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트리니티] 인류 최초 핵실험의 광경

조회수 2020. 12. 22. 08: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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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악의 발명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 최초의 핵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으로 생긴 버섯구름

1945년 7월 15일, 오전 5시 29분 뉴멕시코 주 알라모고르도(Alamogordo) 폭격연습장에서 작전명 ‘트리니티(Trinity)’로 불린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다. 사흘 전, 높이 30m의 철탑에 설치한 실험용 폭탄 ‘가제트(Gadget)’는 페르미(Fermi)와 그로브스(Groves), 오펜하이머(Oppenheimer) 등 맨해튼 계획의 주요 인물들이 지켜보는 중에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20킬로톤의 티엔티(TNT)와 맞먹는 인류 최초의 핵폭발은 직경 76m의 크레이터(crater, 구덩이)를 만들었고, 충격파는 반경 160Km에까지 미쳤다. 가제트의 폭발로 섬광은 400km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됐고, 굉음은 80km까지 울려 퍼졌으며, 버섯구름은 12km 높이까지 치솟았다.


▲ 철탑 꼭대기에서 실험용 폭탄 ‘가제트(Gadget)’가 최종 조립되고 있다.

사상 최악의 발명품


이 성공적인 실험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을 낳았다. 인류가 만들어 낸 것 가운데 사상 최악으로 치부되는 이 발명품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낼 수 있게 한 대신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이다.


“이제 우린 모두 개자식이 됐군.(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


이 실험이 끝난 뒤, 내폭형 핵폭탄의 실험을 기획하였던 하버드의 물리학 교수 케네스 베인브리지((Kenneth Bainbridge)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기엔 이후 태어날 가공할 무기가 인류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내다보면서 느낀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모든 역사와 시초가 그러하듯 이 가공할 무기의 싹은 1939년 8월 2일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서명하여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비롯하였다.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로 불리는 이 편지는 ‘우라늄’을 재료로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들고 있었다.




"최근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와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저와 주고받은 연구 필사본들을 살펴본 결과, 저는 우라늄을 재료로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이 머지않아 사용될 수 있다고 예측하게 되었습니다.[…중략…]"

"이 새로운 현상은 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질 새로운 형태의 폭탄은 가장 낮추어 생각하여도 극도로 강력한 폭탄이 될 것입니다.[…후략…]"

- 알베르토 아인슈타인

미국 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라늄 광석을 비축하고 엔리코 페르미와 다른 과학자들이 핵 연쇄 반응 연구에 박차를 가하도록 요청하였다. 1941년 6월 28일, 루즈벨트는 행정명령 제8807호에 서명하였고, 그에 따라 과학연구개발사무소(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가 만들어졌다.


이미 영국에서 의결된 바 있었던 원자폭탄의 개발은 몇몇 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가능한 일'로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1941년 10월 9일, 루즈벨트는 부통령 헨리 웰러스와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와의 회의를 통해 원자 폭탄 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참여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이 바로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이다. 민관 합동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공식 이름은 대체자원개발(Development of Substitute Materials)이었는데 맨해튼은 공식 이름을 대신한 미국측의 암호명이었다.

▲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모인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물리학자들.(1946년 촬영)
▲ 맨해튼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과학자들. 왼쪽부터 보흐, 오펜하이머, 파인먼, 페르미

맨해튼 계획의 군사 부문은 ‘맨해튼 지구(Manhattan District)’라 불렸는데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육군 공병대의 관할로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되었다. 맨해튼 계획은 1939년에는 자그마한 연구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엔 3만 명이 참여하게 되고 당시 화폐로 20억 달러를 쏟아 부은 엄청난 공학 프로젝트였다.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


총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롯하여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등 당대 최고의 두뇌들이 여기 참여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싹을 틔웠던 아인슈타인은 정작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트리니티 실험 이후 포신형과 내폭형 등 두 종류의 핵폭탄이 만들어졌다. 포신형 핵폭탄에는 ‘리틀 보이(Little Boy)’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내폭형 핵폭탄은 ‘패트 맨(Fat Man)’이라 불리었다. 맨해튼 지구와 미 육군항공대는 고쿠라, 히로시마, 니가타, 교토 등을 폭격 예정지로 선정하였고, 이 가운데 히로시마와 교토를 최종 선정하였다. 그러나 그로브스 장군은 교토가 폭격 실패 위험이 높다고 판단하고 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나가사키로 교체하였다.


리틀 보이를 구성하는 부품들은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에 실려 미국 자치령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tinian) 섬으로 운반되었다. 이 순양함은 운송을 마친 후 사흘 만에 일본군 잠수함에 격침되었으므로 나머지 부품은 수송기로 운반되었다. 패트 맨의 부품들도 B-29에 실려 티니안으로 운반되었다.

▲ 에놀라 게이에서 촬영한 ‘리틀 보이’가 일으키는 버섯구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8월 6일, 폴 티베츠(Paul Tibbets) 대령은 제393폭격대 소속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에 리틀 보이를 탑재하고 출격하였다. 그는 일본 육군의 주요 집결지이자 승선지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던 히로시마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폭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는 고쿠라와 나가사키로 기수를 돌릴 예정이었다.


히로시마 현지 시각 8시 15분, 폴 티베츠는 고도 9,470m 상공에서 60kg의 우라늄 235가 담긴 포신형 핵분열 무기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폭탄은 43초 동안 떨어져 도시 위 580m 상공에서 폭발했다. 리틀 보이는 TNT 13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 530m에 달하는 구름 기둥이 솟아올랐다. 12㎢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약 7만 명에서 8만 명이 폭발 당시 사망하였다. 부상자 역시 약 7만 명에 달했다.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상공에서 ‘패트 맨’이 폭발하고 있다.

8월 9일, 찰스 스위니(Charles W. Sweeney) 소령은 패트 맨이 탑재된 B-29 박스카(Bockscar)에 올랐다. 이륙 당시 B-29에 탑승했던 사람들 가운데 폭탄의 위력을 보고하기 위해 온 과학자 한 명 외엔 아무도 폭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첫 목표는 고쿠라였지만 구름이 끼어 시계가 나빴으므로 찰스 스위니는 대체 폭격지인 나가사키에 패트 맨을 투하하였다. 나가사키에는 거의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아 폭탄의 위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TNT 21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력은 나가사키 전체 시 면적의 약 44%를 파괴해 버렸다. 3만5천여 명이 죽었고 부상자는 6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로브스는 8월 19일 제3의 폭탄을 투하하기로 계획하고 이미 두 발의 패트 맨을 조립해 두었다. 그러나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두 발의 패트 맨은 비키니 환초로 운반되어 전함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실험하기 위한 크로스로즈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가운데 한 발은 1946년 7월 비키니 핵실험으로 바다 속에서 폭발되었다.


맨해튼 계획은 1946년 12월 31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나, 군사 부문인 맨해튼 지구는 1947년 8월 15일까지 유지되었다. 실제 종전을 앞당기기는 했지만 맨해튼 계획으로 비롯된 핵무기 개발은 이후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등장시킨 이론들)을 찢어버렸을 것이다(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알베르토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후회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핵무기 개발을 권고한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에 서명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반핵운동에 참여하여 1955년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여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원폭이 투하된 뒤 핵무기에 대해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다”며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애국주의적 인식에서 원폭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추락했다. 1950년 수소폭탄 개발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가 오펜하이머는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핵개발에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진 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한스 베테(Hans Bethe),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리처드 파인만 (Richard Feynman) 등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한 일이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71년, 오펜하이머가 내다본 것처럼 미국의 ‘핵 독점’은 유지되지 못했다.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핵무기 개발 경쟁의 결과로 2016년의 세계는 훨씬 덜 안전해졌다. 미국은 지난 50년 동안 7만 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었고 핵무기 프로그램에 5조 달러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었다.



현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 외에도 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인도·이스라엘·파키스탄·북한 등 8개국에 이른다. 2012년 기준 핵무기 보유국의 핵무기 비축량 추정치에 따르면 드러난 가용 탄두는 4300기가 넘는 상황이다.


2016년 현재 핵은 한반도에서도 여전히 실질적인 위협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금 경북 성주에서는 북한의 핵 공격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서 배치하겠다는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로 주민들의 저항이 뜨겁다.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면서 가공할 핵폭탄의 위력과 핵 개발에 참여한 자신에 대한 회한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수천 개의 태양이 한 번에 폭발해 그 섬광이 전능한 하느님의 영광인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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