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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죽고 난 뒤 '대박' 난 '이 국민화가'

1965년 5월 6일, 국민화가 박수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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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근 화백과 가족들의 단란한 한때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1965년 5월, 국민화가 박수근 떠나다

1965년 5월 6일 새벽 1시,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이 간경화증으로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자택에서 평생을 가난과 싸워야 했던 고단한 삶을 거뒀다. 향년 51세. 4월 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가 회복이 어렵게 되자 퇴원한 지 하루 만이었다.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고단한 생애를 마감했다. 가난으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던 화가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 일가를 이뤘지만 살아생전에 끝내 그 가난을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부터 크리스천이었으나 그는 예술적 좌절을 이기고자 과음을 계속한 끝에 신장과 간이 나빠졌다.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을 앓았지만 수술할 형편이 되지 않아 병이 악화된 뒤에야 간신히 수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국, 다른 병원에서 다시 수술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 그는 오른쪽 눈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가난 탓에 눈을 잃고 한 눈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를 상상해 보라.

밀레 같은 화가를 꿈꾼 시골 소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도화(미술) 시간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열두 살 때, 프랑스의 농민 화가 밀레의 ‘만종(晩鐘)’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자라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순전히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한 그가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 서양화부에 입선한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독학으로 선전에 입상한 데 용기를 얻었지만 이후 내리 세 해 동안 그는 선전에 연속 낙선했다. 두 번째 입선은 ‘일하는 여인’이란 수채화를 출품했던 스물두 살(1936) 때였다. 다음 해부터 내리 세 번이나 입선하면서 그는 비로소 기량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그린 유화는 1938년 선전에서 입선한 ‘농가의 여인’이었다.

▲ 나무와 두 여인. 소설가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의 바탕이 됐던 작품이다.

1939년에 만난 이웃 처녀 김복순을 사랑하게 된 박수근은 이듬해 강원도 금성 감리교회에서 그녀와 혼인해 새 가정을 꾸렸다. 그는 5월에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이 돼 평양으로 떠났는데 박봉이었지만 그 신혼 시절이 그가 가장 안정적으로 살았던 행복한 시기였다.


1941년부터 그는 다시 내리 세 해 연속으로 선전에 입선했다. 이때의 작품이 ‘맷돌질하는 여인’, ‘모자(母子)’, ‘실을 뽑는 여인’ 등이었다.


1945년 아내를 친정에 보내고 평양에 혼자 남아있던 박수근은 8·15해방을 맞았다. 11월에 도청 서기직을 그만둔 그는 강원도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 교사로 일했다. 38선 이북이었던 그곳에서 그는 기독교인이자 자유주의 사상을 지닌 화가로 공산 체제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완서 소설 <나목> 바탕된 ‘나무와 두 여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으로 자유를 얻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단신 월남했다. 전북 군산까지 내려간 그는 부두노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52년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한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 빨래터. 2007년, 이 그림은 45억 2000만 원에 팔려 한국 작가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전쟁통 가운데 그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려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러 다녀야 했다. 1953년에는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어 다녔으며, 미8군 피엑스(PX)에서는 훨씬 수입이 좋은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그는 피엑스에서 일하던 소설가 박완서(1931~2011)를 만났다. 박완서가 초상화를 중개해줬는데 이 이야기는 뒷날 박완서의 등단작인 장편소설 <나목(裸木)>(1970)을 통해 드러난다.


사후에 작품 가격이 호당 3억 원(30만 달러)에 이르는 대화가가 되었지만 당시 박수근은 점당 3~6달러를 받고 미군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전쟁통에 만만찮은 벌이여서 박수근은 여기서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박수근은 전쟁으로 중단됐다가 1953년 가을에 속개된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국전(國展)] 서양화부에 처음으로 응모한 ‘집’이 특선, ‘노상에서’가 입선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이 ‘독특하게 단순화시킨 소박한 주제 전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채에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된 특질적 표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 박수근 작품 '유동(遊童)'. 따스한 햇볕 아래 골목길에 앉아 공기놀이하는 어린이들을 표현한 그림이다.

1954년 국전에서 ‘풍경’, ‘절구’가 입선한 뒤, 박수근은 6·25 발발 4주년 기념 대한미협전에 회원으로 ‘산’과 ‘길가에서’를 출품했고, 재경미술가작품전에도 참가하면서 본격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55년에는 국전에 ‘오후’가 입선했고 대한미협전에 출품한 ‘두 여인’으로 국회문공위원장상을 수상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국민화가

▲ 열화당 간 한정판 <나목>(2012)

이듬해에도 국전에 ‘나무’가 입선했고, 반도호텔 안의 반도화랑을 통해 주로 외국인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정감을 가진 특이한 조형 수법의 화가로 평가돼 소품이 적지 않게 팔리게 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난했다.


박수근은 1957년 국전에 오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100호 대작 ‘세 여인’을 출품했으나 낙선하자 충격과 비탄에 빠졌다. 그는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주를 시작했고, 이 과음으로 그는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국전엔 낙선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성숙해가고 있었다.


1958년, 반도화랑의 창설과 운영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화상 겸 수집가인 미국 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의 컬렉션으로 들어갔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됐다.


또 뉴욕의 월드하우스 화랑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母子)’, ‘노상’, ‘풍경’을 출품함으로써 박수근의 그림은 국외로 진출하게 됐다. 이듬해 그는 국전 운영 부서로부터 추천작가 결정을 통고받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1962년 박수근은 마침내 제11회 국전의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됐고, 주한 미 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박수근 특별초대전’이 열리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그는 필리핀 마닐라의 ‘한국현대미술전’에 초대됐다.


이 무렵 그의 예술적 위치와 평가는 날로 높아졌고 고유의 표현 기법과 작품의 깊이도 절정에 달했으나 생활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변함없이 가난했다. 이듬해 미루어왔던 백내장 수술을 증상이 악화된 뒤에야 할 수 있었던 것도 가난 탓이었다. 결국,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창신동에 어렵게 마련한 집도 소송으로 잃고 그의 가족은 전농동으로 옮겼다. 창신동 집은 헐벗은 가지의 겨울나무 풍경과 아기 업은 여인 등을 그려낸 ‘나무와 두 여인’(박완서 <나목>의 바탕이 된 작품), 아내를 모델로 한 ‘절구질하는 여인’, 따스한 햇볕 아래 골목길에 앉아 공기놀이하는 어린이들을 묘사한 ‘유동(遊童)’ 등이 만들어진 곳이었다.


1965년 4월 초, 그는 간경화증과 응혈증이 악화돼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회복이 어렵게 되자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박수근은 이튿날 새벽에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가난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했던 가장은 쉰한 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됐다. 가을, 14회 국전에 부인 김복순이 마지막으로 유작인 ‘유동’을 전시케 했고,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79점의 작품을 모은 추모 유작전이 열렸다.

▲ 2002년 개관한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박수근의 동상이 미술관을 바라보고 있다.

출처ⓒ한국관광공사

사후에야 예술이 제대로 평가받게 되는 예는 적지 않다. 박수근은 살아생전에도 작가적 역량을 평가받았지만 가난만큼은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 꾸준히 그의 유작전이 열리면서 그는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했다.

살아생전의 가난과 사후의 영광

1978년에는 그의 묘지에 묘화비(墓畵碑)를 세웠고 1980년에는 정부에서 고인에게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1990년에는 고향인 양구군 양구읍 비봉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2002년 10월에는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이 개관하면서 개관기념전 ‘박수근의 삶과 예술’이 열렸다.


2010년 5월, 박수근의 45주기를 맞아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국민화가 박수근’전이 갤러리현대에서 열렸다. ‘국민’은 아무 데나 붙이는 헌사가 아니다. 그래서 “이름 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박수근미술관)인 박수근에게 바쳐진 이 헌사는 그의 예술과 삶에 대한 최고의 경의가 됐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미술 경매사에 흔치 않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의 1950년대 말 작품인 ‘빨래터’는 2007년 45억 2,000만 원에 팔려 한국작가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또 1962년작 ‘나무와 두 여인’은 최소 145억 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수술 비용이 없어 백내장 수술을 미루다 한쪽 시력을 잃은 화가의 가난과 사후 그의 작품이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으로 거래되고 있는 현실은 슬픈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중학교부터 미술책에서 보아온 그의 ‘나무’, 나뭇잎이 떨어진 벌거벗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위대한 예술가의 고단했던 생애를 되돌아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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