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후 한 말

조회수 2019. 12. 28.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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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를 마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모방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수탈 기관이었다.

1926년 오늘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찬바람이 부는 경성 거리, 조선식산은행 앞에 서 있었다. 중국에서 인천항으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그는 신문지를 싼 폭탄을 옆구리에 끼고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있었다.

▲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 1892~1926)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었다. 식산은행은 채권으로 확보한 일본 측 자본을 조선의 산업 기관 및 개인에게 대부하고, 그로부터 회수한 원금과 이자를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금융기관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다

조선식산은행의 창구는 연말이라 일본인 고객들로 붐볐다. 그는 신문지를 벗기고 안전장치를 뽑은 폭탄을 창구 앞으로 던진 후, 서둘러 은행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기대한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고 뒤이어 불발된 폭탄이 발견된 듯 소란이 이어졌다.


나석주는 인근에 있는 다음 목표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로 향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모방한 동척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 수탈 기관이었다. 동척은 토지 매입과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국유지 불하로 거대 지주가 되었고 소작인들에게 고액(5할)의 소작료를 받아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소작인들에 대한 수탈은 일제와 일본인들을 살찌운 대신 땅을 잃은 농민들의, 일본과 만주, 연해주 등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불렀다. 이처럼 경제적 수탈로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한 이 회사에 대한 민족적 증오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나석주가 경제적 침략의 첨병인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는 거사에 나선 것도 그러한 현실의 반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일어난 소작쟁의가 동척의 수탈로 인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동양척식회사로 달려간 나석주는 현관에서 제지하는 일본인 수위를 사살한 후, 2층으로 뛰어올라 토지개량부와 기술과 직원들에게 총을 난사하면서 남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이 소련제 폭탄도 역시 불발이었고 나석주는 재빠르게 동척을 빠져나왔다. 


나석주는 일경의 추격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며 을지로 쪽으로 달려갔지만, 일경의 포위망은 이내 좁혀져 왔다. 그는 결단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모여든 군중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그대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나석주는 자기 가슴에 스페인제 권총을 겨누었다. 3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는 자리에서 쓰러졌다. 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자신의 이름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향년 34세. 백범이 '제자이자 동지'라 불렀던 청년은 그렇게 갔다.


나석주는 황해도 재령 사람이다. 16세에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의 보명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하고, 그 뒤 농사를 지었다. 신민회의 서북지방 책임자인 백범 김구가 설립한 양산학교에서 배웠고 스물세 살 때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의 무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19년 국내에 들어와 3·1운동에 참여했고 이듬해 50명의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금 활동, 친일파 숙청 등을 전개했다. 사리원과 안악의 부호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건네받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그는 대한독립단 단원들과 같이 악질 친일파인 은율 군수를 처단하기도 했다.

▲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보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
▲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이었다.

일경의 감시가 강화되자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 김구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돼 임정과 요인의 경호를 담당했다. 1923년에는 허난성 한단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이듬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돼 복무하다가 1925년 다시 상해로 돌아와 임정에서 활동했다.

그들의 터지지 않은 폭탄

나석주가 의열단에 입단한 것은 1926년이다. 그해 6월 톈진에 체류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 김창숙이 경제 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김창숙은 김구와 유자명(1894~1985)으로부터 의열단원 나석주를 소개받아 폭탄과 권총, 자금을 건넸다. 나석주는 “이미 죽기로 결심한 바 오래되었습니다”라며 1926년 12월 26일,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으로 위장해 인천항으로 잠입했다.

▲ 독립운동가 김창숙(1879~1962)

나석주의 의거로 일경 간부와 동척 직원 등 3명이 사살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백주에 경성 도심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일본 경찰을 충격에 빠뜨렸다. 일경은 김창숙이 유림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거둬간 사실을 알아내고 관련 인사 600여 명을 무차별 구속했다. 이 사건이 바로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 명동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에 세워진 의거 표지석(위)과 동상(아래)

나석주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으며, 1999년 명동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에 동상과 의거 표지석이 세워졌다. 그의 의거는 일제 식민통치가 경제수탈에 집중될 때 발생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일제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의열투쟁에서 유난히 불발이 많았다. 거의 한 세기 이전이긴 하지만 힘들여 구해 던진 폭탄 한 발에 자신의 실존을 걸어야 했던 선열들의 시대를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터지지 않는 폭탄, 들리지 않는 폭음을 등져야 했던 이들 투사들의 절망과 좌절을 생각하면서 2016년 세밑을 보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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