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내의 가사노동을 바라보며

조회수 2020. 7. 10. 12: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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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고 서린 아내의 땀과 고단함을 언제쯤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9월의 일이다. 아내는 집에 없었다. 군에 있던 아들 녀석이 예고없이 특박을 나왔고, 딸애는 스파게티를 해 달라는 제 동생의 주문에 따라 주방에서 음식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들 녀석은 헤드셋을 끼고 컴퓨터 앞에 아예 좌정을 해 버렸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티브이를 켜 놓고 멀거니 화면에 눈을 주고 있는데 문득 아내의 부탁이 떠올랐다.


언제 시간 나면 냉동실에 있는 멸치, 똥 빼고 다듬어 놓아 줘요. 하지만 대가리를 버리면 안 돼요.


즐겨 먹는 된장이나 국 따위에 통으로 든 멸치를 나는 혐오하는 편이다. 국물에 푸근히 몸을 담가서 우려낸 국물 맛에도 불구하고 물에 분 놈들의 허여멀건한 배때기를 바라보는 기분이 영 께름칙해서다.


똥을 뺀 멸치를 분쇄기로 갈아서 먹기를 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나는 냉동실에서 멸치 봉지를 꺼내 방바닥에 깐 할인점 광고지 위에 부어 버렸다. 아주 가볍게 한 삼십 분쯤 몸을 괴롭히면 아내의 일을 덜 수 있지 않겠나(보다는 아내에게 생색을 낼 수 있지 않나) 하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웬걸, 삼십 분이 지나도 멸치더미는 줄지 않았고, 한 시간이 지나자 나는 완전히 패를 잘못 뽑았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두 시간 가까이 멸치를 주무르고 있어야 했고, 그 시답잖은 노동이 몸의 여러 군데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꼼짝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리가 저리는가 하면, 한쪽 어깨가 결려왔고, 이 시답잖은(!) 노동이 감히 날……, 나는 무언가를 향해 계속 투덜대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를 치우고 나자, 내 노동의 결과는 허망했다. 베란다에 종이를 깔고 멸치를 널고 나니 언제 그런 성가신 노동이 있었는지 바닥은 깨끗하기만 했다. 

물론 나는 아내의 치사를 듣긴 했다. 그 짧은 시간의 주말노동을 통해서 나는 갑자기 철이 부쩍 난 느낌이었다. 다시는 어설프게 아내의 일에 덤비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약빠른 생각과 함께, 늘 이론으로만 건네다 보던, 이른바 ‘가사노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까닭이었다.


이후, 김치 담그는 데 쓰일 한 접에 가까운 마늘을 까기도 했고, 처가에서 가져 온 열닷 근짜리 고추를 일일이 물걸레로 닦아내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이 시답잖은 가사노동에 동참하면서 얻은 경험도 만만찮다. 비닐장갑을 끼라는 아내의 조언을 무시하고 맨손으로 마늘을 까다가 검지에 화상(마늘을 까다가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을 입었고, 규칙적으로 고추를 봉지 속에 넣는 과정에서는 오른쪽 어깨가 결리는 경험도 했던 것이다.


어떤 정치인이 전업주부를 가리켜 ‘노는 엄마’라고 실언했다가 경을 친 예에서 보듯 전업 주부의 일인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일반의 시각은 여전히 인색하다. 그것은 ‘가족을 위해 하는 사적·개별적 노동이기 때문에 밖에서 일하는 수입노동처럼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무보수노동 형태’를 띠는 까닭이다.


편한 것, 노는 것이라는 통념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가사노동은 노동시간이 길고 종류가 많고 복잡하며 힘든 노동이다. 우리 나라의 전업 주부의 가사노동은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이라고 한다. 가사노동은 다른 사회적 노동들이 고도의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핵가족 아래에서 고립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주부는 사회적 삶으로부터 단절되는 소외감·박탈감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나는 전업주부인 어머니의 직업을 당당하게 ‘주부’라고 적으라고 가르치고, 가사노동이 갖는 사회 경제적 가치에 대해 통계적 데이터를 인용해 가면서 주절대곤 했지만,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이렇듯 다른 것이다.


아내에게 지나가는 말인 듯, 심상하게 수고가 많다고 건넸지만, 내겐 아직도 내 봉급명세서에 기록된 숫자가 의미하는 경제적 가치만큼, 내가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내 집에서 이루어지는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밥을 먹고,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한 옷을 입고,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일상의 삶, 거기 있는 듯 없는 듯 고이고 서린 아내의 땀과 고단함을 언제쯤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by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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