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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앓던 중 ‘자식에 짐 되기 싫다’며 목숨 끊은 부부

‘부부가 함께 암에 걸려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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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4월 25일 작성된 글입니다.

▲ 해마다 고독사도 늘고 있다고 한다.

출처ⓒMBC <무연고사회> 화면 갈무리

많은 사람에게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되어 세상을 뜨는 게 인생이다. 자식이나 부모는 인간의 삶에서 대부분 거치게 되는 사회적 지위니 그게 대수로울 일은 없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니 그런 지위로 사는 일도 예사롭지 않아졌다.


“자식들 짐 되기 싫다”고 하며 말기 암을 앓고 있는 부부가 음독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암에 걸려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60을 갓 넘긴 아버지와 50대 중반의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기가 앓고 있는 병도 자식에게 짐이 된다고 여기는 이 오래된 부모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어쩐지 스산해지는 기분을 가눌 수 없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헌신해 온 어버이들이 졸지에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이제 부모는 자식들에게 부양비를 받기 위해서 법에 호소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떤 70대 어머니는 생활비를 주지 않는 40대 의사 아들을 상대로 부양비를 청구하는 소송을 벌여 ‘매달 50만 원 지급’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자식들과의 갈등으로 연락이 끊긴 아들에게 부양료를 청구한 60대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혼자 살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도움을 구하다 거절당하자 역시 법원에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들 일가의 가족 관계나 상황 등 저간의 사정이야 세세히 알 수 없다. 


‘가족을 외면해놓고 뒤늦게 부양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어긋나다’고 주장한 자녀들에게 법원은 ‘부모가 과거에 자녀 양육 의무를 이행했는지와 무관하게 혈연관계에 따라 부양의무가 형성된다’고 결정했다. 자녀들이 부모·자식 간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대변했다면 법원의 결정은 오래된 가족윤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세태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좀 착잡하다. 아직 미성년인 자식을 기르고 있는 젊은 부모들의 경우는 그나마 낫다. 이들은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부모·자식 간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비교적 냉정하고 실리적이다.

“자식들에게 죄다 재산을 물려주는 건 바보짓이야.”

“그럼. 물려받을 게 ‘부양’밖에 없는 부모란 ‘애물단지’밖에 더 되겠어?”

“결국, 나중에 애새끼들 기른다고 죽을 고생을 한 부모는 헛물만 켜는 거지 뭐.”

그러나 젊어서는 죽어라 일만 하며 간신히 아이들을 길렀지만, 노후 대책을 전혀 갖지 못해 자식들의 부양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많은 부모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이들은 결국 스스로 ‘자식들의 짐’이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의 과거는 자녀들의 현재를 있게 한 근원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식들을 길러낸 자신들의 헌신을 자녀들에 대한 권리로, 자녀에게 부양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 이해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부양을 요구하는 것도 당당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여전히 경제력이 있는 젊은 부모들일 뿐이다.

“바보같이 왜 자식들에게 당당하지 못해?”

“난 요구할 거야. 내가 너희를 기르는 데 든 비용만큼 너희가 갚아야 한다고. 그건 전적으로 부모의 권리라고.”

노후 얘기만 나오면 나 역시 우정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글쎄, 아이들에게 손을 벌리는 상황은 피해야겠지만 만약 피할 수 없다면 당당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반응에 주변의 가족 친지들은 정색을 하고 쥐어박았다.

“정말? 아나! 나중에 보태주려고 기나 쓰지 않으면 다행일걸.”

“요구해? 부족하니까 달라고? 그나마 애들이 잘살면 얘긴 되겠지. 그러나 저희들 사는 꼴도 시원찮을 땐 어쩔 거야. 안 쓰고 안 먹고 모아서 자식들에게 갖다주기 바쁠걸?”

별로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별로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자신의 앞날도 그렇지만 자식들의 미래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손을 벌려도 될 만큼 산다면 그것으로도 안심하는 게 부모일 터이고, 그 반대라면 여전히 노심초사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 존재가 부모 아닌가.

▲ 누구나 늙어가고, 어버이가 되는 게 인간의 삶이다.

출처ⓒMBC <무연고사회> 화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은 진부하지만, 부모·자식 간 사랑의 성격을 지적한 진실이다. 내리사랑은 ‘의무’가 아니지만, 치사랑은 흔히들 ‘의무’로 이해된다. 그것은 치사랑이 본능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 문제라는 뜻이다. 서글프지만 이 의무의 ‘이행 여부’가 효와 불효를 가르게 되는 게 현실이다.


반대로 예의 속담은 내리사랑이 본능의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그 맹목성을 확인해 준다. 자식의 부모 봉양에는 이유가 따른다. 부모고 길러 준 은혜에 대한 ‘갚음’이라는 이성적 이유 말고 거기 본능은 필수가 아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부모’, ‘자식’, 엇갈린 ‘지위’는 반복된다

이 눈먼 사랑은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자식이 부모가 되면서 다시 ‘내리사랑’의 형태로 재현된다. 동시에 ‘치사랑의 부재’는 현실적으로 그의 아픔이고 현실이 된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란 참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엇갈린 지위와 엇갈린 상황의 반복이 인간의 삶이다.


뉴스에 오른 이야기가 보편적 상황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걸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고 덮어둘 계제도 아니다.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가족과 부모 부양에 대한 이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부모 부양의무를 간단하게 버리는 자식과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양극단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2011년의 한국이다. 각종 매체가 다투어 이를 보도하고 개탄하고 가족윤리의 재정립과 파탄 난 도덕의 재무장을 강조하고 있지만 별로 마땅한 해답은 없어 보인다. 


자식의 부모 부양 거부든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부모의 극단적 선택이든 원인은 ‘가난’이고 경제적 문제다. 일방적으로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아무 마련도 없이 노년을 맞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정책과 같은 ‘사회 보장’이 긴요한 이유다. 


해마다 가족과 절연된 채 홀로 세상을 떠나는 ‘고독사’도 늘고 있다고 한다. 2010년 무연고 사망자는 757명이었다. 이들은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왕래가 없는 사람들이다. 양로원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부모 이야기는 더는 서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파트 마당을 서성이는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한다. 살아생전에 자식의 자리에서 어느덧 나는 그분들의 위치에 더 가까이 있다.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대중가요 ‘부모’를 들으면서 우리 시대, 부모의 길, 자식의 길을 다시 생각해 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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