. 왈라치아공의 직위는 아들에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왈라치아 지주귀족의 선출을 거쳐야 했다(동유럽은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왈라치아공 상속은 다네치아와 드라쿨라의 미르케아(Mircea) 두 가문으로 분열되었고 1447년, 후냐디는 드라쿨과 아들 한 명을 죽였다.

아버지가 위태로운 전쟁을 벌이는 동안, 어린 드라쿨라와 라두는 술탄의 궁전에서 불행한 인질생황을 보냈다. 성격이 거친 드라쿨라는 체벌까지 당했던 반면에 동생 라두는 술탄의 아들의 성적 유혹을 피할 정도로 궁전생활에 적응했다. 이렇게 갈라진 두 형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


아버지가 죽자, 드라쿨라는 석방되어 오스만군에 입대했다. 17살이 된 그는 왈라치아공에 오르겠다는 결심을 잊지 않았고 술탄의 1448년 왈라치아 침공에 참여했다. 2개월간 전투가 벌어졌고 블라디슬랍 단은 술탄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 이후에도 왈라치아의 상황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고 드라쿨라는 후냐디의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에 몰렸다. 후냐디는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드라쿨라는 죽이려고 했다. 드라쿨라는 브라솝(Brasov)으로 도망쳤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후냐디와 왈라치아공과의 사이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하더니 블라디슬랍 단은 무라드의 아들 메흐메드 2세와 내통했다. 후냐디는 입장을 바꿔 드라쿨라를 지원했다. 드라쿨라는 아버지와 형제를 죽이고 자신도 죽이려고 한 그의 지원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권력과 복수를 향한 야망이 더 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왈라치아공에 오르면 권력과 복수 모두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헝가리왕에게 충성을 약속했고 후냐디는 드라쿨라에게 트란실바니아 국경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후냐디는 트란실바니아의 암라스와 파가라스를 점령해 세력을 넓히면서 블라디슬랍 단을 압박했다. 오스만군이 1456년에 베오그라드(Belgrade)로 진군해오자, 후냐디는 드라쿨라에게 시비우Sibiu를 지키게 해서 오스만군이 둘로 갈리게 했다.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후냐디는 70세의 십자군 수도승 요한의 농민군과 함께 오스만군에게 공격을 퍼부어 90,000명이나 되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략도 9만 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세르비아 침공에 9만 명은 많이 과장되었죠. 실제 병력은 절반 아래가 아닐까 합니다.)


드라쿨라는 1456년 7월에 소규모의 헝가리인, 용병과 귀족을 이끌고 왈라치아 국경을 넘어 블라디슬랍의 티르고비스테로 진격했다. 전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드라쿨라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슬랍은 드라쿨라에게 죽었다고 한다. 동유럽에서 기독교의 기세가 한창 올라가던 중에 후냐디와 요한이 페스트로 죽었고 베오그라드에서 참패했던 오스만군도 전력을 되찾았다.


오스만군의 징집과 훈련체계는 동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오스만은 어린 기독교 소년을 연공으로 받거나 강제징집해서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에 예니체리(Janissary)라고 불렀던 특수부대로 양성했다. 14세기 중반에 그 위세가 대단했는데 화약무기 시대가 열린 1백 년 후에도 오스만군의 핵심전력이었다.

왈라치아공에 오른 블라드 3세 드라쿨라는 술탄의 의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왈라치아 내정에 먼저 집중해야 했다. 그는 아르마스(Armas. 게임의 한 장면)라는 용병을 고용해서 무자비한 공포정치로 내부를 탄압했다. 오스만에서는 말뚝처형 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말뚝처형을 즐겨 사용했다. 드라쿨라는 일체의 자비나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선을 넘어서는 사람은 모두 처형했다. 그의 잔혹한 처형은 독일부터 러시아까지 퍼져나갔다. 소문은 사실보다 과장되기 마련이었고 듣기만 해도 공포스러웠던 그의 행적은 흡혈귀 전설을 낳기에 충분했다.

1488년 뉘른베르크의 기록을 보면 “영지의 주요 신하와 귀족을 모두 초대했다. 식사를 마치자 가장 연장자에게 영지를 다스렸던 영주가 몇 명이었냐고 물은 후에 차례로 대답하게 했다. 각자 자신이 아는 대로 50명, 30명… 대답했다. 7명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모든 참석자를 말뚝형에 처했다. 5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모두 말뚝에 박았다.”


루마니아 민요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드라쿨라의 형은 산채로 묻혀 죽었는데, 그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모든 귀족을 부활절 만찬에 초대했다. 부활절 복장으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을 붙잡아 포이에나리Poienari 성터로 데려가 중노동을 시켰고 귀족의 복장은 헤지다 못해 아예 나체가 되었다고 한다.


드라쿨라는 암라스와 파가라스의 작센 상인과도 갈등을 빚었다. 불공정 행위를 한다고 비난하면서 두 도시를 적대시했고 자신을 후원했던 블라디슬랍의 형제 단 3세를 암살했다. 드라쿨라는 오스만제국과 점차 거리를 두면서도 술탄에게서 왈라치아 통치에 대한 양보를 받아냈다. 1459년, 교황 비오 2세가 유럽 지도자를 호출해서 십자군 전쟁을 호소하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3세는 이교도와의 전쟁을 약속했지만 드라쿨라만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1460년,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왈라치아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세르비아 스메데레보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뉴브 주변의 지우르지우와 니코폴리스를 더 장악했다. 드라쿨라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동맹이자 친구인 미할리 스질라기(Mihaly Szilagyi. 헝가리 왕의 삼촌)가 죽었다. 그는 불가리아를 정찰하던 중에 오스만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헝가리 군사정보와 드라쿨라의 친 헝가리 정책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술탄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


드라쿨라는 복수심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혀서 오스만제국에 보내는 연공을 중단하고 헝가리와 오스만제국 사이의 완충역할도 포기했다. 그렇지만 왈라치아의 완전한 독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고, 전쟁을 하려면 왈라치아 국민의 절대적인 충성심이 필요했다. 국가라는 개념은 유럽 일부에서 이제 막 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동유럽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바랄 수도 없었다.

주인공이 너무 늦게 등장했죠? 블라드 2세 드라쿨라입니다. 왠지 한 성질하게 생겼습니다.

1461년, 드라쿨라는 3년째 연공을 보내지 않았고 3만 두카트(유럽 금화)와 500명의 어린 소년(예니체리용)을 빚지고 있었다. 메흐메드는 소아시아 정벌 중이어서 대리인 함자 파샤를 파견해 연공미지급을 문책하게 했다. 술탄은 곧바로 계획을 바꿔서 드라쿨라를 죽이기로 하고 함자 베이를 다시 보내 드라쿨라를 지우르지우로 유인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드라쿨라는 계략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함자 베이와 함자 파샤를 포로로 잡았다.


1461년 말, 드라쿨라는 오스만제국의 굴레를 벗어나기로 결정하고 다뉴브 일대의 오스만 요새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는 병사를 오스만 복장으로 위장한 후에 지우르지우의 성문을 그대로 통과해 점령하고 불을 질렀다. 드라쿨라는 불가리아 다뉴브강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요새와 항구를 약탈했다.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사로 잡은 오스만군을 말뚝에 박았고 노예에서 풀려난 불가리아, 그리스와 세르비아인이 왈라치아로 몰려들었다.


드라쿨라가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죽은 숫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우르지우에서는 6,414명, 에니 살라 1,350명, 두로스토르 6,840명, 니코폴리스와 지그헨 1,138명 등으로 오스만과 불가리아인을 23,884명을 죽였는데 집에서 불타 죽은 사람과 드라쿨라가 모르는 희생자를 합치면 훨씬 많은 숫자가 죽었을 것이다.


그는 함자 베이의 머리와 함께 죽인 사람들의 귀, 코와 머리를 승전증거로 헝가리 왕에게 보냈다. 일부러 포로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기 위해 말뚝 끝을 뭉툭하게 만들고 꽂았는데, 그의 만행에 질려버린 오스만 주둔군이 소아시아로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드라쿨라는 흑해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미 지나치게 멀리 온데다가 오스만제국의 앞마당이었기 때문이다.


메흐메드는 다뉴브강이 얼어붙는 겨울까지 기다려야 했다. 드라쿨라는 술탄의 보복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헝가리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헝가리 왕은 이미 교황에게서 십자군 군자금을 받았지만 신성로마제국과의 분쟁이 끝나지 않아 드라쿨라를 도울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병력만 내주며 교황에게서 받은 군자금 생색만 냈다.


메흐메드는 불가리아를 거쳐 브라일라Braila로 18,000명의 선봉대를 보내 왈라치아 항구를 약탈하고 시민을 노예로 삼았다. 드라쿨라는 다뉴브 오른쪽 강변으로 후퇴한 후에 오스만군의 배후를 기습해서 8,000명을 죽였다. 겨울내내 진행된 드라쿨라의 작전상 후퇴는 성공적이었지만 1462년 5월, 완전히 날씨가 풀리자 메흐메드는 소아시아 원정을 중단하고 유럽 선봉대에 합류했다. 이제 오스만군은 드라쿨라가 장악한 다뉴브강 일대를 마음대로 공격할 전력이 되었다. 드라쿨라가 단 한 번만이라도 실수한다면 그대로 끝날 판이었다.


술탄의 군대는 소화기와 120문의 대포로 무장한 60,000명의 병력과 백전노장의 지휘관이 포진했다. 예니체리 중 절반 이상을 동원했고 선봉에는 노예부대가 섰다. 전투에서 승리해서 자유를 되찾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물러나면 채찍과 처형이 기다리는 부대였다. 반면에 드라쿨라의 병력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핵심전력은 귀족의 중장갑 기병이었다. 러시아 기록을 보면 보병 22,000명에 기병 8,000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헝가리 주재 베니스 외교관에 따르면 모두 22,000명에 불과했다.


술탄은 5월 말에 25척의 갤리선과 150척의 소형선박을 이끌고 니코폴리스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려고 했다. 미리 정보를 얻은 드라쿨라의 궁수가 접근하는 선박에게 화살을 쏘며 6일간 격전을 벌였지만 오스만군은 다뉴브강변에 올라섰고 대포가 왈라치아군에게 포격을 했다. 드라쿨라는 서둘러 북쪽으로 후퇴했고 초토화 작전으로 오스만군의 진격을 늦추려고 했다. 드라쿨라는 적의 진격로에 있는 모든 마을과 곡식을 불태우고 사람과 가축을 학살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나머지 피난민은 카르파티아 산맥과 스나고프 섬의 수도원으로 피신시켰다. 지형을 잘 아는 드라쿨라의 군대는 함정을 파고 적을 기다렸다. 날씨도 오스만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목을 축일 단 한 방울의 물도 없었다. 햇빛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케밥을 갑옷 위에 놓고 구을 정도였다.”


드라쿨라의 병력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드라쿨라는 몸통대신에 머리를 바로 노리기로 했다. 메흐메드의 천막이 티르고비스테 남쪽의 산맥에 차려졌다는 정보를 받고는 기습을 결정했다. 6월 17일, 드라쿨라는 느슨한 경계를 뚫고 본진으로 쳐들어갔다. 야습에 대한 양쪽의 기록은 완전히 엇갈리는데, 드라쿨라가 서술한 기록을 보면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적은 피해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대신에 부상자는 많았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오스만의 기록은 “아군은 적의 공격이 악마 같은 말뚝처형이 직접 이끄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가까이 오게 기다렸다. 그가 보이자, 아군은 ‘알라신이여 축복하소서’를 외치며 적을 학살했는데 절반이 넘는 이교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 역사가의 기록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다.


“횃불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술탄의 천막을 향해 돌격했는데 술탄이 없자 재상의 텐트를 공격했고 격전이 벌어졌다. 그들은 난타, 당나귀와 다른 수송용 동물을 죽였다. 밀집대형 전투라 큰 피해는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대열을 벗어나면 오스만 병사에게 바로 사살되었다.”


전투는 해가 뜰 때까지 계속 되었고 드라쿨라는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작전에는 실패했다. 화가 치민 그는 앞 열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에게는 보상을 하고 뒤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에게는 여자라고 욕을 하며 말뚝형에 처했다. 드라쿨라의 대담한 야습을 끝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끝없는 소모전에 지친 귀족들은 술탄의 비호를 받는 라두에게 이탈했다.


메흐메드는 라두와 이탈한 귀족을 데리고 티르고비스테 앞에 도착했지만 드라쿨라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도시에 불을 지르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도시 주변의 1.5km에는 함자 파샤를 비롯해 오스만 포로가 모두 말뚝에 박혀 썩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말뚝처형의 숲이 만들어져 있었다. 술탄은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는 사람의 나라는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만 되뇌였다.


드라쿨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병사들이 역병에 계속 쓰러지자, 메흐메드는 동쪽으로 퇴각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위대한 지도자가 이번에는 말뚝처형의 숲을 보고 기가 질려 버렸던 것이다. 드라쿨라는 귀족이 이탈하고 내부에서도 분열이 계속되어 티르고비스테를 방어하지도 퇴각하는 적을 요격하지도 못했다. 왈라치아 귀족 갈레스Gales는 야습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드라쿨라와 등을 돌렸고 드라쿨라의 사촌 스테펀은 오스만 함대의 지원을 받아 칠리아Chilia 요새를 공격했다. 8일 동안 요새를 포격했지만 믿을 수 없게도 한 줌도 안되는 왈라치아와 헝가리 수비대가 공격을 막아냈다.


칠리아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왈라치아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드라쿨라는 부자우 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지만 2,000명을 잃었고 이미 대세는 굳어졌다. 그는 부카레스트, 브라일라와 티르고비스테를 잃었다. 무엇보다 전투에서 잃은 병력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1462년 가을, 드라쿨라는 포이에나리 성으로 퇴각했고 라두와 오스만군은 그 뒤를 쫓아 성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성벽은 아직 건재했지만 드라쿨라의 트란실바니아 출신 아내는 오스만에게 포로가 되느니 물고기 밥이 되겠다며 강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도 남아있는 포이에나리 성터의 말뚝처형 당한 시민 모형

드라쿨라는 성이 함락되기 전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성을 빠져나갔다. 전설에 따르면 성에 남겨진 아들은 왈라치아 농부가 키웠다고 한다. 드라쿨라는 몇 안되는 병력을 데리고 트란실바니아 산맥에 들어갔고 헝가리 왕 코르비누스Corvinus에게 소식을 전해 구원을 받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헝가리 왕은 여전히 어떤 구원도 보내지 않았다.


드라쿨라는 헝가리 왕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1462년 11월에 구금당했다. 코르비누스가 메흐메드와 밀약을 맺었다는 추측이 있는데 확증은 없다. 코르비누스는 드라쿨라의 편지를 위조해서 그가 오스만과 조약을 맺고 헝가리를 해치려 했다고 비난했다.


라두는 1462년 7월에 왈라치아공에 올랐고 드라쿨라에게 협력했던 귀족 대부분이 추방당했다. 드라쿨라는 부다로 끌려가서 12년 동안 구금되었다. 라두가 왈라치아를 통치하자 술탄은 왈라치아 일대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아마도 드라쿨라에게 입은 피해 때문에 왈라치아의 자치권을 인정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루마니아 역사가는 결국 드라쿨라가 벌인 1462년 원정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술탄이 왜 왈라치아의 자치권을 인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코르비누스는 드라쿨라를 1474년까지 붙잡아두었다가 동방정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석방했다. 1476년 11월, 드라쿨라는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후원에 힘입어 다시 영지를 되찾았다. 스테펀이 결국에는 약속을 지켰고 드라쿨라가 부활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남겨주었다. 그렇지만 1476년 말, 드라쿨라는 부쿠레슈티 부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드라쿨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수 많은 추측이 난무한다. 오스트리아 역사가는 드라쿨라가 오스만군과 용감히 싸우다가 자객에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드라쿨라가 부하에게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오스만군은 그의 머리를 밀납에 절여 술탄에게 보냈고 궁전 밖에 효시되었다. 블라드 3세 드라쿨라의 마지막 재임은 겨우 2달을 넘기지 못했다.


by 우에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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