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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에게 항의했다'며 상민 출신 의병장 처형한 의병진의 말로

조회수 2020. 3. 27. 14: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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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투쟁 중에도 신분 차별은 존재했다.

* 2018년 3월 27일 글을 재발행합니다.

▲ 청운면 갈운2리 하갈마을과 이웃한 갈운1리 아실마을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김백선의 묘소

평민 의병장 김백선 군율로 처형되다

1896년 3월 27일 호좌의진(호좌는 충남)의 선봉장 김백선(1849~1896) 장군이 군기 문란의 죄목으로 처형됐다. 3월 16일 그는 가흥(영주)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했다.


본진에 돌아온 김백선은 중군장 안승우(1865~1896)에게 칼을 뽑아 들고 요청한 원군을 보내지 않은 데 항의했다. 그러나 안승우는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뺄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호좌의진의 대장 유인석(1842~1915)은 대로했다.

“그대는 본시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어찌 분수를 모르는가? 여봐라! 저 자를 군령위반죄로 다스려서 포살하라!”

산포수들을 이끌고 충주성을 점령했던 호좌의진의 선봉장 김백선은 동료 의병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 처형됐다. 제천의병의 실질적인 전투력 자체였던 김백선은 자신이 이끈 산포수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일부 자료에서 참수형이라고 하지만 총살형이었다.) 향년 47세.


김백선은 경기도 지평(현 양평) 출신의 평민이다. 가난하고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이나 기개와 용력은 비상했다. 본명은 도제, 원래 산포수 출신이다. 갑오농민봉기(1894) 때 불량한 무리가 약탈을 자행하자 당시 지평 감역 맹영재와 함께 산포수들을 모아 이들을 소탕해 그 공적으로 절충장군의 첩지를 받았다. 


상민 출신의 포수로서는 정3품 절충장군이 된 것은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다. 그가 상민 출신으로 의병 지휘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신분의 변화 덕분이었다. 

출처: ⓒ제천의병전시관
▲ 을미사변 이후 곳곳에서 봉기한 의병이 을미의병이다. 초기 의병의 모습

이듬해인 1895년 겨울 명성황후가 참혹하게 살해된 을미사변이 터졌다. 비분강개한 김백선은 지평 현감으로 있던 맹영재를 찾아가 창의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산포수 출신의 평면의병장 김백선

“이런 흉변을 당한 때에 나라의 신민 된 자라면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살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죽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더구나 관아에 앉아 인부(印符)를 차고 있는 신하로서 위로는 군부(君父)가 욕보는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죽게 된 것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동비(東匪:동학교도를 빙자한 무뢰배)를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그대에게 무슨 영화가 되겠느냐?”

김백선은 지니고 있던 총을 부숴 관아 마당에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유생 이춘영(1869~1896)이 찾아와 의거를 제안하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김백선은 지평 관아에 소속된 포군(산포수로 구성된 부대) 400여 명을 모아 시국을 규탄하고 호소하니 모두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로에 세워진 지평의병 발상지 표석
▲ 양평군 지평면에 있는, 지평의병과 한국전쟁 중 지평리전투를 기리는 기념관

이춘영과 함께 김백선은 1896년 1월 이들 산포수를 거느리고 이웃 지방인 강원도 원주 안창리에서 거의했다. 맹영재의 방해를 피해 원주에서 거병한 이들을 ‘지평의병’이라 부른다. 이춘영과 같이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안승우와 평민들이 합류해 의병의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지평의병은 원주 관아를 점령한 데 이어 제천으로 진격했다. 1896년 2월 7일 영월에 머물고 있을 때 의암 유인석을 대장으로 옹립하면서 포수 중심의 지평의병과 유생 중심의 제천의병이 연합한 의병부대, 호좌의진이 탄생했다. 의진은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뒤에 중군장), 선봉장 김백선으로 구성됐다.

2월 11일 제천에 입성한 호좌의진은 단양과 청풍을 거쳐 2월 17일 충주성을 점령했다. 충주성 함락의 수훈 갑은 산포수로 구성된 선봉 부대를 지휘해 그날 새벽, 동문을 넘어 들어가 싸워서 성문을 연 김백선이었다. 의진은 충주관찰사를 처단했지만 2월 23일 수안보 전투에서 중군장 이춘영을 잃었다.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의진은 3월 5일 결국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퇴각해야 했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했다. 3월 18일부터 이틀간 의진 선봉장 김백선은 가흥(영주)과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진지 점령을 진행하던 중 중과부적으로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서 기지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으로서는 점령을 눈앞에 두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전투의 실패가 아쉬웠겠지만, 중군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는 안승우의 해명도 부득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칼을 뽑아 항명한 김백선에 대한 응징이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그의 상민 신분을 지적하면서 처형을 불사한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김백선의 처형으로 의진은 쇠락

김백선 처형은 당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천민 간의 신분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또한 지도부 양반 유생들의 사상적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결국 평민이자 포군 영수인 김백선이 처형된 후 제천의진 지도부인 양반 유생과 병사인 포군 간에는 불화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의 처형은 의병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포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호좌의진의 맹장 절충장군 김백선이 처형되자 그를 따르던 지평의 포수들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참여했던 포수들마저 군진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 양평군 양동면에 있는 양평 의병묘역의 을미의병 추모비. 의병장 묘소를 모아 성역화작업 중이다.

산포수들이 이탈해 버린 의진은 연전연패했다. 포수들은 이른바 ‘산포계’를 중심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조직력도 대단했고 화승총에 비겨 성능이 월등한 엽총을 가지고 있어 의진의 실질적 전투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천의병은 5월 25일 제천의 남산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패해 서행길을 택하게 됐다. 이후 의병은 단양·충주·원주·영월·춘천·양구 그리고 안변·영흥·맹산·덕천·운산을 거쳐 8월 24일 초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회인현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김백선에게는 1968년 대통령 표창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추서됐다. 대장 유인석에게 2등급의 대통령장이,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각각 독립장(3등급)이 추서된 것에 비기면 훈격이 인색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백선이 군율 위반으로 처형됐다는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말이다. 


김백선의 묘는 생가가 있던 청운면 갈운2리 하갈마을과 이웃한 갈운1리 아실마을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데 2008년 양평군에서 묘역을 정비했다. 김백선의 묘소 바로 옆에는 전장을 누빌 때 타던 애마인 천비마의 무덤이 있다. 한편, 양평군에서는 의병장들의 묘소를 모은 의병묘역을 조성해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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