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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에 걸쳐 현충원에 안장된 가문의 놀라운 이력

조회수 2020. 10. 18. 09: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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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아버지부터 증손자까지 대대손손 현충원에 안장된 가족이 있다.

수당 이남규, 아들과 더불어 순국하다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1986년에 건립한 ‘수당 순절의 땅’이라는 기념비가 있다.

1907년 8월 19일(음력, 양력은 9월 26일)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에서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의사가 일본 헌병과 관군의 칼끝에 스러졌다. 아들 충구(1874~1907)에게 겨눠진 칼을 손으로 막으며 다섯 손가락이 잘렸으나 끝내 아들과 더불어 순국했다.


수당(修堂) 이남규는 충남 예산 사람이다. 본관은 한산, 목은(牧隱)의 후예다. 1875년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에 급제해 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 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1895) 후 향리로 내려갔다. 1899년에 함경남북도 안렴사를 제수받았으나 자핵소(自劾疏: 자기 허물을 스스로 밝히는 상소)를 올리고 향리에서 청소년 교육에 전념했다.



성리학 기반 상소운동으로 일제에 저항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수당의 반일활동은 상소 운동이 주류였다. 1893년 ‘입도왜병척축소(入都倭兵斥逐疏)’를, 이듬해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자 ‘청절왜소(請絶倭疏)’를 올렸다.


어지러운 국난의 시기에 벼슬하고 있음에 대해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던 수당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폐후(廢后)의 조칙(詔勅)이 발표되자 ‘청복왕후위호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討賊復讐疏)’를 올렸다.

“(···) 폐하께서는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나앉으셔서, 선비와 백성들을 모두 앞에 불러 놓고 애통의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나라는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사람은 죽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망하는 것을 무서워하므로 더욱 망함을 재촉하고 그 남아 있는 것이 구차하며, 죽음을 무서워하므로 더욱 죽는 것을 재촉하고, 그 사는 것이 구차하게 된다.

너희들은 원수의 적을 그릇 곁에 있는 쥐라고 생각하여 던져 때리기를 꺼리지 말며, 너희 몸을 엎어진 둥우리의 새알이라고 하여 그 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지 말고,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짐의 분개하는 바를 대적하여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종묘사직의 욕을 씻게 하라’ 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동맹 각국으로서도 윤리 기강을 알지 못하고 적의 뒤를 따르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함께 분개하여 향응(響應)하여 더불어 일을 같이하지 않겠습니까. (···)”
▲ 4대에 걸쳐 현충원에 안장된 수당과 후예들. 왼쪽부터 수당, 충구, 승복, 장원

이 무렵엔 상소한 단체·개인들이 적지 않았으나 친일 각료들의 농간으로 고종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일제의 야욕은 구체화돼 마침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수당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싸우자는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를 올린 뒤 두문불출했다.



왕명 아닌 의병활동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1906년 4월 최익현이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를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곧이어 민종식(1861~1917,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의진(義陣, 의병의 군진)을 일으켜 홍주(洪州, 홍성)에 입성하면서 선봉장에 임명했지만, 끝내 홍주에 입성하지 않았다. 관료 출신의 유생 이남규로선 왕명이 아닌 한, 의병 활동에 직접 참여하고자 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홍주읍성. 민종식의 홍주의진은 1906년 5월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수당에게 은신처를 구했다.

그러나 1906년 5월 홍주성 싸움에서 크게 패한 홍주의진 민종식이 찾아오자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리고 민종식의 참모이며 그의 집안 아우인 이용규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 탈환 작전 본부가 형성돼 1906년 10월 5일 거사를 준비했다.

▲ 의병장 민종식(1861~1917)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면서 충남 관찰사 김가진의 명에 따라 10월 2일 일본 헌병과 관군 수십 명이 그의 집을 포위했다. 이때 이남규 부자와 이용규·곽한일·박윤식(이상 1990년 애국장) 등이 함께 체포됐다.


적이 민종식의 거처를 확인하고자 고문하자 수당은 자백하지 않았으나 아들 충구가 고문에 못 이겨 혀를 깨물자 아들을 구하고자 자백했다. 그는 “민종식이 의리를 쫓아 절개를 세우는 것은 그 이치가 당당하지만, 충구가 형을 받아서 목숨을 끊은 것은 그 명목이 없다”고 했다. 그때 이미 민종식이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으므로 자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일본군은 민종식의 거처를 찾아냈고 이남규는 홍주 의진과 무관하다는 판정을 받고 풀려나왔다. 그러나 의진과 연루됐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이어지자 1907년 8월 19일 일본군이 다시 그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선비는 죽일 순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


군사들이 그를 포박하려 하자 수당은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면서 가마를 타고 가려 했다. 두 아들이 부친을 쫓으려고 했으나 “너희가 나를 따라 죽는다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하며 만류했다. 그래도 맏아들 충구는 그의 뒤를 좇았다.



▲ 수당기념관의 수당 흉상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르러 일본군의 마지막 회유에 “죽이려면 죽일 일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며 굴하지 않고 결국 칼을 맞고 쓰러졌다.


아들 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노비 김응길(1867~1907)도 일본군의 칼에 맞아 수당을 뒤따랐다. 뒷사람들은 이 순국을 일러 한 집안에서 충신·효자·충노(忠奴)가 한꺼번에 나왔다고 말한다.


정부는 1962년 수당 이남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아들 충구에게는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수당 부자와 함께 희생된 노비 김응길에게도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비록 전근대의 풍경이긴 하나 이들의 나눈 의(義)의 연대는 뒷사람들의 기림을 받았다.


그 뒤 수당의 손자 이승복(1895~1978)은 1920년대 대표적 항일단체인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중국 등지에서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동아일보에서 일할 때 만보산사건(1931)의 진상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안재홍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러 1990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 수당고택.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 집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됐다.
▲ 2008년 수당고택 옆에 건립된 수당기념관. 수당의 정신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한 시설이다.

4대가 현충원에 묻힌 집안


증손자 이장원도 한국전쟁 중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 원산 황토도(黃土島)를 지키다 전사했다. 적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이 전투의 공로를 기려 정부는 1953년 이장원 중위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현재 수당 이남규와 아들 이충구, 손자 이승복 등 3대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고 4대 이장원 중위는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4대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져 국립현충원에 묻힌 드문 사례다.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수당의 옛집 옆에 수당이 실천한 고귀한 정신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해 수당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2008년이다. 수당의 증손자이자 제6대(2001~2004)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이문원 전 중앙대 교수가 현재 수당기념관을 지키고 있다.


*덧붙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이남규’로 검색하면 모두 네 분의 이름이 뜬다. 조선 말기의 의병 이남규(李南奎, 1856~1907, 1990년 애국장) 선생은 전남 함평 출신이고 한자도 같은 이남규(李南奎, 1878~1934, 1990년 애국장) 선생은 국내 항일운동에 참여한 충남 논산 출신이다.

생몰연대는 물론, 본적도 알 수 없는 의병 이남규(李南圭) 선생도 1990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드러나지 않지만 무명으로 숨져간 의병과 독립군이 어찌 이들뿐일까. 살아생전에 조국에 남긴 공훈이 단 몇 줄에 그칠지라도 그들의 존재와 헌신이 오늘의 이 땅을 있게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참고자료>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충남넷 미디어

- 수당기념관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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