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의 주역은 왜 자결해야 했나?

조회수 2020. 7. 26. 10: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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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자결 순국한 까닭
▲ 독립기념관 어록비 공원에 있는 서일의 어록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1921년 8월 27일(음력, 양력은 9월 28일), 노령 국경 부근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1881~1921)이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진 순국했다. 그때 그는 자유시 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전날, 소련 적군의 후원을 받은 토비 수백 명이 야습해 진중이 초토화되고 훈련 중이던 수많은 청년 병사들이 희생되자 그는 독립군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고자 짧은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 것이었다. 향년 41세.


“조국 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청산리 전투의 주역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우리 독립투쟁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를 모르는 이는 없어도 백포 서일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서일은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이 복무했던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다. 그는 정규병력 1천5백여 명으로 지방 치안을 유지하고 사관양성소를 세워 독립군의 중견 사관을 길러냄으로써 청산리 대첩의 기초를 닦은 이다.


서일은 함경북도 경원 사람이다. 고향에서 함경도의 대표적 유학자 김노규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운 뒤, 1902년 경성 유지의숙(경성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을 졸업했다. 이후 고향에서 계몽운동과 교육 구국운동을 벌이던 그는 1911년 만주로 망명했다.


스물다섯에 을사늑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 경술국치를 당해야 했던 식민지 청년은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통분해 하며 당시 많은 지사가 모여 있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망명했다. 그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적극적으로 전개한 항일무장투쟁의 시작이었다.


서일은 망명 이듬해 대종교 계통의 명동학교에서 한인 자녀를 가르치다가 초대 교주 나철(1863~1916)로부터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했다. 그는 대종교의 2대 교주 김교헌(1868~ 1923)와 함께 만주에서 대종교 교세 확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만주에서 항일무장단체 중광단 조직


두만강을 넘어 열혈청년들의 망명이 이어질 때 서일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항일 무장 단체 중광단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 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대종교 포교에도 힘을 써 만주와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 명의 교우를 얻어 이들 가운데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군량 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뒷날,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 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자치 조직과 독립운동 단체, 학교들 ⓒ천재교육 <천재학습백과>

서일은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 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채호 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을 발표했고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했다. 그는 또 기관지 <일민보>와 <신국보>를 통해 독립을 위해 일제와의 항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었다.


1919년 7월부터 청산리 전투가 전개된 1920년 10월까지 서일은 중광단을 확대 개편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고 러시아군과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 정의 무기를 확보했다. 당시 일제는 북로군정서의 성장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군정서는 서대파구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 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부사령관 김성, 참모장 나중소 등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제의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 중에서


1920년 10월 20일, 일제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서일의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 장군, 대한독립군은 홍범도 장군의 지휘 아래 매복과 기습, 작전상 퇴각과 연합 공격 등 치밀한 작전을 벌여 10월 26일까지 일본군을 연파했다.


만주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등지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했지만, 독립군 측의 전사자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른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관련 글: 1920년 오늘-청산리 전투, 대승으로 시작되다)

▲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군 병사들. 서일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의 주역이었다.

봉오동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약 두 달 동안 독립군의 근거지라고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했다.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소의 학교가 불에 타는 ‘간도 학살’(경신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으로 독립군단 와해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알렉세브스크)로 옮겨갔다. 1921년 1월에 서일과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



일제를 피해 러시아로 들어왔으나 여러 무장군 조직이 자유시에 집결하면서 저마다 사정이 다른 여러 부대의 집결은 자연 뜻하지 않은 분쟁을 가져왔다. 대군단의 결성과 군비 확장의 기회 대신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로 구성된 부대와 간도 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군권 쟁탈전을 벌인 것이었다.


한편, 일본과 소련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일본은 소련 영토 내에 일본에 유해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 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면서 이의 해결을 요구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쇠약해진 소련도 일본과 불화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약속했다. 결국,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가 내려졌고 이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과 적군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지청천을 위시해 수많은 독립군이 포로가 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됐다. 이 사건이 바로 ‘흑하사변’이라고도 불리는 자유시 참변이다. 흑하사변 이후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됐다.


서일과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의 지휘부는 자유시로 가지 않고 이만에서 밀산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북로군정서는 토비들의 야습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 2015년 밀산시 인민정부가 서일의 순국지 부근에 세운 서일총재항일투쟁 기념비
▲ 대종교의 삼종사 묘.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의 묘. 길림성 화룡시에 있다.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자결하다


다음날, 서일은 마을 뒷산 산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과 토비 야습으로 동지를 잃은 그는 미뤄온 독립군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서일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됐다.


짧은 생애로나마 독립운동가로서 서일의 활동과 지도력은 더 보태고 뺄 게 없다. 1962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15년 밀산시 인민정부는 서일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그의 순국지 부근에 서일 총재 항일투쟁 기념비를 세웠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만이 아니라 철학적 논리와 과학적 증명으로 종교의 교리를 체계화한 대종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삼일신고강의>, <회삼경> 등이 있다.

by 낮달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 <위키백과>

· 이동언, ‘서일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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