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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 조선에서 '평등' 꿈꾼 동학 창시자의 씁쓸한 최후

조회수 2020. 4. 15.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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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죄목은 '세상을 어지럽힌 죄'였다.
▲ 수운 최제우가 참수된 옛 관덕정 터. 지금은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이들이 처형돼 순교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1864년 3월 10일 오후 2시, 대구 남문 밖 아미산 아래 관덕당 뜰에서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가 참수됐다. 죄목은 ‘사도난정’,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동학으로 바꾸고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힌 죄’였다.


1860년 4월 깨달음을 얻고 동학의 가르침을 시작한 뒤 불과 4년 만에 그는 불꽃 같은 삶을 형장에서 마감했다. 향년 40세. 1863년 12월에 체포돼 다리뼈가 부서지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뒤였다. 두 눈을 부릅뜬 그의 머리는 사흘 동안 대구 남문 밖 길가(오늘날 약전골목)에 내걸렸다. 


최제우는 경북 경주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성묵, 호는 수운·수운재로 썼다. 부친 최옥은 정통 유학의 학맥을 이어 영남에선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지만, 등과하지는 못했다. 최제우는 63세의 아버지와 30세의 과부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일찍부터 경사를 익혔으나 재가녀의 아들이라 문과엔 응시할 수 없었다. 신분 사회의 족쇄가 그를 옭아매자 그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다른 선택을 했다. 수운은 10년을 넘게 전국을 떠돌며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세상을 깨달으면서 그는 낡은 유교 신분체제의 억압과 차별을 넘어 모두가 평등한 새 세상을 여는 개벽을 꿈꿨다. 수운은 자신의 좌절을 넘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삶을 누리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대동 사회를 그렸다. 


1856년 여름 천성산으로 들어가 시작된 수운의 구도는 이듬해 적멸굴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 닦기로 이어졌다.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에서 그는 수련을 이어갔다. 


이 무렵 가세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고 국내 상황은 삼정의 문란 및 천재지변으로 크게 어지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유일한 희망을 걸고 그는 이름을 ‘제우’로 고치고 구도행을 이어갔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최제우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이른바 ‘천사문답’이라고 불리는 하느님과의 문답 끝에 1860년(철종 11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달은 것이다. 그 무렵 열강의 침략이 이어지는 등 민족적 위기의식이 높아져 가는 가운데 서학(천주교)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서학’에 대항한 민족 고유신앙 ‘동학’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우리 민족사에 응축된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는 <논학문>에서 동학의 도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 도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던 일이요, 지금도 비교하지 못하고 옛적에도 비교하지 못하는 법이라. 닦는 사람은 헛된 것 같지만 열매가 있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실지가 있는 것 같지만 헛된 것이라.”

최제우는 동학의 사상을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 가사로 된 <용담유사>, 두 책에 담았다. 동학은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 글과 노래, 부적, 주문 등 다양한 방법을 써 포교했다. 사대부 지식층에겐 한문으로, 농민과 부녀자 등에겐 한글로 동학을 가르친 것이다.


두 경전과 함께 통문과 부적, 21자로 된 한문 주문도 활용했다. <용담유사>엔 용담가, 교훈가, 안심가, 도수사, 권학가, 몽중노소문답가, 도덕가 같은 노래에 가르침을 담았으니 민중들에게 노래로 교리를 가르친 것은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 수운 최제우 동상. 왼쪽은 동학의 성지인 경주 용담정에 있고 오른쪽은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동상이다.

당연히 민중의 반응도 뜨거워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숱한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됐다.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동학이 주창하는 평등의 이념이었다. 동학은 인간 누구나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하면 군자가 될 수 있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평등의 믿음을 줬다.

‘나의 마음은 곧 네 마음이니라.’

‘한울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니라.’
▲ 동학의 한문 경전 <동경대전>

동학은, 인간은 하늘 즉 천주 앞에 모두 평등함을 역설했다. 최제우는 가정에서부터 평등을 실천할 것을 주문했다. 가부장의 기득권을 버리고 그는 부부 평등과 남녀평등을 몸소 실천했다. 데리고 있던 두 여종의 족쇄를 풀어 주면서 한 사람은 며느리로, 또 한 사람은 딸로 맞이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동학이 민중들에게 구원의 가르침으로 다가가자 1862년 9월, 최제우는 사술로 백성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 체포됐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가 석방을 청원해 무죄 방면됐다. 이 사건이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신도는 더욱 늘어났다.

부부평등과 남녀평등을 몸소 실천하다

그해 12월 각지에 접을 두고 접주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드는 등 교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교세는 경상도,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확대돼 1863년에는 교인이 3천여 명, 접소가 13개소에 이르렀다.


동학이 놀라운 기세로 세력을 얻게 되자 유림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유생들이 띄우는 통문을 통해 동학에 대한 폄훼가 서원을 통해 전파되면서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이 준비되고 있었다.

“동학은 귀천의 차등을 두지 않고 백정과 술장사들이 어울려 엷은 휘장을 치고 남녀가 뒤섞여 홀어미와 홀아비가 가까이하며 재물이 있든 없든 서로 돕기를 좋아하니 …… 이는 오랑캐들과 이 땅에서 섞여 살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

1863년 7월, 수운은 제자 최시형(1827~1898)을 북접 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해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이 주목하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11월 20일, 동학의 교세 확장을 두려워한 조정에서는 제자 20여 명과 함께 최제우를 경주에서 체포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수운은 이듬해 1월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됐다. 이곳에서 수운은 뼈가 부서지는 등의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날,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를 행하던 도시청이었던 관덕정에서 그는 마침내 순도했다.

▲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 이 문밖 서남쪽 200보 지점에 관덕정이 있었다.

관덕정은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문 밖 서남쪽 200보 지점에 있었다. 관덕정의 앞뜰은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이기도 했다. 이 관덕정에서 천주교인 24명이 처형되고 31명이 옥사했다. 서학 교도들이 순교한 곳에서 동학의 교조가 사도난정의 죄로 처형된 것이다. 대구 관덕정이 천주교와 동학(뒷날 천도교)의 성지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순도 후 30년, 갑오농민전쟁으로 불타오르다

▲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과 3대 교주 손병희

모두가 평등한 삶을 누리는 대동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갔던 혁명가 수운 최제우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수운이 본격적으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약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의 유산은 크고 무거웠다.


수운이 처형되고 나서 30년 뒤에 동학은 이 땅에 들불처럼 타올랐던 갑오농민전쟁(1894)으로 이어졌고, 동학군을 이끌고 항전을 계속하던 2대 교주 최시형도 4년 뒤에 처형(1898)됐다. 동학의 두 교주의 죄가 풀린 것은 1907년이 되어서였다. 동학은 1905년,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편되면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을 종지로 내세웠다. 


철학자 김용옥은 수운 최제우를 예수와 공자, 모하메드, 소크라테스, 싯다르타와 비긴다. 그것은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적 신앙인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불꽃 같은 삶에 올리는 최고, 최상의 헌사다. 

“기나긴 탐색 끝에 3년의 공생애를 살았다는 것은 예수와 비슷하고, 늙은 아버지와 젊은 엄마 밑에서 불우한 처지로 태어난 것은 공자와 비슷하며, 생애의 어느 시점에 어쩔 수 없는 운명적 힘에 의하여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무함마드와 비슷하며, 시대를 어지럽혔다는 사회적 죄목으로 참형을 받은 것은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고, 기존의 사유체계와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논리적 사고를 하였다는 측면에서는 싯다르타와 통한다.”

- 김용옥 역주, <도올 심득 동경대전1-플레타르키아의 신세계>(통나무, 2004)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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