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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군신(軍神)으로 기려지는 양세봉 장군의 전설

조회수 2020. 12. 17. 09: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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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빈에는 양세봉 장군을 기리는 거대한 흉상이 세워져 있다.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
▲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1896~1934)

1934년 9월 20일, 랴오닝성 환인(桓仁)현 대랍자구(大拉子溝)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1896~1934) 장군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했다. 향년 38세. 이십 대 초반에 무장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양세봉은 전투의 현장에서 죽었다.


그는 조선혁명군으로 싸운 다섯 해 동안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과 80여 차례 전투를 벌여 일본군 1천여 명을 죽였고, 흥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를 승리를 이끈 이였다. 독립군이 좌우로 갈려 좌익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은 중국 본토로 옮겨갔을 때, 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운 독립군은 그의 휘하 조선혁명군 500명뿐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잘못을 관대하게 감쌌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욕설로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병사들에게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잎담배를 피운 지휘관이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가장 오랜 기간 항전을 이어감으로써 일본군 최대의 표적이 된 독립군이었다.




남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계열로 좌우익 대립의 중심을 지켜, 좌익으로부터 ‘극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헌신은 김일성까지 움직였다. 만주에서 좌익의 실책을 지적하여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한 김일성을 성찰에 이르게 한 것도 양세봉이었다. 그가 남의 현충원과 북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된 이유다.


양세봉은 평안북도 철산 사람이다. 호는 벽해(碧海), 본명 외에 양서봉(梁瑞鳳), 양윤봉(梁允奉)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6살 때 부친을 여읜 그는 스물에 혼인하였으나 가난으로 호구가 어려워지자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 영릉에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1919년 봄 홍묘자(紅廟子)로 옮겼다. 국내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립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1922년 겨울, 양세봉은 의주·삭주·귀성군의 국경선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에 참여함으로써 이후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진 항일 무장투쟁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는 의주군 옥상면 주재소 습격, 유수동 습격전 등에 참가하면서 전투를 익혔다.


일제의 이른바 ‘토벌’이 시작되자, 천마산대는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여 서간도 지역의 무장 독립군을 통합한 광복군총영(총영장 오동진 1889~1944, 1962 대한민국장)과 합류하였다. ‘광복군 철마 별영’으로 편제된 뒤 양세봉은 별영의 검사관으로 의용군의 훈련을 맡아 독립군 전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그는 소대장으로 국내 진입 작전에 참여하였다. 1929년, 남북 만주 일대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통합해 랴오닝성 신빈현 흥경에 본부를 두고 조직된 국민부 소속 군대로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자 제1중대장이 되었다.


출처: 독립기념관
▲랴오닝성 신빈현에 있는 조선혁명당 본부 터(현재 중국인 운영 공장)
“조선 혁명의 최후 해결은 조선 노력대중(勞力大衆)의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일본 군대·경찰·헌병·감옥·소방대 등을 근본적으로 격파하고, 정치·경제·문화 기타 제국주의적 제(諸) 시설을 모두 파괴함에 있다. 또한, 조선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을 일본 제국주의의 일체 세력을 구축 박멸하는 것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 ‘조선혁명군 선언서’ 중에서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가 만주 전역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독립군 부대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조선혁명당이 신빈현 하북에서 연 긴급회의를 일본 토벌대가 급습하여 조선혁명당의 주요 간부 다수가 붙잡혔다.




만주 유일당 조선혁명군의 대일 전쟁


조선혁명당이 조직을 정비하여 혁명군을 개편할 때, 양세봉은 총사령으로, 김학규(1900~1967, 1952 독립장)는 참모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중국의 반만(反滿) 항일군인 랴오닝 민중 자위군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1932년 3월, 한중연합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영릉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듬해(1933) 패전한 일본군은 흥경(興京)과 청원(淸原) 지방을 공격했는데, 정보를 사전 입수한 조선혁명군 1천 명 병력은 양세봉의 지휘로 청원지방 수비를 맡고, 1만 명 자위군은 흥경성을 지키도록 했다. 조선혁명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기습공격으로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패전하여 남산성으로 퇴각했으며, 대원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양세봉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이어가면서 전투에서 잃는 병력을 보충하고자 조선혁명군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직접 군대를 양성하였다. 1934년 7월 중순, 양세봉 부대는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의 잔류병 5백 명과 합세,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1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과 교전, 이틀 동안의 격전을 치렀다. 이 승전이 노구대 전투다.


그 뒤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주둔하고 있는 의용군 최윤용 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의 습격을 받았으나 하였으나 조화선(1892~?, 1995 독립장) 부대의 지원을 받아 물리쳤다. 이때 패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최주봉 부대가 80여 명을 사살하였다.


양세봉은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해 만주에서 벌어진 좌우익 대립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우익을 대표해 좌익과 맞서 좌익으로부터 ‘극우’로,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 총사령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 김학규를 ‘3대 살인 반동 영수’”(김학규)로 불릴 정도였다.

출처: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랴오닝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진의 조선혁명군 사령부 근거지
▲양세봉 장군이 순국한 요녕성 신빈현 향수하자 소황구촌으로 내려가는 길 우측 옥수수밭

그러나 그는 중국 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사령관 양정우(본명 마상덕)과 항일의 깃발 아래 함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남만주 일대에서 한국과 중국의 연합 항일 기류를 형성케 할 만큼 유연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를 두고 “홍군과 조선혁명군은 이미 함께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북인민혁명군과의 연합 작전은 양세봉이 전사하고, 1937년 여름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 편입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이 소멸할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쾌대무자 전투와 통화현 강전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벌인 전투 등이 이 연합 작전이 이루어낸 승리였다.




민족주의자 양세봉과 김일성


한편, 만주 안도현 소사하에서 유격대를 창건한 김일성(1912~1994)이 양세봉과 조선혁명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은 것은 1932년이었다. 일찍이 부친인 김형직(1894~1926)과 의형제였다는 양세봉 총사령과 군사적 연대를 제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김일성은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양세봉의 신랄한 조언에 머리를 조아린 사실을 고백한다. 양세봉은 김일성에게 좌익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하는 바람에 인심을 잃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꾼들을 폭군으로 만들고,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고 이렇게 하니까 중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소 닭 보듯이 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자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1995년 왕청문 인민 정부가 건립한 ‘항일 명장 양서봉’의 흉상

양세봉의 뼈아픈 지적에 김일성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의 넋 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양세봉 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 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양세봉의 승전은 역설적으로 일본군의 양세봉 제거 공작을 가속했다. 1934년 9월 19일(음력 8월 11일), 밀정 박창해는 혁명군을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한 뒤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면서 양세봉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 골짜기로 유인했다. 부관들과 함께 왕명번이 보낸 아동양을 따라 대랍자구로 가던 양세봉은 수수밭에 매복하다가 뛰쳐나온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싸우다가 쓰러졌다.


대원들이 조선족의 집으로 옮겼지만, 상처가 위중하여 한가위를 사흘 앞둔 다음 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남만주 일대의 주민들에게 ‘군신(軍神)’으로, 동포들에겐 ‘소작농 장군’으로 불리었던 민족주의자 양세봉의 구국을 위한 헌신이 마침내 마감된 것이다.


혁명군은 양세봉의 시신을 고구려 산성 기슭에 묻었는데, 통화 일본 영사관 경찰이 주민들을 위협하여 묘를 알아냈다. 일제는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서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의 목은 통화현 시내에 효수되었다.




조선혁명군과 양세봉,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해방 후 북한은 양세봉의 부인 임재순과 외아들 의준을 평양으로 초청해 최상의 예우를 다했다. 6·25전쟁 중에는 안전을 위해 다시 중국으로 이주시켰다가 전후에 다시 초청하기도 했다. 1961년 가을, 평양 근교로 이장한 양세봉의 유해는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남한에서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양세봉의 허묘를 조성한 것은 1974년이다. 이로써 그는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묘를 조성하게 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남북 양쪽에서 추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의 공적이 크고 무겁다는 뜻일 것이다.

▲남북이 각각 기리고 있는 양세봉 장군.정창현 외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독특한 위상은 그간 남북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양세봉 장군과 그가 지휘한 조선혁명군의 활약상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의 저자 조문기)이라는 사실은 남북과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 독립투쟁사의 역설이기도 하다.


민주 지방에서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약한 마지막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이었던 조선혁명군은 양세봉의 전사 후, 조직을 추슬러 그의 유지를 계승하고자 지속적인 무장투쟁으로 일본을 공격했다. 혁명군은 1935년 중국 의용군과 중한 항일동맹회를 결성하여 연합 작전으로 ‘피의 우의’를 이어갔다.


혁명군은 일본군과 만주국 정부의 수색과 체포 작전으로 내몰리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겪었고, 일본군과 교전 끝에 포로가 된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1902~1937, 1968 독립장)는 총살되었다. 이후 전사, 체포, 피살, 처형 등으로 혁명군의 순국이 이어졌다. 1937년 여름, 최윤구(1903~1938, 2005 독립장) 등 60여 명의 간부와 대원들이 환인현에서 정식으로 항일연합군 제1군으로 편입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소멸했다.


랴오닝성 신빈 민족 자치현의 왕청문(旺淸門)은 지금은 퇴락한 시골 마을이지만, 1920년대 말에는 만주 독립군 통합정부인 ‘국민부’가,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 본부가 있었던 ‘한국 독립운동의 수도’였다. 해방을 10년도 넘게 앞둔 1934년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양세봉이 남긴 흔적은 아직도 전설로 남았다.


지금도 신빈 지역에는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민요가 전하고, 왕청문의 조선족 학생들은 ‘양세봉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족 학교는 폐교되고 말았지만, 교정 한쪽에는 대리석으로 조성한 높이 5.4m의 거대한 조각이 있었다. 1995년 왕청문 인민 정부가 양세봉의 항일투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항일 명장 양서봉’의 흉상이다.


2008년 학교가 한족에게 팔리면서 양세봉 흉상은 2009년에 강남촌 협피구로 이전하였지만,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물을 세운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것은 지역 인민들에게 ‘군신’으로 기려지는 양세봉의 ‘기억’과 ‘전설’ 덕분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 3등급 서훈에 대해 독립운동 단체와 역사학계는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을 총칼 들고 싸운 장군에게 3등 훈장?”이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서훈의 형평성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헌신과 투쟁, 그리고 순국에 이른 역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바래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족의 위기 앞에 기꺼이 한 몸을 내던진 역사, 그 ‘집단 정체성’과 ‘기억의 쇠퇴’일 터이기 때문이다.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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