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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원주민 학살의 흑역사 '운디드니 학살'

조회수 2019. 12. 30.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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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12월, 미 육군 북미 원주민 300여 명 학살하다.

* 2017년 12월 29일 직썰에 게재된 글을 재발행합니다.

▲ 1890년 12월 29일 미 육군은 운디드니에서 북미 인디언 300여 명을 학살했다.

1890년 12월 29일 미 육군 제7기병연대 병사 500여 명은 운디드니(Wounded Knee: 상처 입은 무릎) 내와 그 주변 언덕에서 북아메리카 수우족 원주민 300여 명을 학살했다. 기관총까지 동원한 이 학살로 인디언 전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350명의 수우 족 가운데 3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멸망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끔찍한 비극이었다. 미합중국의 ‘서부개척사’는 백인들에겐 ‘프런티어(Forontior)’ 정신의 발현으로 이룬 위대한 성취였지만, 인디언에게는 ‘땅과 목숨을 빼앗아가는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정신’(<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옮긴이 후기)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서부개척사는 ‘땅뺏기 놀이의 역사’고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금전으로 매수하고 사기와 협박으로 도장을 찍게 만들고 총칼로 수많은 부족을 짓밟으면서까지 땅을 빼앗은 강점(强占)의 역사’(위와 같음)였다. 서부개척사는 그래서 ‘인디언 멸망사’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1만 2000년 전, 얼어붙은 베링 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몽골족들은 북미 대륙의 주인이 됐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은 광활한 평원과 삼림을 빼앗고 이들을 늪지대나 풀도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으로 몰아넣었다. 그 땅에 붙인 이름이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이었다.

▲ 북미 인디언 부족의 지도자들. 워보카는 파이우트족의 메시아로 '유령의 춤'교를 창시했다.

미국의 서부개척사 = 인디언 멸망사

테톤 수우족은 1876년과 1877년에 걸친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파우더강 유역과 검은언덕을 모두 잃었다. 정부는 대수우 주거지역(Great Sioux Reservation)의 서쪽 경계선을 옮겨 50마일의 땅과 샤이엔강 지류의 비옥한 삼각주를 빼앗았다. 1877년 수우족은 미주리강 유역의 불모지로 이주했다.


북유럽의 거대한 이민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대수우 주거지역이 위협받기 시작했지만, 수우족에게는 이젠 무기도 말도 없었고 먹고 입을 여유마저 없는 형편이 됐다. 위대한 추장 앉은소(Sitting Bull)은 캐나다로 망명 중이었고 미국 정부는 그의 투항을 받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앉은소가 돌아온 뒤 1882년에 정부는 대수우 주거지역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그 땅의 절반을 매수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인디언들의 땅을 협상해서 빼앗는 일에 이력이 난 자들을 고용해 그들의 계획을 완수했고 수우족은 1만 4천 평방 마일의 땅을 거의 다 잃게 됐다. 


1888년에 정부는 다시 수우족에게 대수우 주거지역을 6개의 소 주거지역으로 나누고 9백만 에이커를 이주자에게 개방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리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것을 관철해냈고 대수우 주거지역은 조그만 섬들로 쪼개어졌다. 

“인디언은 모두 춤춰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계속 춤을 춰야 한다. 내년에 봄이 오면 위대한 정령이 오시리라. 온갖 짐승들을 데리고 오시리라. 들짐승은 어디서나 가득 뛰놀고 죽은 인디언은 모두 다시 살아나 젊은 사람같이 튼튼해지리라. 늙은 사람은 젊어지고 눈먼 사람은 눈을 뜨며 좋은 시절을 맞이하리라.

위대한 정령이 이 길로 오실 때 인디언은 백인들에게서 벗어나 높이 산으로 오르리. 백인은 인디언을 해칠 수 없구나. 인디언이 높은 곳에 오르고 나면 큰 홍수가 지리라. 모든 백인은 물에 빠져 죽는구나. 물은 흘러가고 지상엔 인디언과 짐승들만이 남으리니.”

- 워보카, 파이우트족의 메시아
▲ 망령의 춤을 추고 있는 인디언들. 이 신흥종교는 인디언들에게 춤추고 노래하라고만 가르쳤다.

1889년 파이우트족 출신 메시아인 워보카가 ‘망령의 춤(Ghost Dance)교(敎)’를 창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그것은 인디언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부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파괴된 생활방식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현재의 삶을 애도하고 이는 천국의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의식이 다르다는 걸 빼고 이 새로운 종교의 교리는 기독교와 똑같았다.


이 신흥종교는 앉은소 추장이 부족민들에게 망령을 춤을 가르치도록 하게 되면서 수우족뿐 아니라 서부의 전 인디언 지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인디언들은 마술의 표시가 그려진 망령의 셔츠(Ghost Shirts)라는 메시아의 신성한 옷을 입으면 미군의 총알도 셔츠를 뚫지 못한다고 믿었다.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나무심는사람, 2002)

초가을에 정부로부터 망령의 춤을 금지하라는 공문이 내려왔고, 인디언 주재관 맥래플린은 “문명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유해한 종교체계는 없다”고 말했다. 비폭력과 박애를 설교하는 이 교리는 인디언에게 춤추고 노래하는 것 이외에 어떤 행동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미군, 인디언을 막장에 몰고 무차별 학살하다

이 ‘해로운 종교 체계’를 조종하는 인물이 앉은소라고 본 미국 정부가 망설이다가 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통나무 오두막을 포위한 것은 1890년 12월 15일이었다. 그러나 몰려든 인디언들과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앉은소는 사살됐다.


앉은소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수우족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망령의 춤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지도자를 잃은 훙크파파족은 마지막 대추장 붉은구름(Red Cloud)이 있는 파인 릿지로 향했고 일부는 큰발(Big Foot) 추장의 마을로 갔다. 그날, 정부는 ‘소요의 조장자’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큰발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큰발도 부족민을 데리고 파인 릿지를 향해 출발했는데 그는 폐렴에 걸려 마차에 누워서 여행해야 했다. 12월 28일 휫사이드 소령이 지휘하는 백인기병대는 큰발과 인디언을 따라잡고 연행하겠다며 그들을 운디드니의 기지로 데려갔다. 


운디드니의 기지에서 기병대가 인디언의 숫자를 점검한 결과, 남자가 120명, 아이들과 여자들이 230명이었다. 무장해제를 다음 날로 미루고 미군들은 식량을 배급하고 천막 칠 곳을 마련해 주었다. 큰발의 텐트에 군의관을 보내 병자를 돌보게 한 다음, 미군은 천막 주변에 기병부대를 배치하고 언덕에 기관총 두 정을 설치해 놓았다. 밤늦게 합류한 제7기병연대가 두 정의 기관총을 더 설치했다. 


다음 날 아침, 미군은 인디언들을 모아놓고 무장을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내놓은 무기는 고작 소총 두 자루, 도끼와 칼 등에 그쳤다. 미군이 몸을 수색하겠다고 하자 인디언들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지만, 항의한 이는 부족의 마술사밖에 없었다. 

▲ 학살 후 현장을 떠났던 미군들이 돌아왔을 때 큰발 등 인디언들의 시신은 기괴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2정의 총 가운데 하나는 신형 윈체스터였는데 주인은 검은이리(Black Coyote)라는 젊은 전사였다. 그는 총이 자기 거라면서 반발했는데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의 총을 붙잡는 과정에서 그가 총을 쏘았고 미군은 즉각 응사했다. 검은이리가 들을 수 없는 농인(聾人)이라는 게 밝혀진 것은 뒷날이었다.


그리고 무차별 학살이 시작됐다. ‘총소리는 귀를 멀게 할 정도였고 하늘은 화약 연기로 가득 찼다’. 큰발도 총을 맞아 쓰러졌고 얼마 안 되는 인디언들은 칼과 몽둥이로 격투를 벌였다. 비무장 인디언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언덕 위의 기관총 4정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우리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들소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쏘아 댔다. 나는 백인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군들은 비열한 자들이었다. 아녀자에게 총을 쏘아대다니! 인디언 전사라면 백인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루이스족제비곰(Louise Weasel Bear)

광란의 학살이 끝났을 때 인디언 350명 중에서 3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들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대부분 동료 미군의 총이나 기관총의 유탄을 맞은 것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자 미군은 죽은 인디언들을 그냥 내버려 뒀다. 눈보라가 그치고 시체를 파묻으려고 운디드니에 다시 왔을 때 큰발을 비롯한 인디언들의 시신은 기괴한 모습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 사우스다코다주 파인 릿지 인디언 보호구역에 서 있는 운디드니 학살 기념물
▲ 운디드니의 학살을 알리는 표지판. '전투'라는 글자 위에 '학살'을 덧대 놓았다.
“그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이 끝장났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높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 가지가 그 피 묻은 진흙 속에 죽어서 눈보라 속에 묻혀 있는 걸 본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이름다운 꿈이었다. 이젠 사람 간의 연줄은 끊어지고 흩어져 버렸다. 더 이상 중심이라곤 없고 신선한 나무는 말라 죽었다.”

- 오글라라족의 주술사 검은사슴(Black Elk)

공식기록은 여전히 학살이 아닌 전투

학살이 끝난 뒤 미국 의회는 운디드니 전투(Battle of Wounded Knee)에 참가한 미군 병사 20명에게 명예 메달을 수여했다. 원주민과 시민단체에서 이 훈장의 도덕적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이의 폐기를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공식 기록에서도 ‘전투(battle)’는 ‘학살(massacre)’로 바뀌지 않았다.


학살로부터 80여 년 후인 1973년 2월 AIM(American Indian Movement: 미국 인디언 운동) 소속의 오글라라 라코타 부족 200여 명이 운디드니 마을을 점거했다. 이들은 보호구역에서의 부정부패 조사 및 처벌, 그리고 원주민들의 열악한 실태에 대한 해결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연방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항복을 요구했다. 결국, 71일 동안의 대치 끝에 무력으로 이를 해산했다.

▲ 1973년 미국인디언운동 소속 인디언들이 운디드니를 점거하고 자신들의 열악한 삶에 대한 해결을 요구했다.

백인들의 이른바 ‘서부개척사’에서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전진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장애물의 ‘제거’에 대한 인식은 대통령부터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목사조차도 다르지 않았다.

“자유와 문명과 종교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이 서진(西進)하는 찬란한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숲 속에 사는 야만인들에게 그들의 숲과 강과 땅을 빼앗은 것은 당연지사이다.”

-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재임 1829~1837)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 우리가 인디언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그렇다.”

- 윌리엄 셔먼(William Sherman) 장군, 인디언 학살 작전 지휘(1866년 ‘제너럴셔먼호’는 그의 이름을 딴 무장 상선이었다.)
“나는 인디언을 죽이러 왔어. 인디언을 죽이는 일이라면 하나님나라에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옳아.”

- 존 시빙턴((John Chivington) 대령(목사, ‘샌드크리크 Sand Creek 학살’의 주역)

미합중국의 역사에는 인디언 학살의 피가 아직도 흥건하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전도사인 양 온 세계의 분쟁에 개입하는 세계경찰을 자임하지만, 아직 제 눈에 박힌 들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운디드니 학살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흑역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의 하나인 이유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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