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까지 대한민국에 야생 표범이 살았다는 증거

조회수 2020. 8. 7. 11: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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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표범이 잡힌 날의 기억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표범’ 하면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특히 30대 이하 젊은 세대는 아프리카에나 사는 동물 정도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표범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경남에. 야생 표범이 마지막으로 잡혀 죽은 데가 바로 경남이기도 하다. 지난 3월 4일은 그로부터 딱 5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숨을 거둔 최후의 한국 표범을 기리는 마음을 이 글에 담았다.


그것은 경남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대한민국 야생에서 잡힌 최후의 표범이었다. 1970년 3월 6일 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함안에서 18세쯤 되는 수표범이 잡혀 화제. 지난 4일 상오 10시쯤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뒷산에 노루 사냥갔던 설욱종씨(50·부산시 서구 부민동1가 18) 등 3명은 범의 발자국을 따라 내곡리 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산 속(해발 700m)에 이르렀을 때 50m 앞 소나무숲에 있던 표범을 발견, 15m 지점까지 접근하여 단발총으로 머리를 명중시킨 것. 총에 맞은 표범은 2m나 치솟으며 산이 떠나갈 듯 소리치다가 일제 사격을 받아 끝내 쓰러진 것인데 이 표범은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1m60cm 무게 51.5kg(14관). 갈색과 검은 반점이 있고 시가 70만 원쯤.”


당시 70만 원은 괜찮은 집 한 채와 맞먹는 돈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경남매일(지금 경남신문)은 3월 7일 자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6·25동란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표범이 지난 4일 아침 8시경 경남 함안군 영암산 중턱에서 잡혀 화제가 되고 있다. 부산 부민동1가 18번지에 사는 설욱종(50) 씨가 동료 2명과 함께 사냥갔다가 엽총으로 쏘아잡은 이 표범은 무게 49kg 길이 1m85cm의 15살짜리로 경남에서 잡히기는 처음이다. 사냥을 시작한 지 20년 간에 표범을 잡은 설씨는 박제로 만들어 영구히 가보로 보존할 것이라고 한다.”

출처: 경남신문

경남매일은 이어 12일 자 “나머지 표범 마저 잡아 주오/ 현지 주민들 불안에 떨어/ 옛 전설 믿고 후환을 염려”라고 제목을 뽑은 기사에서 뒷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11일 이 곳 주민들에 의하면 이 표범은 수년 전부터 1쌍이 살고 있는 것으로 이 고장의 ‘산지끔’이라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번에 잡힌 표범은 이 산을 왕래하는 나무꾼이나 주민들에게는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 1마리가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1마리가 그 곳 주민이나 이 산을 왕래하는 나무꾼들에게 복수(?)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들 말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주민들은 옛날에 이곳에 나무하러 간 나무꾼이 나무를 하던 중 실수로 낭떠러지에 떨어져 실신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던 가족들이 익일(다음날) 새벽 일찍 산을 찾아 헤매다 나무꾼을 겨우 발견했는데 이 때 실신한 나무꾼을 표범이 꼬리에 물을 묻혀 와서 이마에 적셔주며 깨기를 기다렸다. 밤새껏 나무꾼을 지키고 있다가 가족이 나타나자 표범은 비로소 사라졌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이런 전설을 믿으며 이번에 잡힌 표범 때문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면 1쌍이 같이 있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반드시 1마리가 살아 있을 것으로 보고 후환이 없게끔 남아 있는 한 마리도 잡아야 한다고들 입을 모으고 있다.”


먼저 큰 틀에서 말하면 경남에서 표범이 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잡힌 적이 있다.


출처: 아이클릭아트
표범

일본어로 발행된 부산일보는 1937년 12월 21일 자에서 “’남경 함락의 날’에 고성군 마암면 허홍도 씨에게 사격으로 큰 표범이 잡혔다”면서 사진을 크게 실었다.


남경 함락의 날은 12월 13일이다. 일제는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러다 남경을 장악하자마자 이듬해 1월까지 공식 기록으로만 12만 9,000명을 죽이는 남경대학살을 저질렀다.


해방 뒤에도 경남에서 표범은 사람 눈에 띄었고 그 때문에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동아일보는 1962년 2월 21일 자에 “합천 표범 서울 구경/ 곧 창경원 숫놈의 배필로”라는 기사를 실었다. (사실은 암수가 바뀌었다.)


“지난 11일 경남 합천군 묘산면 가야리 오도산(해발 1234m)에서 황홍갑(45) 씨가 덫을 쳐서 잡은 표범(무게 약 5관, 길이 약 5.5척, 꼬리 1.2척)이 20일(사실은 19일) 오후 7시 20분 경부선 미군 열차 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해 창경원 표범사에 들었다.”


당시 아주 어린 한두 살로 짐작됐던 이 수컷 표범은 11년 뒤인 1973년 8월 19일 숨을 거뒀다. 몸무게가 자연 상태 평균인 50kg을 훌쩍 뛰어넘는 87kg에 이르렀고 운동 부족→이상 비대→심장판막증이 있었던 탓이 컸다.


표범 기사는 그 뒤로도 이어진다.


1963년 3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지난 23일 아침 5시쯤 경남 합천군 가야면 ‘비끼니’산에서 같은 면 대전리 209번지 황수룡(38) 씨가 기르는 사냥개가 표범을 물어 잡았는데 12세 가량으로 길이가 1m, 꼬리 70cm이다”고 했다.


같은 해 11월 13일 자 동아일보도 “지난 10일 하오 5시쯤 이곳 묘산면 산제리 가야 부락 김칠리(51)씨는 길이 2m 무게 15관 가량 되는 암표범을 마을 뒷산 오도산 중턱에서 철사 올가미를 씌워 잡았다”고 했다. 10시간 남짓 몸부림치다 지쳐 죽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1970년 이후 지금까지 표범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경남에서는 물론 전국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드문드문 표범으로 짐작되는 동물이 출현했다는 얘기가 나오고는 했으나 이렇다 저렇다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야생에서 마지막 표범이 잡힌 현장인 함안군 여항면 내곡마을을 2019년 3월 2일 찾았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이달출(75)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달출 씨는 설욱종 씨가 명포수라고 기억했다.


“노루 두 마리가 이쪽에서 도랑을 건너 저쪽으로 뛰어가고 있었어. 그런데 그것을 단 두 방으로 맞혀 쓰러뜨리더라고. 그러니 표범을 한 방에 잡았다는 얘기를 나는 믿지.” 엽총은 산탄이라 방향만 맞으면 된다.

출처: 경남도민일보
이달출 씨

얘기는 이어진다.


“설 포수 일행은 해마다 겨울에 한 차례씩은 왔지. 와서는 마을에 집을 정해 밥을 대어 먹으면서 짧게는 3일, 길게는 5일 머물면서 고라니나 노루 사냥을 했어요. 우리는 ‘사장들’이 왔다고 했어요. 당시는 대부분 홀쭉했는데 달리 배가 나오고 뚱뚱하면 사장이라고들 했어. 그런 사람들이 지프를 타고 왔어. 설 포수는 사장들한테 고용된 사람이었어.


요즘은 노루나 고라니 누가 쳐 주나? 그때는 달랐어. 바로 현장에서 목에다 빨대를 꽂고 채 식지 않은 피를 빨아마셨어요. 그렇게 하면 정력에 좋다면서 말이지.”


말하자면 총 잘 쏘는 포수 한 명을 데리고 경남에서도 오지라 할 수 있는 이 마을에 겨울 한 철 들어와 며칠 지내며 사냥을 하고 싱싱한 동물을 잡아 피를 마시곤 했던 것이다.


사냥은 포수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마을의 젊고 어리면서 빠릿빠릿한 친구를 몰이꾼으로 썼다. 포수와 사장들은 위에서 목을 지켰고 몰이꾼들은 밑에서 올라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곡가는 헐하고 돈은 귀한데 일할 데도 없었거든. 몰이꾼을 하면 일당을 주는 거라. 쌀 두 되 값을 하루에 쳐줬고 짐승을 잡기라도 하는 날은 배로 주기도 했거든.”


“그런데 그날은 몰이꾼을 쓰지 않았어. 새벽에 산에 올라간 거라. 보통은 아침에 몰이꾼하고 같이 가는데. 새벽에 총 소리가 나데. 아침 밥 때 산에서 표범을 어깨에 지고 내려오는 거라. 직접 잡는 거는 못 봤지.”


이달출 씨는 표범이 잡힌 자리를 가리켜 주었다. 내곡마을로 들어오면서 왼쪽으로 보면 두 번째 뻗어나오는 산줄기였다. 그 중턱 조금 위에쯤 되는 데 범굴이 있는데 거기라 했다. ‘범’과 ‘굴’이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 두셋이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정도인데 옛날부터 범이 거기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어졌다는 말까지 들었다.

출처: 경남도민일보
표범이 최후를 맞은 자리를 가리켜 보이는 이달출 씨

마을 출신 가운데 표범을 본 사람은 없었다. 지고 내려오는 표범을 봤을 뿐이다. 이달출 씨는 거적으로 덮어놓은 표범한테로 다가가 수염을 두 가닥 뽑았다. 흰색이었고 긴 것은 어른 한 뼘 정도 되었다고 했다. 기념으로 삼으려고 생각했다.


“몰래 했지. 알려졌으면 뽑을 수나 있었을까? 몰이를 할 때 노루·고라니가 다른 데로 달아나기만 해도 쌍욕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데 개를 만지면 털이 부드럽고 폭신폭신하잖아? 하지만 표범은 그렇지 않고 까칠하더라고.”


표범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당일 아침에 설 포수와 사장들이 타고 온 차에다 표범을 싣고 그대로 부산으로 갔기 때문이다. 아마 경향신문과 경남매일의 처음 기사가 모두 ‘부산’발로 나왔는데 그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표범이 한 쌍이었고 살아남은 한 마리가 복수할지 모르니 나머지 한 마리도 잡아야 한다는 소문이 당시 퍼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곡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면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바깥에서 만들어진 소문이었다. 이달출 씨는 그런 얘기를 당시는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그해 가을 이달출 씨한테로 산인면 문암 마을에서 시집온 두 살 아래 아내는 그런 소문을 친정에서 일찍이 들었다고 했다.


49년 전 경남에서 마지막 표범이 사람에게 잡혀 죽은 전후 사정을 이달출 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by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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