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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헬조선을 만든 그때 그 사건

"뭐 이게 대사건이라고? 오바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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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 8일 을 재발행합니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최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말이 탐탁지 않다. 묘청은 조선의 밀레니엄적 인물이 되기엔 좀 자잘한 사람인 데다 묘청의 난이란 원대한 포부와 비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서경파와 개경파의 권력 다툼이 격화됐을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군가 네가 생각하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사건이 무엇이냐 물어온다면 대답하기 난감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50년래 역사를 바꾼 사건 하나를 들라면 기탄없이 이 사건을 들 것이다. 1949년 6월 6일. 대한민국 국립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다.


*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


이날 오전 8시 30분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지휘 하의 경찰관 80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기습했다. 친일 경찰 일색이었던 국립 경찰은 노덕술 등 친일 경관들이 반민특위의 표적이 되자 이를 극도로 경계했다. 때마침 반민특위의 활동이 눈엣가시였던 이승만은 기꺼이 그들의 뒷배가 되어 주었다.

반민특위의 반민족행위자 검거 모습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을 해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해왔던 차다. 김병로 대법원장으로부터 "아무 문제 없음"이라는 핀잔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그러나 친일경찰 노덕술의 경우엔 숫제 "정부가 보증하고 그를 풀어 주라"고 지시한다. 당시 상황은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 지시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거기에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 지지를 보내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연속부절로 쇠고랑을 차는 상황에 이른다. 경찰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글자 그대로 뒤집어엎었다. 저항하는 수사관들의 무기를 압수하고 서류를 파손했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에게 했던 것처럼 반민특위 관계자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실질적인 물리력의 박탈이었고 특위 활동의 목을 죄어 붙인 만행이었다. 반민특위는 이날 이후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건 며칠 뒤 이승만은 AP 통신 앞에서 자랑스레 떠벌였다.

"내가 특경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며칠 뒤 국회 프락치 사건이 본격화되면서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된다. 모두 반민특위 활동을 했거나 그에 호의적인 인사들이었다. 또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다. 후로 반민특위 위원이 다시 선출되긴 했지만, 이미 예봉은 꺾인 차였다.


반민특위 위원 중 한 사람이자 시인 조지훈의 부친이었던 조헌영은 “현 정부는 민족반역자들에게 정부를 갖게 하고 친일 반역자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산당의 앞잡이, 민족분열을 일으키는 악질 도배로 몰아감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메아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결국 1949년 10월에 해체된다. 그 6개월 뒤에는 한국사를 송두리째 나락으로 던져 버린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1951년 2월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마저 폐지돼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들의 죄상은 역사의 미로 속으로 꼬리를 감춘다. 이 흐지부지는 너무나도 극명한 과오로 남아 지금껏 우리 목에 무거운 칼이 되고 차꼬가 됐다. 결국, 우리 역사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파들은 대대로 흥하는” 사필귀정 아닌 사필귀사(詐)의 나라가 됐다. 이러니 어찌 이를 ‘대한민국 50년래 최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비슷한 몰골을 무려 70여 년 뒤에 다시 본다. 어이없어 코웃음을 치지만, 그 웃음 뒤에는 비명 같은 탄식이 올라온다. 2년 전 수백 명의 목숨을 삼킨 세월호 참사의 정확한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자는 특별조사위원회가 정부의 비협조 속에 종료를 ‘당했다’. 야당 의원에게 “대통령의 7시간만 묻지 않으면 특조위 활동을 연장해 주마”라고 했다고 하니 급박하게 종료해야 할 사유도 없었음인데 그냥 흐지부지 덮겠다는 것이다. 36년 피맺힌 역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경찰을 반민특위 사무실에 들이밀었던 이승만처럼, 이 빌어먹을 정부는 세금이 아깝다며 특조위를 무력화시켰다.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 예산은 400억이지만, 세월호 특조위는 그 반도 안 된다.

언제부턴가 오징어가 돼 가는 기분이다.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쓸려가는 것이야 잘하지만, 다리는 열 개나 되는데 뼈대 하나 없어 서지도 못하는 오징어 같은 인간. 세월호 특조위 해산을 반대하며 민변 변호사들이 릴레이 단식을 벌이고 있다는 뉴스에 접한다. 아마도 그 첫머리에서 배를 곯았을 중년 공룡 둘리 변호사 선배를 생각하면 가슴 한 편이 아프다가도 “참 이걸 어떡하나” 쓴웃음 한 번 흘리고 내일 일거리와 술자리를 가늠하고 있다. 나의 뼈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터 오징어가 됐는가.


반민특위 해산은 향후 대한민국 70년 여정의 갈림길이었다. 이 길이 아닌갑다 돌아 나올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우리 역사는 반민특위의 깃발과는 다른 노선을 택했고 그 분주한 발걸음은 오늘의 헬조선으로 귀결됐다. 식민지 겪고 해방 4년 만에 독립운동가 고문하던 경찰이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두들겨 패고, 고문하고, 잡아 족치던 세월은 끔찍할 만큼 끈질기게 우리 등허리에 달라붙어 있다. 세월호 특조위 해산은 다를 것인가? 아마도 우리 후손들은 역사책을 읽다가 책장을 찢으며 오늘의 우리를 향해 분노할 것이다. “에라이 나무로 깎은 등신 같은 조상 같으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다 이때 이 빙충이들 때문이야. 사람이 수백 명 죽은 참사를 조사도, 규명도 못하고 세금 아깝다고 날려 버리는 따라지들이 어디 있나.” 그리고 좀 점잖은 사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세월호 특조위 해산은 대한민국 1백 년래 최대 사건이었다”라고.


혹자들을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오버하지 말라고. 근데 말이다. 반민특위가 박살 날 때 그걸 지켜보며 혀를 차다가 술 먹으러 간 사람도 그랬을 거다.

"뭐 이게 대사건이라고? 오버하지 마라."

* 외부 필진 김형민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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