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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남은 유한양행 창업자의 유언장

조회수 2020. 9. 28. 09: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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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기업인 유일한

▲ 경기도 부천시 중앙공원에 세워져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기업인 유일한 박사의 동상

1971년 3월 11일, ‘버들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1895~1971)이 온 곳으로 돌아갔다. 향년 76세.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그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기업경영으로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민족 기업가였고 미 육군 전략처(OSS)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또 기업 이익을 사회 환원에 환원하고자 유한공고와 유한전문대학을 세운 교육가였고,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내놓았던 사회사업가였다.

자수성가한 평양의 재봉틀 판매상이었던 그의 부친은 독실한 개신교도로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9살짜리 큰아들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냈다. 배에서 부친이 환전해준 미국 돈을 잃어버린 그는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1881~1928)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됐다.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몸소 실천하는 태프트 자매의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배우며 자란 유일한은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해 건강하고 자립심 강한 인간으로 자라났다. 그는 1909년, 박용만이 세운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고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와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했다. 그는 미시간대 대학원을 거쳐 스탠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부채, 찻잔 같은 중국의 전통제품들을 파는 일을 했다. 중국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일해 돈을 벌되 검소하게 생활하지만, 고향을 그리워해 전통제품은 산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장사에 응용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너럴일렉트릭(GE)사에 입사해 돈을 모아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했다. 사업은 번창했고 그는 중매로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기업 이윤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 가서 성공한 입지전의 주인공 이야기로는 드물지 않다. 유일한의 삶이 여느 입지전의 주인공과 달라지는 것은 이후부터였다. 그는 여느 사람처럼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의 사업 방식은 여느 기업인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의약 사업을 시작한 것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나면서 거기 살던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서였다. 아픈 사람은 많았지만 치료할 약은 부족했던 시절, 미국에서 결핵약을 수입해 팔던 유일한은 1933년부터는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영 원칙은 윤리경영이었고 기업의 이윤은 사회로 환원돼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고 믿었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업경영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유일한은 사업이 기반을 잡자 회사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세우고 회사를 법인체인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그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 사원의 것이라는 뜻에서 주식 일부를 사원들에게 공로주로 나눠 주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사원 지주제’다. 1962년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공개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 가족과 함께. 그는 자식들에게는 별도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다.

유일한이 주식을 공개한 것은 자본의 확충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식의 대중적인 소유는 회계의 공개와 함께 기업의 민주화를 의미한다는 차원에서였다. 그는 ‘정직하고 조속한 납세’를 지상 시책으로 삼고 실천해 유한양행은 한국 유일의 ‘자진 납세업체’, ‘장부 공개업체’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69년에 회사의 경영을 가족에게 상속하는 대신 전문 경영인에게 물려줌으로써 가족 세습 경영의 폐단을 끊었다. 1969년 이후, 그의 가족은 아무도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그는 기업 이익을 사회 환원에 환원하는 데 힘썼다. 그의 유언장은 그런 내용을 집약한 것이다.


1. 손녀 유일링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준다.

2. 딸 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3. 자신 소유 유한양행의 주식 14만 941주는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4.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 ‘유일한의 유언장’ 중에서


유한양행 부사장까지 지냈던 아들 일선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혼자 살아가라고 했을 뿐이었다. 또 부인에 관해서도 딸에게 노후 복리를 도와주라고만 했을 뿐 재산을 물려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딸에게 땅을 물려주면서 그는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가꿔 줄 것과 주변에 울타리를 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것은 재산이라기보다 자신이 묻힐 유택이었고 거기서 마음껏 뛰노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1940년대엔 캡코 작전에 참여

▲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 시절의 유일한. 둘째 줄 오른쪽 끝이 유일한

그는 식민지 시기의 조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면서도 1940년대에는 하와이 해외 한족대회(1941)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에는 미 육군 전략처(OSS) 한국 담당 고문을 맡으면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 한국인들로 무장한 ‘맹호군’을 창설할 때도 주역으로 활약했다.


1945년에는 OSS에서 시도한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해 조장으로 활동했다. 이 작전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해 훈련시킨 후 국내에 침투시키려는 특수공작이었으나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산됐다. 1995년, 뒤늦게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것은 이러한 활동 이력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유한양행은 존경받는 기업 제약 부문 15년 연속 1위(2018), 국내 제약사 매출 1위(2017), 2억 불 수출탑(2017), 국내 제약사 최초 매출 1조 원 달성(2014)의 대기업이다. (이상 유한양행 홈페이지) 생리대 가격으로 입길에 오른 ‘유한킴벌리’는 유한양행의 계열사가 아닌 유한양행이 30% 출자한 미국의 킴벌리와 함께 합작한 회사다.


유일한의 삶이, 그의 경영 철학이 새삼스러워지는 것은 한국이 세계 십 몇 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아직도 천민 자본주의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는 부와 기업의 이윤이 그 사회 구성원한테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굳이 이윤의 사회 환원을 고집한 이유다.

우리 전근대 사회에서도 그런 부의 본질을 깨달은 경주 최 부자 같은 이들이 있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으로 8할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으로 줄이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했던 이들 말이다.


그러나 50년 전에 기업경영으로 그것을 실천했던 유일한의 나라,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은 서글프다.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이명박의 수뢰(혐의)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굴지의 재벌 기업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은 불법으로라도 이윤을 늘이겠다는 무한 욕망의 민낯이었기 때문이다.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이 부과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부호들과는 달리 한국의 재벌들은 온갖 편법을 통해 상속세를 줄이고 안전하게 2, 3세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신공을 시전하는 데 골몰한다. 시가총액 순위 100위권의 오뚜기가 상속세 1500억 원을 낼 때 대한민국 시총 1위(442조)인 삼성은 단돈 ‘16억’ 밖에 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부로 획득한 권력을 무소불위로 쓰는, 이른바 ‘갑질’로 여론의 지탄받거나 각종 불법과 범죄행위로 법정에 선 이들 부자의 모습 위로 유일한의 모습이 씁쓸하게 겹친다. 유일한 박사 온라인 기념관에 쓰인 한 구절의 문장이 주는 울림이 새삼스레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큰 부를 축적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아니하는 법이다.”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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