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대장장이의 호미가 '아마존'에서 대박 난 사연

조회수 2020. 8. 4. 08: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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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대장간, 코리안 스타일 호미'
▲ 장인은 단조기를 이용하면서도 쇠를 불에 달궈서 망치를 두들겨 수작업으로 연장을 만드는 기본을 버리지 않았다.

엔간한 규모의 장터가 있는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대장간은 구경도 못 했을 것이다. 시골 마을이라고 모두 물레방아가 도는 게 아니듯 시골 장터라고 죄다 대장간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베이비붐 세대인 내 경험을 기준으로 하는 얘기다.


장이 서지도 않는 ‘깡촌’에서 자란 나는 부모님이 다녀오는 오일장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근 읍에 서는 장에 대장간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른다. 당연히 대장간은 나중에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처음 보았다. 힘차게 무쇠를 두들기는 대장장이의 근육질 몸매와 그가 흘리는 땀의 이미지와 함께.


우리 세대가 그러니 그 아래 세대야 말할 것도 없겠다. 사람들은 민속촌 따위에서 박제된 대장간을 보면서 연모를 만들어 쓰던 선인의 삶을 상상할 뿐이다. 농기구 따위야 대장간이 아니라 시장의 철물점에서 구할 일이요, 나머지 연모야 녹슬지 않는 신식 쇠로 대체된 지 오래지 않은가.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에서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반드시 대장간이 있었다. 무뎌진 농기구나 각종 연장을 벼리거나 무쇠를 두들겨 실한 낫과 보습 등을 만들어 내는 일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은 연장을 벼려주는 떠돌이 대장장이가 드나들며 맡았다.


쇠와 구리, 주석 등 쇠붙이를 달구고 두드려 연장을 만드는 장인인 대장장이는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했는데 딱쇠·대정장이·야장·철장 등으로 불리었다. 기록상 최초의 대장장이는 신라 제4대 석탈해 이사금이다. 자신을 본래 ‘대장장이’라고 했던 탈해는 새로운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오래 숙련된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하는 전통 대장장이는 이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전통적 방식으로는 호미 하나를 만드는 데도 줄잡아 한 시간이 걸리지만, 기계를 이용하면 한꺼번에 수십 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 전통 기술도 현대의 효율성과 간편성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잊히고 있는 대장간이 새롭게 소환된 것은 미국 온라인 쇼핑 사이트 ‘아마존’발 인기 상품 덕분이다. 아마존에서 히트한 상품은 한국산 농기구 ‘영주대장간 호미(YongjuDaejanggan ho-mi)’다. ‘영주대장간, 코리안 스타일 호미’라고 적힌 이 호미는 아마존에서 ‘원예(gardening)’ 부문 톱 10에 오르며 2천 개 이상 팔린 것이다.



아마존에서 대박 난 '영주대장간 호미'

출처: 아마존 화면 갈무리
▲ 아마존에서 대박이 난 영주대장간 표 호미

꽃삽만 쓰던 미국인들에게 ㄱ자로 꺾어진 호미는 ‘혁명적 원예용품’으로 ‘덤불 베는 데 최고’라는 구매평을 받으며 대박이 났다. 국내에서 4천 원가량인 호미는 아마존에서 그 몇 배의 가격인 14.95~25달러(1만 6천 원~2만 8천 원)에 팔렸다.


이 대박 상품으로 소환된 ‘영주대장간’은 영주시 구성로(휴천동) 영주 기관차승무사업소 뒤편에 있고 대박 호미를 만든 ‘대장장이’는 반세기 넘게 쇠를 두드려온 석노기(65) 대표다. 이 가게와 장인은 지자체에 그 전통과 역사를 이미 인정받았다. 영주대장간은 2017년에 경상북도 ‘향토 뿌리 기업’이자 ‘산업유산’으로 각각 지정됐고 석 대표는 2018년 ‘경상북도 최고장인’으로 선정된 것이다.


영주대장간으로 그를 찾은 것은 지난 6월 25일 의성으로 귀촌해 농사를 짓는 벗과 함께였다. 워낙 매스컴에 뜬 인물이니 성가시다고 문전에서 거절당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무던하게 우리 일행을 맞아줬다. 오후 3시가 넘었는데 그는 단조 기계 앞에 앉아 낫을 두들기고 있었다. 옆의 가마에는 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고 토시를 끼고 작업에 몰입해 있는 그의 이마에는 땀이 연신 흘렀다. 한 십여 분 대장간을 둘러보고 나니 작업을 끝낸 그와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석노기 장인의 53년 대장장이 삶

▲ 석노기 장인이 만든 호미가 아마존에서 대박이 난 것은 53년 동안 한길을 파온 그의 삶이 받아 마땅한 보상이다.

석 대표가 대장장이가 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68년, 열네 살 때다. 그 시절의 사연이야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 가난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매형의 대장간으로 들어가 풀무질을 시작하면서 그는 장인의 길로 들었다.


공주에서 3년간 호미와 조선낫 등을 만드는 기술을 닦아 경북 영주로 내려와 지금의 가게 자리에 ‘영주대장간’ 문패를 단 1976년에 그는 스물세 살이었다. 석 대표는 중앙선의 요충이며 산간지역이라 농기구 수요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 보고 낯선 고장 영주를 선택했는데 그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영주대장간은 다섯 평으로 시작해 크기를 늘려갔는데 그는 그 시절을 “젊어 가족 건사하는 부담이 크지 않아서 남보다 한 발쯤 앞서갔다”고 회고한다. 남들이 소화물에 의존할 때 그는 운전을 배워서 트럭으로 물건을 수송했고 남보다 먼저 프레스 기계를 들였다.

▲ 석노기 대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968년에 대장장이의 길로 들어선 이래 53년 동안이나 한 우물을 팠다.

석 대표는 기계를 쇠를 자르거나 늘이는 데만 쓸 뿐 쇠를 불에 달궈서 망치를 두들겨서 수작업으로 연장을 만드는 기본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가 “수작업으로 꼼꼼하게 해야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이 나오고 또 정밀하게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대장장이는 숙련을 통해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고온에서 가공하면 쇠가 묽어지고 저온에서 하면 딱딱해지므로 적절한 온도에서 가공이 이뤄져야 한다. 또 쇠의 특성상 힘의 정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니 제품의 완성도는 순전히 대장장이의 내공에 달렸다. 그는 “어느 부위를 치느냐 얼마만큼의 강도로 때리느냐에 따라 낫이 될 수도 있고 호미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내가 만든 물건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택배로 부치라 해서 100% 애프터서비스를 해줍니다. 작년부터 아마존에서 호미가 팔리며 소문이 많이 났지만 그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에요.”


남보다 한 발짝 앞서간 덕분에 석 대표는 생산원가를 절감해 가격경쟁력을 갖추면서도 이윤을 낼 수 있었고 영주대장간의 인지도를 높였다. 그는 ‘영주대장간’을 상표 등록했고 자신은 컴퓨터를 모르지만, 컴퓨터에 능한 지인을 통해 인터넷 판매를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처음엔 교포들이 사 가는 건가 보다 했대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 이름은 교포들 이름과 다르다네요. 그게 그렇게 될 줄을 생각 못 했지요.”


결정적으로 그의 호미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어떤 유튜버가 올린 정원 가꾸는 영상이 여기저기 퍼 날라지면서다. 영주대장간 호미는 올해 들어서만 석 달 동안 2천여 개가 팔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마존’이 쇼핑 사이트인 줄 모르고 자기 호미가 아마존 밀림에 쓰이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장간을 이을 사람이 없다


석 대표는 자기 호미가 인기를 끈 것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물건과 달리 옛날 방식의 수작업으로 꼼꼼하고 섬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K-호미 최고’라는 평가는 지난 53년 동안 대장장이 외길로 걸어온 그의 삶이 받아 마땅한 보상이다.


그는 자신의 대장간이 실질적으로 모든 농기구를 제작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대장간이라고 자부한다. 농부라고 해서 모두 온갖 곡식과 채소를 다 생산하는 게 아닌 것처럼 대장간이라고 모든 농기구를 다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평생을 한 우물을 파 대장장이로서 ‘최고장인’으로 불리게 됐지만, 석 대표는 자신의 대장간을 이어갈 후계가 없다는 걸 고민한다. ‘영주대장간이 없어지면 우리나라 대장장이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그는 자식에게도 넌지시 속을 떠보았지만,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 그러나 석 대표는 머리카락 하나 빠지지 않은 동안이다. 젊어 보여서 한 이십 년쯤 더 일할 수 있겠다고 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건강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선 자기 일과 장인으로서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 영주대장간에서 내가 산 왜낫. 풀 베는 용도로만 써야 하는 낫의 미끈한 손잡이에는 ‘영주대장간’ 낙인이 찍혀 있었다.

농기구를 진열해 놓은 매장에서 벗은 조선낫, 나는 ‘왜낫’ 하나를 샀다. 불에 달구고 물에 식혀 가며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으로 만들어 부러지거나 이가 빠지지 않는 조선낫과 달리 왜낫은 풀 베는 용도로만 써야 한다. 낫의 미끈한 손잡이에는 ‘영주대장간’ 낙인이 찍혀 있었다.


매장에는 택배로 부칠 종이상자 몇 개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호주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며칠 전 로이터통신의 기자가 와서 영상을 찍어갔다고 했다. 나라 밖에 먼저 알려지고 뒤늦게 국내에 들어오는 ‘영주대장간’ 소식은 이 전통 농기구 제작소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아와서야 나는 석 대표에게 대장간의 운명을 묻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영주대장간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7월 초순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경북 최고 장인들과 함께 프랑스에서 열리는 ‘최고장인 작품 전시회’ 참석하느라 부재중이었다. 며칠 전에야 연결이 됐는데 그는 담담히 내 질문에 답해 주었다.


“아마 전통 대장간으로는 내가 마지막 세대가 되겠지요.”

▲ 영주대장간의 매장 진열장에는 그가 만든 호미와 낫 등이 쟁여져 있다.
▲ 영주대장간 매장 바닥에 쌓여 있는 택배 물품. 이 중에는 호주로 가는 물건도 있다.

대장간은 더는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 그 효율성과 간편성과 경쟁할 수 없다. 값싼 왜낫보다 몇 배나 비싼 조선낫의 경쟁은 제한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다양화되고 있는 소비자의 욕구와 늘어나고 있는 개성 있는 수공업 제품의 수요가 이 전근대 농기구 제작소가 창조적으로 재활용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제 손으로 만들지 않아 / 한꺼번에 싸게 사서 / 마구 쓰다가 /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 숫돌에 갈아 /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중에서


대장간을 노래한 김광규의 시는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가 일상화된 현대 사회에서 플라스틱 제품처럼 무가치한 일회용품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현대인의 열망을 노래한다. 시인에게 ‘대장간’은 전통적 삶의 양식과 가치 있는 삶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가 불 속에서 자신을 “달구고 / 모루 위에서 벼리고 / 숫돌에 갈아 / 시퍼런 무쇠 낫”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다.


‘무쇠 낫’이나 ‘호미’가 상징하는 것은 진정성 있는 삶이고 대장간은 그것에 대한 열망을 환기하는 공간이다. 대장간은 오직 인간의 근력에 의지해 쇠를 다뤄 연모를 짓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을 총화하는 공간, 문명의 가장 초보적인 출발점 같은 곳이다.


조만간 대장장이가 두들기는 망치 소리도 사라지고 우리는 낫과 호미를 생산하는 대장간을 구경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박제된 대장간을 지나며 사람들은 더는 근육질 사내의 몸과 그가 흘리는 땀의 이미지로 대장장이를 떠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다고 물론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 더 간편하고 효율적인 기술이 대장장이의 땀을 비웃으며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기술 발전의 피할 수 없는 추세요, 과정이라고 강변하는 문명사의 전개 앞에 시방 영주대장간은 외롭게 서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계간 <기록창고>에도 실렸습니다.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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