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것

조회수 2020. 7. 13. 08: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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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자살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출처: 직썰만화

"아버지는 8년 전에 자살로 돌아가셨어요…"


이 한 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멈칫하는 게 느껴집니다. 이어 주로 머리를 갸우뚱하며, “아, 참 안 되셨어요.”와 같은 연민 섞인 위로의 말이 이어지죠. 사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이미 얼굴에 다 쓰여 있으니까요.


제가 아버지의 자살에 관해 이야기해주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아요.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그러셨어?”


“아버지의 선택을 원망할 때도 있니?”


“알지? 너희 아버지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천국에 가시지는 못했을 거야.”


이 질문들은 제가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은 것들이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입에서 같은 질문이 나올 때면 저는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질문을 마주할수록 저는 자꾸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거든요.


만약 그 사람이 제게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그러셨어?”라고 묻는다면, 제가 받는 첫인상은 그 사람이 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저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아요. 그들이 오직 아버지의 죽음에만 관심이 있고, 그의 생애에는 관심이 없다고 느껴지는 거죠.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음의 방식을 ‘선택’한 데 대해 아버지를 원망하는지 물어보면, 저는 더욱더 방어적으로 변합니다. 물론 저도 가끔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 대해 아버지에게 화가 나기도 하지만, 저는 그가 자살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살로 죽는 것은 암으로 죽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아버지는 심각한 정신 질병이 있었어요. 그래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하루하루 말 그대로 질병과 사투를 벌이셨죠.


대부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아버지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느냐를 두고, 죽은 방식으로 그의 생애를 순식간에 재단하죠.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또는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물음보다 사람들이 제게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물어줬으면 좋겠어요.


그의 이름을 물어봐 주세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봐 주세요. 제가 아버지와 가장 즐겨 하던 놀이가 무엇이었는지, 제게는 그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는지를 물어봐 주세요.

만약 당신이 제 아버지를 생전에 알았다면, 당신이 아버지의 어떤 면을 좋아했는지 제게 알려주세요. 저를 보면 아버지의 어떤 면이 떠오르는지도요. 어느 날 문득 어떤 때 그가 그리워지곤 하는지, 아니면 당신이 아버지에 대해 아는 당혹스럽고 좀 곤란했던 이야기라도 좋아요.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는 걸 알아요.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계속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애도는 당신이 여전히 떠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행위를 영원히 멈추지 않을 사람에


저는 제가 아버지의 모든 존재 자체를 방어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아버지의 자살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자살로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한 뒤에 이내 “그는 거의 평생을 정신 질병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힘들어하셨어요.”라는 설명을 덧붙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서도 벗어나고 싶어요.


저는 사람들이 정신 질병과 자살에 대한 낙인을 넘어서, 제 아버지가 얼마나 놀랍게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아버지의 자살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유일한 저의 바람이에요.


미국 자살예방협회와 자살 유가족인 새라 애쉬 (Sarah Ash)가 나눈 이야기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옮긴이의 말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때로는 정신과 의사 동료들조차 불편해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정신 건강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부감이야 오죽할까. 그럼에도 자살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많은 사람을 자살로 잃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내가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한 사람들이었고, 또 다른 이들은 멀게나마 알던 지인들이었다. 그렇게 떠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유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친구로서, 정신과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남들이 불편해하더라도) 계속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믿기지 않겠지만, 암에 대해서도 한때 엄청난 낙인이 있었다. 누군가 암에 걸리면 사람들은 진단받은 사실을 숨기곤 했으며, 암(cancer)이란 말 자체도 입에 담지 않고, “C word”라고 표현했던 때도 있었다. 에이즈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살에 대해서도 똑같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낙인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 이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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