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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립운동가'가 해방 후 64년간 국적이 없었던 이유

1936년 오늘, 단재 신채호 뤼순감옥에서 순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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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21일 직썰에 게재된 글을 재발행합니다.

▲ 10여 세에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을 만큼 문재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단재 신채호의 필체

단재 신채호 뤼순감옥에서 순국하다

1936년 2월 21일 단재 신채호(1880~1936)가 뤼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쓰러진 지 사흘 만에 눈을 감았다. 그는 1928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 국제 위폐 사건에 연루돼 타이완 지룽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193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에서 6년째 복역 중이었다. 향년 56세.


고대사의 정통이 단군에서 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된다고 주장하며 신라 중심의 <삼국사기>를 배척하고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평가했던 역사가, 의열단에 가입해 무장투쟁을 주장한 아나키스트, 그러나 무려 60년 넘게 무국적자 남아 있었던 사람, 신채호는 그렇게 외곬의 삶을 마감했다. 선배 아나키스트 이회영(1867~1932)이 같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4년 만이었다. 


신채호는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충북 청원에서 성장했다. 호는 일편단생·단생 혹은 단재.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 여러 가지 필명으로 글을 썼고 유맹원이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워 10여 세에 <통감>과 <사서삼경>을 읽을 만큼 문재가 예사롭지 않았다. 열여덟에 성균관에 입교(1898)했고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 강사로 신규식 등과 함께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논설과 시론으로 시대와 맞서다

1905년 2월 26세 되던 해에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1864~1921)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돼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돼 시론과 사론으로 제국의 황혼과 시대 상황에 맞섰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한국자치제의 약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의 논설을 썼다. 그리고 독사신론·이순신전·을지문덕전 등의 역사 관계 논문과 역사 전기 소설을 연재했다. 


그 밖에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을지문덕전>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했고 가정잡지의 발행에도 관여했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를 고쳐 최남선이 발행하던, <소년(少年)> 지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 단재의 역저 <조선상고사>

독사신론은 민족주의 사관에 근거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단재는 이 글을 통해 민족의 흥망을 연구함으로써 민족정신을 담은 역사를 만들어가야 함을 역설했다.


이 무렵 발표한 글에서 이미 신채호는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순신전 등의 역사 전기 소설은 당시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이동녕·이회영·이동휘·안창호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고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13년 북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가 동제사에서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박은식·정인보·조소앙 등과 박달학원을 세웠다. 이 학원은 중국과 구미 각급 학교에 유학시킬 청년들의 유학 예비교육을 위해 프랑스 조계 안에 설립한 기관이었다. 


이듬해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에 가서 동창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했다. 이 시기에 백두산을 오르고 광개토대왕릉을 답사하는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봤는데 이는 그가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 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혁명을 주창한 아나키스트

1919년 단재는 베이징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다. 그해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충북)으로 선출됐다. 그해 7월 전원위원회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됐으나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해 사임했다.


한편, 단재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 주필이 돼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했다. 특히, 신채호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비판하며 특히 그의 위임통치 청원은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해 마지않았다.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했는데 그의 혁명 노선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이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1923)이다. 이 무렵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유자명(1894~1985)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문한 신채호는 이 선언에서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등 무정부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이족(異族)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를 파괴함이니라.”

-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해 싸웠던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

신채호는 1922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정을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창조파로 활약했지만, 임정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개조파와 대립하면서 회의는 결렬됐다. 이에 북경으로 돌아온 단재는 암자에 머물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면서 1924년경부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평론과 논문들을 발표했다.


신채호가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한 것은 1925년이었다. 그는 1928년에 발표한 <용과 용의 대격전>, <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1928년 4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했는데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신채호는 한 달 뒤 잡지발행 자금을 조달하고자 위조화폐를 가지러 타이완의 지룽 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돼 다롄으로 압송됐다.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단재는 1930년 5월 다롄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됐다. 1935년 건강이 매우 악화해 형무소 당국은 “보호자가 있으면 출소시키겠다”라고 했으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신채호는 가석방을 거절했다. 


1936년 2월 18일 단재 신채호는 만주국 펑톈성 다롄부 뤼순감옥 독방에서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서울의 가족, 박자혜(1895~1943) 여사와 두 아들이 뤼순감옥으로부터 ‘신채호 뇌일혈, 의식 불명, 생명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은 것도 같은 날이었다. 서둘러 지인의 도움으로 박자혜 여사와 장남 수범은 뤼순으로 떠났다. 이들은 21일 면회를 신청해 의식이 없는 단재를 1시간가량 면회했다.

“정 어렵거든 아이들은 고아원에 보내시오.”

단재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유학 중이던 28세의 박자혜와 혼인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러나 부부가 같이 산 것은 세 해 남짓, 단재가 처자를 고국으로 돌려보낸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 뤼순감옥에서 단재는 일경의 횡포로 가족이 어렵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건강하게 잘 있으니 내 걱정은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늘 당신이 걱정인데, 정 어렵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

유족들은 23일에야 단재의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할 수 있었다. 1910년 망국을 앞두고 압록강을 건너 망명했던 단재는 26년 만에 유골이 돼 그 철교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복 헌병이 유골을 뒤적이는 수모까지 겪으면서 돌아왔지만 유족은 장례 절차를 진행할 수 없었다.


1910년에 망명한 단재에게 1912년 시행된 조선민사령에 따른 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재는 일제 강점 이후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면장인 종친의 주선으로 ‘공개적 암장’으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이 종친은 이 일로 결국 파면됐다.) 몇 해 뒤에 만해 한용운과 위창 오세창이 단재의 비석을 지었지만 일제의 감시로 이 빗돌은 오래도록 세워지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벗이며 동지였던 벽초 홍명희가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살아서도 사람, 죽어서도 사람이다”라고 탄식했던 단재는 충북 청주시 고드미 마을 상당산 기슭에 묻혔다. 중국 망명 시절에 베이징에서 단재를 따랐던 작가 심훈(1901~1936)은 단재의 순국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에게 위로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수범아, 나는 오늘 신문을 보고서야 네 이름을 알았다. 네 나이 어느덧 열여섯이니 지각이 날 때가 되었구나. 수범아 너무 서러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뼈와 핏속에 너의 어르신네의 재(才)와 절(節)이 섞였을 것을 믿는다!”

단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1991년 대전광역시의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된 중구 어남동의 생가를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이듬해 복원하고 주변에 동상을 세웠다. 단재가 자랐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사당(1978)과 기념관(2003)도 건립됐다.

▲ 1991년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를 지정된 단재의 생가. 시내 중구 어남동에 있다.

▲ 대전시 중구 어남동의 단재 생가를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이듬해 복원하고 주변에 동상을 세웠다.

▲ 2003년 단재가 자랐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세워진 단재기념관

▲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의 단재 사당. 1978년에 세웠다.

▲ 벽초 홍명희가 “살아서도 사람, 죽어서도 사람”이었다고 한 단재 신채호의 묘소

단재 사후 유족들은 힘들게 살았다. 부인이자 독립운동가(1990 건국훈장 애족장) 박자혜는 둘째를 임신한 채 귀국했지만 총독부는 그가 산파로 일하는 것마저 방해했다.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죽었고 이듬해 박자혜도 병사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람”이었다는 단재, 무국적자 64년

해방된 뒤에도 유족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임정 수립 때부터 단재와 대립했던 이승만은 단재 유족을 홀대했고 단재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무국적 상태로 64년을 지냈다. 살아생전의 시부를 뵌 적도 없는 며느리의 노력 끝에 단재가 국적을 회복한 것은 2009년이었다. 


2009년 1차로 예순두 분의 독립운동가가 국적을 회복했지만 사실상 무국적인 독립유공자는 6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을 위해 이국을 떠돌며 싸웠던 투사들은 일제 강점기의 두 배에 가까운 세월을 국적 없는 고혼으로 사는 것이다. 


그게 이 나라가, 혹은 우리 사회가 독립지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면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다. 친일파와 독립투사의 3대를 비교하는 역설 앞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대통령이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 사라지게 하겠다”라며 보훈 정책을 제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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