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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이 깨부순 드라마판의 ‘관행’들

‘슬의생’은 남다른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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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드라마는 끝이 간절하다. 손에 땀을 쥐는 갈등이 흥미롭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 날선 싸움을 지켜보기 힘들어 빨리 결말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끝난 JTBC <부부의 세계>가 그런 드라마에 포함될 것이다. 누구도 지선우(김희애)의 고통이 계속되길 바라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반면, 어떤 드라마는 끝의 ‘유예’가 간절하다. 어린시절에 듣던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처럼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게 된다.


지난 28일 종영한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은 분명 후자에 속할 것이다. 20년지기 의사 친구들의 삶과 우정을 담은 <슬의생>은 따뜻한 온기와도 같았다. 드라마 전체를 꿰뚫는 갈등 구조는 없었지만, 소소하고 잔잔한 이야기들이 우리네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정겨웠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호기심을 넘어 ‘함께’ 하고 싶어졌고, (이미 정이 들어서) 같이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 회 시청률 6.325%(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로 출발한 <슬의생>은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12회 14.142%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슬의생>의 인기는 OST로도 입증됐는데, 조정석의 ‘아로하’, 전미도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는 음원 시장을 석권했다. 드라마는 종영됐지만, 미도와 파라솔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은 각종 음원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라있다. 이처럼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슬의생>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주 1회라도 괜찮아

<슬의생>이 과감하게 주1회 방송을 들고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예능과 달리 드라마의 경우, 주 2회 방송이 일반적으로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원호 PD-이우정 작가의 조합이라 해도 시청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주1회 방송은 모험이라는 의견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슬의생>이 보여줬듯 주1회 방송은 시도하지 않아서 낯선 것일 뿐, 잘못된 방식도 나쁜 방식도 아니었다.

“이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치솟는 제작비 상황, 바뀌어가는 근로환경을 고려했을 때, 주 2회 드라마가 계속 제작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래서 주 1회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반드시 이 드라마가 잘 돼서, 이 방송계에 새로운 모델로 제시되고, 그래서 제작환경과 시청형태가 바뀌면 어떨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으로 기획했다.” (신원호 PD)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은 언제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선진 시스템 도입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매번 시간에 쫓기다 보니 완성도는 갈수록 떨어졌다. 방송 직전에 편집본을 전달했다는 후일담이 드라마 한 편이 끝나면 어김없이 회자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현장 스태프에 대한 처우가 개선될 여지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주 2회 방송의 빠듯한 스케줄을 따라가느라 벌어진 일이었다.


<슬의생>의 성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드라마 시청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주 몇 회’가 아니라 드라마의 퀄리티였다. <슬의생>은 52시간 근무제를 지키면서 스태프의 처우와 작업 환경을 개선했는데, 이는 곧 드라마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배우들도 보다 몰입도 있는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라는 사소한 아쉬움은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이라는 완성도에 대한 감탄으로 전환됐다.

인기 연예인보다는 ‘찐’ 배우를 캐스팅

시청자들은 ‘제대로 된’ 연기에 항상 목말라 있다. 완전히 각성한 배우들이 캐릭터에 빙의된 모습을 보며 감동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 <슬의생>의 성공에 이른바 ‘99즈’, 김준한, 안정원, 양석형, 이익준, 채송화를 연기한 정경호, 유연석, 김대명, 조정석, 전미도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잘되는 드라마의 특성 중 하나는 배우의 얼굴을 보면 실제 이름보다 극 중 인물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는 것인데, 저들은 그 어려운 일을 거뜬히 해냈다.


정말 오래된 친구 같아 보였던,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던 주연 5인방의 연기만큼이나 조연들의 활약도 빛났다. 김혜숙, 김갑수, 김준한, 정문성, 신현빈, 문태유, 안은진, 곽선영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배우가 율제병원의 주변과 구석구석을 채웠다. 그들 역시 (적은 분량에도) 막강한 존재감을 뽐내며 빈틈없이 제역할을 수행해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정말이지 '찐' 배우투성이였다.

큰 갈등이 없어도 괜찮아

<슬의생>은 남다른 드라마였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역시 큰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부의 세계>만 해도 ‘이태오의 외도’라는 큼지막한 사건이 존재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지 않던가. 그런데 <슬의생>에는 드라마 전체를 꿰뚫는 서사가 없었다. 대신 한편 한편마다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졌다. 그들의 삶에도 분명 갈등이 있었지만, (체감상) 15분~20분을 넘기지 않고 해소되곤 했다.


드라마 전체를 이끌고 가는 서사는 없었지만, 어쩌면 휘몰아치는 힘은 없었지만, 반면 훨씬 더 섬세하고 촘촘했다. 작은 이야기들은 현실감 있었고, 인물 간의 관계는 더욱 세밀하게 묘사됐다. 드라마에 힘을 빼자 시청자들은 편안하게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었다. <슬의생> 드라마와 시트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는데, ‘휴먼 드라마’를 제시했던 신원호-이우정의 노림수가 제대로 통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슬기로운 <슬의생>에도 단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착한 드라마’가 주는 현실과의 괴리감은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허탈감을 주기도 했다.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들이라니. ‘판타지’가 주는 눈속임은 잠깐의 행복을 주긴 하지만, 삶의 비릿함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기 마련이다. 또, ‘휴머니즘 과잉’도 일부 시청자들을 괴롭게 했다. 환자들의 고통과 상처조차 의사들의 성품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사용됐다는 점은 아쉽다는 지적이다.


후반부에 쏟아진 러브라인은 다수의 시청자를 설레게 했지만, 한편 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기보다 (답이 정해진 것처럼) 무대포처럼 연결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준한과 익순의 사랑은 아무런 전조 없이 벌어져 시청하는 입장에서 갑작스러웠고, 겨울에 대한 정원의 감정도 너무 극적인 감이 없지 않다. 또, 송화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익준과 치홍의 경쟁도 썩 매끄럽지 않았다.


이렇듯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의생>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다. <슬의생>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큰 화두를 던졌다. 어쩌면 국내 드라마의 역사에서 <슬의생>의 중요한 기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 (이미 모두 알고 있을) 반가운 소식 하나! 지난 3달 동안 시청자들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끊임없이 불어넣었던 <슬의생>은 내년에 시즌2로 돌아올 예정이다. 끝이 났지만 끝난 게 아니다.

* 외부 필진 버락킴너의길을가라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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