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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에 앞서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 올랐던 이 사람

1989년 오늘, 함석헌 선생 영면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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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3일 을 재발행합니다.

▲ 1989년 2월 8일 오산학교에서 오산학교장으로 치러진 함석헌 선생의 영결식 풍경

바보새 함석헌 온 곳으로 돌아가다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서울대학병원 12층 병실에서 2년 전 췌장, 담낭, 십이지장의 종양 절제 수술 뒤 오랜 시간 투병해 온 ‘바보새’ 함석헌(1901∼1989)이 88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나흘 후 2천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거행됐고 유해는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마차산 자락에 묻혔다.


함석헌은 평안북도 용천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덕일학교를 거쳐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육촌형 함석은의 지도를 받아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눠주며 시위를 독려했다. 


이 3·1운동 참여 경험은 그의 삶의 전기가 됐던바 그는 3·1운동이 없었다면 자신이 “의사가 됐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 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유영모 만나 '생각하는 사람' 되다

2년을 쉰 함석헌은 1921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오산학교에서 안창호·이승훈·조만식에게 배우며 그는 민족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특히, 여기서 다석 유영모(1890~1981)를 만나는데 그는 뒷날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했고 이듬해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문하생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류석동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했다. 


무교회주의는 성서 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기독교 사상으로 무교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전통이 아니라 성서라는 복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함석헌은 무교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동시에 우치무라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됐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해 모교의 교사로 역사와 수신을 가르치면서 이듬해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해 이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이 책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1934.2.-1935.12.)를 연재하면서 일제의 식민사관을 넘어 자신의 역사관을 정립하게 된다. 

▲ 성서 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무교회주의에 입각해 발간한 잡지 <성서조선>

만주사변(1937)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학교에서도 일본어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이듬해 함석헌은 오산학교를 떠났다. 1940년에 그는 평양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해 경영하기 시작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 역사관 정립

이때, 송산학원의 전 주인인 김두혁이 항일운동으로 검거된 ‘계우회 사건(1940)’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2년에는 <성서조선> 필화사건(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조선을 개구리에 빗대었다며 <성서조선> 폐간하고 독자들을 검거한 사건)에 연루돼 다시 1년간 미결수로 서대문경찰서에서 복역했다.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해방을 맞이한 함석헌은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돼 50일간 구금됐다. 1947년 3월 함석헌은 월남해 YMCA에서 성서 강의를 계속하면서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 중에도 계속됐는데 함석헌은 1956년부터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1958년 <사상계>에 기고한, 자유당 독재를 통렬히 비판하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지만 곧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함석헌은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사상계> 1961.7.)로 군사혁명 정권에 도전했다. 1962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퀘이커(Quaker)교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그는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을 부당성을 정면으로 지적하는 대중강연회를 잇달아 열었고 신문과 잡지 등에 이러한 뜻을 드러내는 글을 연속 기고했다. 함석헌은 언론수호대책위원회와 3선개헌 반대 투쟁위원회, 민주 수호 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했다. 

▲ 1970년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였고 지금도 간행되고 있다.

▲ 3.1민주구국선언사건(1976)과 관련해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함석헌과 민주인사들

출처ⓒ함석헌기념사업회

▲ 명동 위장결혼 사건 관련자 첫 공판장에 출두한 함석헌 선생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석헌은 1970년 <씨알의 소리> 창간과 함께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이 잡지는 정권의 탄압에 따라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게 됐다. 그는 정치인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해 공동의장으로 활동했다. 

폭력 거부, 권위에 저항, 진리 추구로 일관한 삶

1979년 박정희가 비명에 죽으며 유신정권이 막을 내렸지만 뒤이은 신군부 정권의 계엄령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함석헌은 즉각 투옥됐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면서 문필생활을 중단하게 됐다. <씨알의 소리>는 폐간된 지 8년 만에 1988년 12월 정기간행물로 복간됐다. 


1985년 8월 함석헌은 미국을 방문해 퀘이커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에 참석하고 캐나다를 방문했다. 이 해에 미국퀘이커봉사회에서 후보로 추천(1979)된 데 이어 두 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03

▲ 2015년 도봉구에서 함석헌의 자택을 보존, 개축해 '함석헌기념관'으로 재건립했다.

그러나 일평생을 폭력을 거부하며 권위에 저항하면서 진리를 탐구해 온 기독교 문필가이자 민중운동가인 함석헌의 몸 안에는 병마가 자라고 있었다. 1987년 수술 이후 1년 만에 그는 다시 입원해야 했고 마침내 즐겨 고난과 싸워온 일생을 마감했다.


함석헌은 2002. 8. 15 독립 유공자로 선정돼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 10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2015년에는 도봉구에서 쌍문동 자택을 보존, 개축해 ‘함석헌기념관’으로 재건립했다.  


어쩐 일인지 나는 살아생전에 함석헌 선생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가 떠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만 해도 이미 그의 시대는 아니었다. 이후, 우리 사회는 그가 치열하게 살았던 시대에서 너무 멀리 왔고 무엇이 이 시대의 문제인지도 가늠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던져져 있다.  


그가 1947년에 썼다는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를 읽으며 함석헌과 그의 시대를 돌아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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