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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잘 안 쓰지만, 한때 50평 집값 웃돌던 '이 물건'

조회수 2020. 1. 29.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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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 영화 <접속>(1997, 명필름)의 스틸 컷

상대방과 대화 메시지를 ‘전자적’으로 전달하는 도구인 전화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을 극복하게 한, 인류의 혁명적 발명품이었다.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일상의 안부부터 중요한 의견까지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발명품이 인간의 일상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전화, 인류의 혁명적 발명품

1876년 미국의 그레이엄 벨(Bell)이 발명한 전화가 한반도에 상륙한 것은 1896년 왕실 업무를 총괄한 관청인 궁내부에 자석식 교환기가 설치되면서였다. 황제와 통화하기 전 신하들은,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왕의 목소리 앞에 예를 갖추어 4번 큰절을 했다고 한다.


일반인도 전화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1902년이 지나서였다. 강제병합 후 일반 가정에도 전화가 보급되고 공중전화도 설치됐지만, 당시 전화는 상당한 고가여서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 내는 낯선 통신수단이었다. 전화는 관청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본인과 소수 부유층의 몫이어서 그 소유자의 권력과 재력을 드러내는 표지 구실을 했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자 전국에 있는 헌병대, 경찰서에 이른바 ‘경비 전화’를 설치했다. 감시와 통제를 목적으로 한, 이 전화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촘촘히 퍼져나갔지만, 정작 한국인은 1941년, 전체 가입자의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화가입자 수는 증감을 거듭했지만, 1970년대까지 전화는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사치품이어서 그걸 갖춘 집은 한 동네에 겨우 한두 집뿐이었다. 1960년의 전화 보급률은 0.3%로 천 명 중 단 3명이 전화를 소유했고, 1970년 당시 전화를 들이는 비용은 50평 집값을 웃돌았다. 


날로 늘어나는 전화 수요에 회선의 증설은 더디기만 해 전화를 놓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전화청약과 관련된 부조리가 만연하자 정부는 사고 팔 수 있던 전화가입권을 신규 설치 전화부터는 양도할 수 없게 했다. 이후 이미 설치돼 매매가 가능한 전화는 ‘백색전화’, 매매할 수 없는 신규 전화는 ‘청색전화’로 불리었다.

사고파는 ‘백색전화’도 있었다

급등한 백색전화의 몸값은 당시 승용차 한 대 값과 맞먹었는데, 당시 일간지들은 주식시세표처럼 전화 시세표를 지면에 게재할 정도였다. 대구에서 섬유 공장을 운영하던 매형의 전화도 백색이었는데, 갓 고교를 졸업한 나는 검정 전화기를 보고 왜 백색이라고 하는지 잘 몰랐었다.


고향 집에 도회에서 쓰는 자동 아닌 ‘수동식 전화’가 들어온 것은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을 들인 이삼 년 후인 1970년대 후반이었다. 몸통에 달린 손잡이로 발전기를 돌려서 교환원을 부르는 ‘자석식’ 전화기였다. 두 자릿수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교환원이 연결해줬는데, 젊은 여성이 듣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고 통화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원을 부를 때마다 송수화기를 따로 쓰던 일제강점기 시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멀쩡한 다이얼 전화가 나오는 시대에 손잡이를 돌려야만 교환원을 부르는 퇴행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유선전화기는 자석식에서 수동식, 자동식으로 거듭 진화해 왔다.

전화의 보급은 사람들의 일상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른바 ‘지급’한 일을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발명’이 모두 그랬듯 전화가 집집이 놓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1960년대 후반에 내가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 우리 반 65명 가운데 전화가 있는 집은 불과 서너 집에 불과했다. 학년 초, 학급의 비상 연락망을 짜면서 우리는 전화번호가 아니라, 전해야 할 급우 집의 위치를 알아둬야 했다. 


20세기 벽두에 전화가 보급됐다고는 하지만, ‘부친위독 급래’와 같은 화급한 소식을 전보를 이용해 전한 데서 보듯, 그 ‘문명의 이기’는 대중의 삶과 아직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전보를 치기 위해서 우체국에 가야만 했던 시절은 꽤 오래 이어졌다. 


1970년대 연애 시절, 나는 아내에게 편지 쓰기엔 시간이 촉박하면 늘 전보를 쳤다. ‘아무 날 아무 시 어디’라는 짤막한 전보는 일방적 통보였지만, 우리는 24시간 뒤쯤에는 약속 장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전보가 젊은 연인들의 만남을 이어주는 구실을 톡톡히 한 것이다. 


전화청약 적체가 해소되고 그 설치 비용이 떨어진 것은 전자교환기가 도입된 1980년대 초였다. 1984년 서울 전화는 200만대를 돌파했고 가정보급률은 72%로 올라섰다. 전국 장거리 자동전화(DDD) 체제도 완성된 것도 같은 해였다.

마침내 ‘1가구 1전화’ 시대가 왔건만

그러나 여전히 전화는 귀해서, 전화를 들여놓은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오는 급한 연락 때문에 한밤중에서도 전화를 바꿔줘야 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편의를 봐주는 정도의 인정은 살아 있었다.


고향에도 수화기만 들면 교환원이 나오는 ‘공전식’을 거쳐 자동전화기가 들어왔다. 내가 내 명의의 전화를 넣은 게 시골 여학교에 임용된 1984년 가을이었다. 전화 신규가입자는 통신 시설 확장에 쓰이는 자금을 조달에 쓰이는 전신전화 채권을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채권을 사서 바로 업자에게 파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여 한자리 국번의 전화를 들였다. 


1980년대 전화의 수요와 공급은 ‘정보통신혁명’으로 불릴 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나 6, 70년대 사치품이었던 전화는 대중적 통신매체로 자리 잡았다. 가물에 콩 나듯 보이던 공중전화가 급격하게 늘어나서 역이나 버스정류장 같은 데에는 어디 없이 일렬횡대로 죽 늘어선 공중전화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방에도 공중전화가 들어오면서, 오는 연락은 다방 전화기로 받아도 거는 것은 공중전화를 쓰는 식의 정리가 이뤄졌다. 전국 장거리 자동전화 체제가 이루어져 업소나 사무실 등에 시외전화를 걸 수 없도록 다이얼의 영(0) 자리에 자물쇠가 채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전화 요금이 꽤 비싸 ‘용건만 간단히’가 미덕이었을 만큼, 인심도 넉넉하지 못했던 때였다.

전화를 걸려고 동전을 바꿨네. 종일토록 전화통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집집이 전화가 있었던 때는 아니었지만, 1973년에 이장희가 발표해 히트한 대중가요 ‘그건 너’에 공중전화가 등장한 것도 그 시기 문화를 일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화와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했던 공중전화는 긴요한 통신수단이었고 진화하는 ‘시대의 상징’ 같은 거였다.

▲ 공중전화도 진화했으나,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87년 천만 회선을 돌파하면서 마침내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고, 이 유선전화 전성시대는 10년 넘게 이어졌다. 전화기도 검정 일색에서 화려한 원색으로 진화해 우리 집에서도 한때 빨강 전화기를 썼다. 1990년대에는 무전기처럼 묵직하긴 했어도 집 안에서는 송수화기를 들고 다니며 통화할 수 있었던 무선전화기가 사랑을 받았다.

‘전화 카드’ 한 장, 그 인간과 배려의 ‘기억’

그러나 유선전화의 전성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삐삐’로 불린 무선호출기를 반짝 거쳐 1990년대에 휴대전화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나 소유했던 휴대전화가 일상의 통신매체로 자리 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휴대전화는 ‘세상의 그 어떤 물건보다도 빠르게’ 확산했다.

▲ 인터넷 전화도 이제 더는 잘 쓰이지 않는다.

크고 무거워 ‘벽돌’이라고까지 불린 초기 휴대전화는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단순 통신수단을 넘어섰다.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검색하고, 물건을 사고 송금을 하는 등 온갖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2018년 현재, 무선 가입자 수는 전체 인구를 성큼 넘어선 6천 6백만 명에 이르렀다.


반대로 10년 전에 2천만 명을 넘었던 유선 가입자 수는 1천 4백만 명으로 줄었다. 내가 유선전화를 반납한 것은 2000년대 초반, 대신에 들인 인터넷 전화는 이제 사실상 거의 쓰지 않게 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스마트폰 때문에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  


공중전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급전직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공중전화는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두 배 이상 많은’ 상황이다. 한때 50만 대를 넘어섰던 보급 대수도 최근 20만대 아래도 감소했다. 하긴 저마다 스마트폰을 지니고 사는데, 공중전화를 쓸 일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집 전화든, 공중전화든 아예 사라지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인간의 삶이 이어지는 한, 그것은 한 시대의 추억이든, 일상의 편의든, 한 구실을 하면서 인간의 삶과 같이할 테니까. 유선전화든 무선 휴대전화든 “대화 메시지를 ‘전자적’으로 전달하는 도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당연히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을 극복”한 전화의 유용성도 이어질 것이다.

▲ 도시의 공중전화 부스 안 풍경은 퇴조하는 공중전화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과 전자적으로 접속하는 과정의 차이는 단순한 기술의 진보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화기 앞에 와서 송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서 신호를 보내어 상대와 접속하는 유선전화의 메커니즘에 깃들인 마음의 움직임은 생각날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어 저장된 번호로 상대방을 불러내는 휴대전화의 그것과 비기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여 준 너의 전화 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 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우리는 전화로 ‘용건’만을 전하지 않는다. 한 통의 전화로 우리는 위로와 우정을,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 확인한다. 1994년 꽃다지 1집 <민들레처럼>에 실린 민중가요 ‘전화 카드 한 장’이 노래한 것은 그런 우정과 연대다. 이 합법 음반은 무려 5만 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는데, 노래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당긴 것일까.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거리에 최루탄이 난무하던 때다. 걸핏하면 집회는 원천봉쇄됐으므로 주최 측은 집회가 임박할 무렵에 집회장을 비밀리에 알려줬고, 그 접선 방식이 특정한 번호로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전화가 연결되면 우리는 약속된 대화를 주고받은 뒤 장소를 통보받곤 했다. 


그 무렵, 공중전화용 카드는 급할 때 동전이 없어도 전화를 걸 수 있게 해주는 생광스러운 물건이었다. 이 노래는 누구나 지갑에 신용카드처럼 지니고 다니던 전화 카드가 전해주던 ‘위로와 연대’를 따뜻하게 고백하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한 시대와 함께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배려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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