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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항일운동의 불씨 된 '조선 여학생 희롱 사건'

조회수 2020. 12. 11. 10: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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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동은 얼마 뒤 일어난 거대한 항일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 1929년 11월 3일부터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

1929년 11월 3일,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충돌로 촉발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광주 시내에서 빚어진 2차 충돌은 11월 12일 광주 지역 학생 대 시위를 거쳐 이듬해 3월까지 호남지역은 물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항일 운동으로 발전했다.


닷새 전인 10월 30일, 광주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한 뒤 벌어진 한일 중학생들 간의 난투극이 몇 개월 동안 이어진 광범위한 항일 독립운동으로 전개되리라고 예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이 운동이 한일 학생들 간의 사소한 다툼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국권을 빼앗긴 지 20여 년 식민지배가 고착되고 있다고 확신한 일제는 동아시아 침략을 앞두고 조선에 대한 우민화 정책을 가속하고 있었다. 일제는 우리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직업교육과 일본어·일본사 교육을 강제했다. 또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을 금지하는 등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일상화되고 있었다.




11월 3일 타오른 불길, 이듬해 3월까지


이러한 식민지배의 억압에 맞서 조선 학생들은 항일의식을 기르며 광주시 소재 각 고등보통학교(중고통합과정)에 조직됐던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결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학생의 비밀결사를 배후에서 지도한 것은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의 주요 임원들이었다.


3년 전(1926)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 만세운동 이후 흩어진 민족 역량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신간회가 조직된 것은 1927년이었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의 결집체인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 ‘신간회’는 세를 넓히면서 각 지역의 청년, 노동, 농민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들의 충돌은 그러한 시점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미 일본인들은 식민지 깊숙이 들어와 상층 계급으로 각종 정치·경제적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과 부딪친 일본인 학생들은 나주평야를 기반으로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있었던 일본인 대지주들의 자녀들이었다.

▲ 일본인 학생들에게 희롱당한 두 여학생. 이어진 학생들 간 충돌이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날,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 열차에서 내린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학생들은 광주 여자 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등 조선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이들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하고 분노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한일 학생들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싸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제는 일본 학생들만 싸고돌았고, 분노한 우리 학생들은 이러한 민족적 차별에 강력히 항의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닷새 후, 광주 지역의 여러 학교가 연합한 항일시위로 상승 발전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발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9년 11월 6일) 기사
▲ 서울로 확산하여 전개된 광주학생운동을 알리는 중외일보의 호외

11월 3일(일요일)은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본의 명치절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음력 10월 3일, 즉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한국인 시조를 기념하는 날에 일왕의 생일을,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며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또 이날은 광주 학생들의 비밀결사 ‘성진회’의 창립 세 돌이었다. 기념식을 마치고 시내에 나온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중학교 학생들과 다시 충돌했다. 양 학교 학생들 간의 대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고 마침내 학생들의 거리시위 투쟁으로 이어졌다.




탄압에도 전국으로 확산한 학생 독립운동


광주고보 학생들의 시위에 광주농업학교와 광주사범학교의 한국인 학생들도 합류했다. 시위대열의 학생들은 ‘조선독립 만세’,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연도의 시민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시위군중은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장재성 등 15명의 광주 학생들의 비밀결사 ‘성진회’ 결성 기념 사진. 성진회는 1926년에 결성됐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학생들이 유인물을 배포하고 광주여고보는 교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일제는 260여 명 학생을 검거하고 장재성을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 간부들도 체포했다.


검거된 학생들에 대해선 퇴학과 무기정학 등 가혹한 처벌이 뒤따라 중등학교는 교실이 텅 빌 지경이었다. 일제는 연말까지 언론 통제를 단행하여 학생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전국적 항일 운동으로 확대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일제의 보도관제로 광주의 학생운동은 단 한 차례만 보도됐기 때문에 일반에게 그 경위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 소식은 구전으로 전국 각지에 퍼졌고 일제의 탄압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위축되었던 항일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광주에서 피워 올린 항일시위의 봉화는 목포, 나주, 담양, 순천 등 전남지역은 물론 서울과 전국 각지로 확산했다. 서울에서는 2차에 걸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부 지역에서도 치열하게 진행됐다.

1928년에 학생 비밀결사가 발각돼 100여 명의 학생이 희생된 이후 운동이 침체하고 두 차례에 걸친 만세시위가 계획돼으나 사전 발각으로 실패한 대구, 경북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항일시위가 들불처럼 타오른 것이었다.


광주에서 불씨를 지핀 이 학생 독립운동은 학생들의 희생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3월까지 이어진 운동의 결과로 582명이 퇴학, 2,330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피검자도 무려 1,462명에 이르렀다. 공식적으로 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모두 194개교였고, 학생은 약 54,000여 명에 달했다.


광주학생운동은 우연한 계기로 촉발된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었다. 일제의 민족차별에 대한 학생들의 항거라는 형식으로 단순하게 정리해서도 안 된다. 일제는 이 운동을 폄훼하고자 ‘광주학생사건’이라고 규정했지만, 이 운동은 독립을 지향한 민족운동이었고, 사회 개혁을 추구한 사회문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돌발적 사건 아닌 ‘조직되고 계획된 항일 운동’


또 이 운동은 학생들이 꾸준하게 전개하였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다. 나주역의 충돌은 한 계기였을 뿐 1926년부터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비밀결사 성진회, 독서회 등의 활동과 1920년대에 들어와 격화되고 있던 동맹휴학을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이어진 결과였기 때문이다.

▲ 창립 1주년을 맞은 신간회 신의주지부 임원들의 기념촬영(1928년 2월 15일)

비록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보편적 저항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광주학생운동을 지역 운동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지역에서 촉발된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은 민족적 과제로 상승 발전해 갔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신편 한국사> 참조]




투쟁지도 장재성, 한국전쟁 때 처형

▲ 광주고보 시절의 장재성

광주에서 발원하여 전국으로 확대된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이 감행한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 이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가 기만적 통치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약소민족 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 만세!’,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무산계급 혁명 만세!’라는 구호가 쓰였던 것은 실제 운동을 이끈 학생운동 지도부의 사상적 지향과 일정하게 이어져 있다.


일경이 사상운동으로 몰아붙일 만큼 학생운동의 지도부들은 당시 러시아혁명 이후 유행하던 사회주의 이론에 경도돼 있었다. 제2차 시위 이후에 260여 명 학생과 함께 검거되어 구속자 가운데 가장 중형인 4년 형을 선고받은 장재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29년 6월 동경에서 귀국해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한 장재성은 성진회를 확대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 책임 비서가 되어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그가 제시한 행동지침은 학생운동의 지향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의 투쟁대상은 광주중 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광주중 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1937년에 신흥과학연구회 사건으로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른 장재성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활동했고 전국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도 참여했다. 1948년 남한 단독선거가 진행되면서 단독정권을 반대했던 좌익들과 함께 그는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했다.


장재성은 1949년 일본을 거쳐 귀국했으나 체포돼 7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열흘 후인 7월 5일, 경찰은 형무소 안의 좌익사범들을 처형하고 후퇴했는데 장재성도 거기 희생자 속에 끼어 있었다. 향년 43세.


장재성이 사회주의에 경도돼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가 온전한 공산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62년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질 때 건국훈장 대상자로 올랐다가 그가 제외된 것은 좌익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굴절된 ‘학생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1953년 국회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국가적 차원의 기념일인 ‘학생의 날’로 정하자는 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후 이날은 일제하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기념일의 위상을 갖게 됐으나 1973년 박정희 정권 때 정부기념일 간소화 과정에서 폐지됐다. 간소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작 유신정권은 학생들의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한 것이다.


1984년 5공화국 때 학생의 날이 부활했으나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시위를 염려하여 이를 통제하기도 했다. 정치 권력의 성격에 따라 일제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조차 이리저리 굴절되는 시절을 우리는 겪어야 했다.

▲ 2005년 세워진 광주학생운동 기념관의 광주학생독립운동 조형물과 동상

참여정부 때인 2005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2006년에는 ‘학생의 날’이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바뀌었다. 3·1 운동 이후 국내 최대 규모의 대중적 항일 운동이었던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이름으로는 손색이 없을 듯하다.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잇는 1926년의 6·10만세 운동을 이끈 이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1897~1930)이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 채 순국했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사후 75년 만인 2005년 3월 1일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관련 글: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


광주의 학생들을 이끌고 싸웠던 일제가 아니라, 해방 조국의 경찰에게 처형되었던 성진회의 장재성을 생각해 보는 까닭이다. 파란 많은 영욕의 근대사에 아로새겨진 상흔은 뜻밖에 깊고 어둡다.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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