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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전염병 옮기며 병사 수만 명 쓰러뜨린 '미생물'의 정체

조회수 2020. 3. 12.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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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 2016년 9월 13일 직썰에 게재된 글입니다.

전쟁과 위대한 왕의 운명 등 거시적인 사건에 집중하는 역사가는 몸니(머릿니와 다르게 몸에 사는 이)와 같이 아주 작고 짧은 삶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몸니(Pediculus Humanus Corporis)는 중세 유럽의 힘의 균형과 영국의 종교미래에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

로버트 훅의 마이크로그라피아에 그려진 이. 1655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현미경으로 관찰한 많은 생물과 무생물을 정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실제 그림은 크리스토퍼 렌이 그렸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오랜 원정기간 동안 개인위생은 도저히 신경쓸 수 없기 때문에, 전사가 남겨진 시간부터 병사와 몸니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인간숙주의 머리나 옷에 거처를 마련한 이는 하루에 몇 번씩 숙주에게 머리를 처박고 피를 빨았다. 생각만 해도 몸이 근질거리는 불쾌한 일인데, 이가 병을 숙주에게 옮기는 순간부터는 짜증을 넘어 전염병이라는 대재앙으로 발전한다. 전염병이 퍼지면서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데, 1528년에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1527년, 메디치 가문의 사생아 출신인 교황 클레멘스 3세는 로마의 한 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임했던 합스부르크 칼 5세가 이탈리아에 제국군을 파견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 끝에 지휘관 부르봉 공작 샤를이 5월 6일에 전사했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권을 다투던 때였고 클레멘스는 양쪽을 오가며 위험한 정치행보를 보였습니다. 프랑스를 지지했지만 프랑수아 1세가 1526년에 파비아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격을 맞이합니다.) 


대부분 용병으로 구성되었던 제국군은 굶주리고 급여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휘관마저 전사하자 규율은 완전히 무너졌고 8일 동안 광분한 독일과 스페인 병사가 신부를 죽이고 수녀는 강간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시민을 붙잡아 고문해서 귀중품을 빼았았다. (스페인은 철저한 카톨릭신자라 로마 약탈에서 이런 행동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스페인 군대의 용병이었던 스위스나 독일인이 저지른 만행이 아닐까 합니다.) 클레멘스와 추기경 일행은 비밀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빠져나가 12월 7일까지 카스텔 산탄젤로(로마)에 포로로 갇혀지냈다.

요하네스 링걸바하Johannes Lingelbach의 로마약탈 그림입니다. 적어도 100년 후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정확한 고증은 아닙니다.

제국군이 로마를 약탈하고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는 동안, 프랑스의 프랑수아Francis 1세는 복수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1525년 2월 23일, 파비아Pavia에서 스페인 화승총병에게 패배한 후에 1년 동안 스페인 감옥에서 지냈다. 막대한 몸값을 약속하고 풀려난 그는 말을 바꿔서 양도하기로 했던 영토를 포기하지 않았다. 말을 바꾸며 보복전을 위한 군대를 모으는 아버지때문에 인질로 잡혀있던 두 아들은 4년 동안 더 기다려야했다. 1527년 4월 30일, 프랑수아와 영국의 헨리 8세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서명하고 동맹을 맺었다 (미드 튜더스에 잘 재현되었습니다.) 프랑수아의 군대가 준비되자 두 왕은 1528년에 합스부르크 칼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파비아 전투 장면입니다. 베르나르드 반 오를리Bernard van Orley가 그 직후에 만든 것으로 벽걸이 직물입니다. 이 분의 네덜란드 원 발음은 상당히 어렵군요. 네덜란드도 스페인처럼 r을 상당히 굴립니다.

1528년 원정계절이 되자, 프랑스는 군대를 이탈리아 북부로 보내 다시 한 번 칼과 승부를 겨루기로 했다. 원정군 지휘관은 오데 드 푸아Odet de Foix로, 그는 1515년 밀란 부근의 마리냐노Mafignano에서 프랑수아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1522년 라 비코카La Bicocca 전투에서는 패전했다(당시 용병 지휘관의 진영 바꾸기는 일반적이었고 포로가 되어도 대부분 처벌받지 않고 고용되었습니다.) 오데도 파비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으며 여동생이 프랑수아의 정부 중 한 명이었다.


원정 초반, 프랑스군은 파비아(아래 지도참조)를 점령하고 약탈해서 이전의 복수극을 펼쳤다. 프랑스군은 로마를 향해 남진하자, 제국군은 약탈과 공포로 참담했던 8개월의 점령을 끝내고 물러갔다.

10만 구가 넘는 시체가 가매장되었고 티베르강 부근에서는 2천 구의 시체가 썩어갔다. 제국군은 도시를 빠져나가며 3~4백만 두카트(19세기 초까지 통용되었던 유럽의 공용금화)를 가져갔다. 그 뒤에는 기아, 시체, 전염병이 남았다.


제국군은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자 나폴리에 몰려들었고 오데는 도시를 포위했다. 유럽인은 제국군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16세기 당시의 여론은 프랑스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오데는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구원자로 칭송받았다.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 제독은 함대를 보내 나폴리의 배후를 끊었다. 


클레멘스 교황은 풀려났지만 오데가 나폴리를 점령해야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제국군은 몇 주 동안 나폴리 성벽 뒤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제노바 함대의 도움을 받아 나폴리 제국군이 굶주려 항복을 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시간만 보내면 제국군 스스로 성문을 열고, 프랑스군은 파비아의 참패를 되갚고 이탈리아는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것처럼 보이던 순간에 Pediculus Humanus Corporis 대군이 프랑스군을 덮쳤다. 프랑스군이 북부에 진입하면서 옷 속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몸니는 병사의 모직군복 안에서 숙주의 피를 빨며 기하급수적으로 수를 늘려갔다. 


원정 때마다 있던 일이라 반갑지는 않지만 예상했던 동거 생물 중 하나가 리케차Rickettsia에 감염되어 있었다(리케차는 곤충 세노 내에 살며 발진티푸스나 쓰쓰가무시 병을 일으킵니다.) 가려움을 느낀 병사가 몸을 심하게 긁으면 이의 분비물이나 죽은 이의 바이러스가 상처난 피부 틈을 통해 혈관까지 들어갔다. 이에게 물린 병사는 며칠에서 몇 주 만에 오한과 심한 두통을 겪었고 몸살증세도 뒤따랐다. 병사는 심한 피로를 느끼고 볏집침대에 누웠고 고열에 시달렸다. 몸에서 시작된 발진은 팔다리로 번졌다. 괴저로 손발가락이 검게 변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치료법이 없어서 대부분의 병자가 죽어갔다. 운좋게 살아나도 몇 주 동안은 그대로 누워지내야 했다. 


중세의료 수준의 외과의사는 병자의 피를 뽑거나 독성물질로 내장을 소독하는 방법을 사용했고 오히려 병자의 신장기능을 악화시키거나 쇼크로 더 빨리 죽게했다. 치료법은 고사하고 원인조차 몰랐던 의사도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 나폴리 성벽 밖에서는 7월과 8월 내내 티푸스 전염병이 창궐했지만, 어이없게도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고립된 제국군은 대재앙에서 보호받았다. 몸니는 1~3주 안에 모두 죽지만 그 동안 충분히 많은 병사에게 병을 퍼트릴 수 있었다. 깨끗한 이가 병자를 물면서 감염되었고 다시 건강한 병사에게 병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안드레아 도리아는 보수문제로 프랑수아 지지를 풀고 나폴리에서 함대를 불러들였다. 제노바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군대로 유명했기 때문에 교황을 지지하다가 바로 다음 날에는 칼 황제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제 이탈리아에는 병든 프랑스군만 남았다. 오데도 8월에 병석에 누웠다. 그는 전염병으로 병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지만, 8월 15일에 죽으면서 다행스럽게도(?) 최후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 8월 29일이 되자, 25,000명이었던 원정군은 4,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신세가 뒤바뀐 프랑스군이 달아나자 나폴리의 제국군 기병이 출격해서 대부분을 죽였다. 


다시 이탈리아로 장악한 제국군은 클레멘스 교황을 위협했는데,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나타났다. 당시 37살이었던 헨리 8세는 여왕이었던 아라곤의 카서린Catherine와 이혼을 결정했다. 6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중에 한 명의 공주가 살아있는데도 진정한 결혼은 아니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영국에서 절대왕권을 누렸던 몇 명 안되는 군주 중의 하나인 헨리 8세입니다. 미드 튜더스에서 잘 표현되었듯이 6번의 결혼을 했으며 그 중에 2명의 왕비를 처형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국력으로 보면 겁없는 행동을 자주 벌였지만 역시 운좋게 유럽대륙의 복잡한 정치상황으로 보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혼문제때문에 종교개혁의 길을 여는 좀 황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튜더스에서는 버릇없는 재벌2세의 모습으로 그려져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그는 23살 앤 불린을 원했는데, 앤은 현명하게도 여왕에 오를 때까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이 달은 헨리는 교황이 이혼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고 재상인 추기경 토마스 울시에게 해결을 맡겼다. 그렇지만 그가 버리려던 부인은 스페인 페르디난드와 이사베야의 딸이었고 언니인 후아나 라 로카는 칼 황제의 어머니였다. (캐서린의 시녀출신으로 여주인을 몰아낸 앤 불린도 결혼 3년 만에 처형당했고 헨리는 불과 11일 만에 앤 블린의 시녀 제인 시무어와 결혼했습니다. 후아나 라 로카는 미친 후아나라는 뜻으로 남편에게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고 자신도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붙은 별칭입니다.)


1527년 당시의 교황은 이미 제국군의 위협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혼을 승인할 처지가 아니었다. 프랑스군이 연달아 패배하면서 토마스 울시 추기경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1528년 초가을, 프랑스에 이어 영국에도 나폴리의 프랑스 군 전멸소식이 전해졌다. 칼 황제는 이탈리아의 변함없는 군주였고 프랑수아와 클레멘스는 평화협상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프랑수아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포기했고 교황은 당연히 칼의 이모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울시는 왕의 분노를 샀고 1529년 요크 주교직을 내놓은데 이어 1530년에는 반역죄까지 뒤집어 썼다. 런던탑으로 향하던 중에 병사한 덕분에 망나니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다.


외부에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 헨리는 알아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는 캐서린과 이혼하면서 로마교회와도 결별했다. 그리고 영국교회를 받아들이면서 영국의 신교화로 향하는 기초를 놓았다.


헨리와 1533년에 결혼한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고 3년 만에 처형장으로 향했다. 카톨릭이나 든든한 배경도 없는 그녀와는 아주 쉽게 이혼했다. 프랑스는 1530년에 두 왕자의 몸값을 치뤘고, 프랑수아와 칼 황제는 향후 20년 동안 간헐적인 전쟁을 벌이며 유럽판도를 놓고 다투었다. 1547년에 프랑수아가 죽으면서 앙리 2세가 프랑스 왕이 되었고 같은 해에 헨리 8세도 세상을 떠났다.


16세기 유럽정치 지각은 티푸스 발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전사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1812년, 나폴레옹의 대육군이 벌인 모스크바 원정에서도 전사자의 절반 정도가 티푸스로 죽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의 혁명시기에, 러시아는 3천 만 명이 티푸스에 걸린 것으로 추산되며 1918~1922년에만 3백 만 명이 죽었다.


1816년과 1819년에 티푸스가 영국해군을 위협하자, 레몬과 라임으로 괴혈병을 막았던 제인스 린드James Lind의 충고에 따라 선원을 정기적으로 발가벗겨 씻기고 털을 민다음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린드 자신도 티푸스의 원인을 알지 못했지만 그이 충고는 큰 효과를 거뒀다. 티푸스의 원인 박테리아는 1900년대 초반에 리켓츠와 스타니슬라우스 프로바제크가 발견했지만, 두 사람도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티푸스로 죽었다.


1943년 획기적인 방지법인 DDT가 사용되면서 티푸스 발병은 급감했다. 최근에는 더 효과적인 항생물질이 사용되고 있다. 프랑수아 1세, 칼 5세, 클레멘스 7세, 헨리 8세가 많은 병사를 동원해 각축을 벌이던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수만 명의 병사를 쓰러트리는 사실을 몰랐고 역사는 그들이 생각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외부 필진 우에스기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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