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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현충원 안장' 주장, 프랑스에선 있을 수 없는 일

조회수 2020. 6. 1. 11: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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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나치부역자에게 자살도 허락하지 않았다.'
출처: ⓒ다부동 전적기념관 야외 전시 사진
▲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로 입성해 기자회견을 하는 백선엽 당시 1사단장

최근 한국전쟁의 ‘영웅’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한 백선엽(1920~ ) 예비역 대장과 관련 뉴스가 뜨겁다. 언론이 올해 100세가 된 백 대장을 불러낸 것은 그가 사망하게 되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기 때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한국전쟁 영웅’ 사이

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뒤집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1950)’를 비롯해 ‘평양전투(1950)’와 ‘중공군 춘계공세(1951) 저지’ 등 여러 차례 승전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백선엽에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은 충분하다. 그가 이명박 정부 때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원수’로 추대될 뻔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백 전 장군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설립된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이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한 이유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국가유공자 자격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서울현충원에 7명, 대전현충원에 4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는 서울현충원에 37명, 대전현충원에 28명 등 모두 65명이나 된다.


최근 여권 일부에서 국립현충원 안장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른 데 이장해야 한다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백 전 장군도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무려 35년이나 식민지 압제를 받아놓고도 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 묻고 기리는 독립국이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이 엄청난 모순의 근원은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왜곡되고 굴절된 우리 현대사에 있다. 해방 공간에서 ‘반민특위가 좌절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역사적 가정을 두고두고 곱씹지 않을 수 없는 회한의 역사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이들의 반민족행위를 국가에서 용인해 버린 결과 때문에 우리는 ‘민족 정체성의 훼손’이라는 비용을 오래도록 치르고 있다.

베르됭의 구원자, 페탱

백선엽을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 페탱 원수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전쟁 영웅 백선엽 위에, 1951년 대독 협력, 이른바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의 주역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페탱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육군을 패퇴시킨 베르됭(Verdun)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은 이다. 1916년 303일간,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육군 사이에 벌어져 양측 전사자가 70만 명이 넘는, ‘인류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된 베르됭 전투에서 페탱은 프랑스를 구해낸 것이다.


베르됭의 구원자로 1918년 프랑스군 원수로 승진한 페탱은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부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패전이 자명해진 상황에서 휴전협정을 주장한 페탱은 신임 총리가 돼 새 내각을 구성하고 독일에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요구했다. 그는 전쟁보다는 항복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출처: ⓒ위키백과
▲ 휴전협정 후 히틀러와 만난 비시정부 수반 페텡 총리(왼쪽)

그러나 그가 맺은 휴전협정은 사실상 항복조약이었다. 협정에 따라 독일 강점기에 페탱이 이끈 비시 정부(1940.6.16.~1944.8.25.)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Vichy France)임을 주장하며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협력 정책을 수행한’ 비시 정부는 독일이 노동력 징발을 요구하자 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한 ‘의무노동제’로 기꺼이 ‘협력’했다.

페탱의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

비시 정부는 또, ‘나치 독일의 적들을 체포·처벌·제거’하는 방식으로 독일에 협력했다. ‘적’은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비시 정부는 기존의 법 절차와 무관하게 레지스탕스를 탄압할 수 있는 사법기구로 ‘특별재판부’를 설치했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군 당국이 처형할 프랑스인 인질 명단을 작성하는 일도 맡았다.


특히 1942년 여름의 협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비시의 경찰은 프랑스 주둔 독일 친위대와 협약을 맺고 대대적 유대인 검거에 나섰다. 이때 프랑스 경찰에게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7만6,000여 명의 프랑스 거주 유대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은 단 3%에 불과했다.


1944년 8월 25일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de Gaulle) 장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들에 대한 드골의 방침은 확고했다. 드골이 규정한 민족 반역자란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나치의 승리를 위해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 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전 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나치 협력자에 대한 단호한 단죄에 나선 드골은 대다수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문제는 개개인의 과오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재확립, 군국주의자들과 그 공범자들 및 그 사상의 청산, 그리고 민족 반역자 청산 문제라고 보았다.

프랑스의 정의, 단호한 ‘부역자 단죄’

사법적 숙청으로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넘겨졌다. 그중 약 3만8,000명이 유·무기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았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00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000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 형만 선고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중형이 선고됐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이들이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였으므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그중 7명이 처형될 정도였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Laval)에 대한 처리였다. 국가적 대독 협력의 주역이었던 라발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앞장선 민병대 총수 다르낭(Darnand)은 총살됐다.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은 법정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던 시기에 소집된 대표들을 통하여 내게 권력을 준 것은 프랑스 국민이었소. 나는 전 생애를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으며 권력을 합법적으로 승계한 셈이오. 4년 동안 프랑스를 지켰으며 프랑스는 가장 비극적인 시기에 내게 의지한 셈입니다. 나는 결코 그것을 일부러 추구한 것이 아니오! 국민적인 열망으로 정부의 수반을 맡게 된 겁니다!

당신들은…… 그러한 시기의 어려움을 알기나 하는 겁니까? 난 매일 나치의 요구에 고민해야 했습니다. 훗날 역사는 나를 올바로 평가할 것이오!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치부되어 구속되거나 형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소!”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형법 75조(국가반역죄)와 87조(외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한 간첩죄) 위반으로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배심원들은 반대에 13표, 찬성에 14표를 던졌고 한 표 차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페탱의 사형을 즉시 집행할지, 유예할지는 17대 13으로 유예가 결정됐다. 드골은 사형 결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페탱은 1945년 11월 대서양 되섬의 감옥에 이송됐다. 그는 거기서 5년 8개월간 복역하다가 1951년 7월 23일, 아흔다섯 살을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페탱은 프랑스의 위인들을 안장하는 팡테옹(Panthéon)도, 유명 장군들이 묻히는 앵발리드(Invalides)도 아닌 현지에 묻혔다. (관련 기사: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에게 자살도 허락하지 않았다)

출처: ⓒ위키백과
▲ 페텡은 대서양 연안의 되섬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했고, 거기 묻혔다.

독일의 직접 지배 대신 꼭두각시 비시 정부가 프랑스를 통치한 기간은 50개월이었다. 고작 4년 남짓한 콜라보라시옹에 대한 단죄는 35년의 식민지배에도 친일부역자 청산을 포기한 한국의 그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아흔 살이 넘은 노인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게 잔인무도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다.

순서만 다른 ‘부역’과 ‘구국’

앞서 말했듯, 괴뢰정부 수반으로 대독 협력의 총책임자였던 페탱과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 만주국의 초급 장교였던 백선엽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페텡은 독일에 간접적으로 ‘협력’한 데 그쳤지만, 백선엽은 스스로 만주군 장교가 되는 길을 택했고 중국의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함으로써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의 ‘부역’과 ‘구국’은 순서만 다를 뿐이다. 1차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해낸 페탱은 2차대전에서 ‘국가반역’을 저질렀다. 구국의 공적으로도 단죄는 모면할 수 없었다. 2018년, 페탱을 1차대전 승전 100주년 기념식의 추모 대상에 포함했던 프랑스 정부는 논란이 일자 방침을 철회해야 했다. 적어도 프랑스는 국가반역자를 기리는 것도 용인하지 않은 것이었다.

▲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자 1951년 다부리 주민들이 세운 호국구민비
▲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적기념비. 현충원 안장이 논란이 되자, 백 장군 가족들은 장지로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선엽이 친일부역을 끝낸 것은 일본의 패망 덕분이었다. 일본이 패전국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친일부역은 더 크고 깊어질 수도 있었다. 독립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복만 갈아입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구국의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이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1941년이었다. 5년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한국군 소위로 재임관한 그는 서른 살이 되던 1950년, 별을 달고 장군이 됐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한 그는 뒷날 ‘명예 원수’로 추대될 뻔했다. 적의 군인이 돼 조국을 겨누었던 백선엽은 조국에 돌아와서도 군인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린 것이다.


과연, 백선엽 전 대장은 ‘한국전쟁 영웅’의 이름으로, 11명에서 65명에 이르는 친일부역자들이 묻힌 국립현충원에 잠들 수 있을까. 아니면 비록 지연되긴 했지만, 과거사 청산으로 현충원에서 지워지는 친일부역자들과 함께 잊힌 이름이 될까. 분명한 것은, 친일부역자의 현충원 안장을 두고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부관참시’로 팽팽하게 맞선 이 해묵은 논의가 어떻게 귀결되는가는 우리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늠자가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 외부 필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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