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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했던 남자의 이야기

조회수 2020. 12. 10. 07: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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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왕이 되고자 한 사나이


158cm에 55kg. 갸날픈 뼈대,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한 그는 누가 봐도 약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윌리암 워커(William Walker), 1824 ~ 1860.

1824년 네쉬빌에서 태어난 윌리암 워커, 그는 천재였다. 14살에 네쉬빌 대학을 수석졸업한 후에 하인델베르크, 에딘버러와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19살의 나이에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의사학위를 땄다. 워커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원을 했지만 바로 싫증을 느낀 뒤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방 질려 했다. 한 곳에서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1849년, 그는 약혼녀가 콜레라로 죽자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당시는 황금광 시대가 한창일 때여서 모험가, 광부, 도박꾼, 폭력배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고 그곳은 워커 성격에 딱 맞는 장소였다. 그는 신문사에서 잠시 일한 후 변호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절대 꿈꿔선 안 됐을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 만다.


1853년, 워커는 ‘내 이름을 내건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멕시코로 향했다. 물론 당시 시대 상황을 따져 봤을 때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독립한 지 60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고 전국엔 젊은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특히, 미국 국민들은 영국과의 큰 전쟁을 두 번이나 치러 승리하고 나니 온몸 곳곳에서 자만감이 철철 넘쳐 흐르던 때였다. 대부분의 국민은 영토확장을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윌리암 워커는 ‘역사에 남을 대표적인 모험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1853년~1860년 동안 원정에 나섰다. 먼저 그는 멕시코 소노라스의 과이마스(Guaymas) 항구도시로 가서 멕시코 정부에 이 도시를 미국 식민지로 인정해 달라는 황당한 청원을 낸다. 대신 그 대가로 멕시코 정부의 골칫거리인 아파치 인디언들을 몰아내 주겠다고 했다. 그 지역은 은 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워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무기를 사들이고 병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침략에 나설 충분한 자금을 끌어들였다. 지원병 대부분은 남부인으로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거나 금광에 실패한 모험가들로 또 다른 모험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다. 연방법원 역시 워커의 계획을 동조해 줬다.




꿈을 향한 첫 원정 


그렇게 11월 3일, 워커는 50명의 지원병으로 구성된 제1독립대대를 이끌고 라 빠쓰(La Paz) 도시를 점령하고 남부 캘리포니아에 깃발을 꽂는다. 워커는 반도 전체를 '지유로운 독립주권국가'로 선언하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임명한 후에 멕시코에 대한 일체의 연합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루이지아나 법을 그대로 채택하고 노예제도도 도입했다. 아니, 어떻게 된 나라가 겨우 50명한테 도시를 빼앗겼냐고? 이 배경을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니 당시 멕시코 상황이 매우매우매우 어지러웠다는 점만 알아두도록 하자.


라 빠쓰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샌프란시스코에는 지원병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깃발이 걸리고 지역신문은 위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기사로 넘쳤다. 워커는 지체하지 않고 수도를 엔세나다(Ensenada)로 옮긴 후에 내각을 구성, 외부와 무역을 하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멕시코군이 반격에 나섰지만 워커를 몰아내지 못했다. 다만, 당시 이 혼란을 틈타 포로로 잡혀있던 멕시코 주지사가 워커 군대의 군수품이 실린 배를 가지고 달아났는데 이 때문에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워커 군대는 어쩔 수 없이 주변 도시를 매일 약탈하곤 했다. 그리고 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탈영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새해가 되자 워커는 소노라 정복에 나섰다. 식량확보를 위해 주변 목장을 약탈했고 '소노라를 합병 중이며 국가명을 소노라 공화국으로 바꿀 것이며 자신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공표를 했다. 1854년 알타 캘리포니아 신문은 이를 두고 '차라리 멕시코 전체를 합병하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 이상 공표하지 않아도 되었을테니까.'라고 비판했다.


병사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서, 워커의 충성맹세를 무려 50명이나 거부했을 정도까지 악화되었다. 한 번은 50명이 무기를 들고 군대를 떠났는데 워커의 친위부대(최초의 50명)가 그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워커는 기강이 해이해진 군인 두 명을 본보기로 공개 총살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원체 워커 부대의 성격이 군대보다는 탐험대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워커의 처형쇼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결국 통제불능 상태가 되자 워커는 원정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꿈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워커. 비록 한 번의 뼈아픈 실패를 겪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국가건설을 향한 꿈은 식지 않았다. 워커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믿고 니카라과(Nicaragua)로 눈길을 돌렸다.

시가전에 난입한 워커 일행

니카라과는 수 년에 걸친 내전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라나다(Granada) 지역의 귀족 보수파(입법주의자)와 레온(Leon) 지역의 엘리트 자유파(민주주의자) 간의 충돌이 주요 원인이었다. 약세에 있었던 자유파는 워커를 초대해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 워커는 57명의 지원병을 모아 1855년 5월 4일에 니카라과로 향했다. 워커는 57명뿐인 자신의 부대를 '일상생활에 싫증이 난 강한 의지의 사나이들'로 칭송했다. 물론 후에 역사학자 로렌스 그린은 이를 두고 '샌프란스시코에서 자경단을 피해 도망치거나 뉴올리온즈의 천민이거나 다른 지역의 불량배'라고 단정했지만.


워커가 니카라과에 도착하자 200명 정도의 자유파가 부대에 합류했다. 워커는 이 중 미국인들만 따로 추려서 미국 팔랑스(Phanlanx)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6월 29일, 워커는 보수파의 요충지인 리바스(Rivas)를 공격했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니카라과 부대는 생각할 틈도 없이 즉시 도망쳤다. 워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사교육은커녕 전략전술이 뭔지도 모르는 워커는 부대 지휘관으로서는 심각한 낙제점이었다. 심지어 그는 일체의 정찰도 하지 않아 적의 위치나 규모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전투에 뛰어 들었다. 당시 리바스 공격에 워커 부대원 11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당해 35명 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참 대단한 게 워커는 이 와중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증기선을 빌려 타고 그라나다로 쳐들어갔다. 한 번의 실패를 겪은 덕인지 이번에는 전술도 미리 세우고 정찰도 했다. 이 공격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워커 부대에 기습을 당한 보수파는 항복을 했고 워커는 자신을 공화국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에 꼭두각시 대통령을 세운다. 그리고 보수파 사령관을 '내란' 혐의로 처형했다. 자신의 꿈에 이토록 강렬한 열정을 보이고 또 실천한 인물이 있을까.




워커의 전략 : 돌격, 돌격, 돌격


워커의 추종자가 '1856년 3월까지 공화국 전체는 평화로웠다'고 기록했듯이 워커가 그라나다 점령 후 실제로 별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워커의 탐욕을 염려한 인접국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워커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성깔 있는 워커는 곧장 선제공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산따 로사(Santa Rosa)에서 처참히 패배했고 코스타리카군은 그 기세를 몰아 니카라과 국경을 넘어 리바스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전의 실패에서 얻었던 교훈을 잊을 정도로 아주아주 화가 난 워커. 니카라과군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 전면공격을 퍼부었고.. 보기 좋게 궤멸당했다.

니카라과 국기(위)와 소노라스 공화국 국기(아래)

워커의 군사지휘도 문제였지만, 통치자로서의 자질은 더욱 심각했다. 그는 국민에게 아무런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겐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땅이 필요할 뿐이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가져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을 사살했다. 유적이 많은 그라나다에서 퇴각할 때에는, 심지어 미국의 정의가 기억되는 성지로 만들라며 도시를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부하들은 명령에 따라 도시를 파괴했고 '여기에 그라나다가 있었다'라는 표식만 남겼다.


워커의 악행은 온두라스, 엘 살바도르, 과테말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들 국가의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꼭두각시 대통령은 워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며 도망쳤고, 워커는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 와중에 스페인어 대신에 영어를 국어로 선포하고 노예제도를 도입하는 등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면모를 뽐내기도 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것 하나. 미국의 영토확장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워커 행정부를 바로 승인했다.

워커가 짧은 생애 동안 벌인 모험 경로

워커는 다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전쟁을 하려면 밴더빌트가 니카라과에 세운 환승회사와 증기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워커는 이 회사를 몰수했다. 이는 미국의 재벌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밴더빌트는 피어스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어 워커 행정부 승인을 취소하고 연합군을 지지하게 만들었고 코스타리카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비밀요원을 파견해 니카라과에 반란을 일으키게끔 했다.


밴더빌트의 비밀요원은 코스타리카군과 협력해, 총 한 방 쏘지 않고 워커의 증기선과 요새를 장악해 워커를 고립시켰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워커는 리바스로 들어갔고, 연합군과 밴더빌트의 미국용병부대는 6개월 동안 그를 도시에서 나오지 못하게 포위했다. 이제 정말 죽을 일만 남았다.


하지만 우리의 워커,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미국 정부가 연합국과 워커 중재에 나서, 그를 파나마로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 겨우 목숨만 건진 것이다. 이렇게 워커의 니카라과 정복은 막을 내렸다. 한 동안은.




인기스타가 된 워커, 그리고 사형선고


뉴욕으로 돌아온 워커는 중립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지만, 미국 영토 확장의 정당성을 주장해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또.. 니카라과 재침공을 위해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미국 영토 확장을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워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심지어 그의 시가 출판되고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다. 워커는 '니카라과 전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확신에 가득찬 워커는 지원병을 다시 모아 1857년 11월 코스타리카 해안의 뿐따 아레나스(Punta Arenas)에 상륙했지만 미국 프리킷함이 추격해 워커를 체포하고 다시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뉴올리온즈에서 봄을 보낸 워커는 또 다시 중립법 위반 기소를 당했지만 또 다시 무죄로 풀려났다. 그리고 또 다시 지원병을 모아 출항했지만 산호초에 좌초되었고 영국 함선에 구출돼 목숨을 부지한다.

워커의 성공을 주제로 한 연극의 광고문

영국 함선 덕에 온두라스 해안에 내린 워커 일행 91명은 1859년 8월 6일 뜨루히요(Trujillo)를 점령한 후에 니카라과로 전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워커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온두라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딛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워커 일행은 31명으로 줄어들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거의 부상을 당했다. 거기에 열대병이 번지면서 워커 일행의 상황은 절망으로 치달았고 해안에 있던 영국함대는 워커에게 신변보장을 약속하며 배에 오를 것을 권했다. 워커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워커를 함대에 올린 영국군은 항해 도중 워커 부대를 온두라스군에게 넘겼다.


온두라스군은 워커에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860년 9월 12일, 온두라스 병사들이 워커를 감방에서 끌고 나와 워커의 지칠 줄 모르던 탐욕에 마침표를 찍는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온두라스 베이 제도에 보내졌고 처음 출발했던 91명 중 12명만이 본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워커의 초인적인 의지와 달리, 그의 군사재능은 보잘것없었다. 통치자로서의 자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실패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워커의 무모한 천재의 도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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