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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핵폭탄보다 더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는 '이 소총'

2013년 오늘, 칼라시니코프 94세 일기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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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동안 AK-47 돌격소총은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퍼진 살상 도구로 자리를 잡았다. 내구성, 저렴한 가격, 조작 편리성, 살상력 등에서 다른 어떤 총도 범접하지 못한다. AK-47은 군대와 테러 집단 모두에서 사용하는 주력 무기이자 혁명적 소요의 보편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 맥스 부트(Max Boot), <잔인한 평화 전쟁> 저자, <AK47> ‘추천사’ 중에서

2015년 12월 22일 JTBC <뉴스룸>의 ‘내일’에서는 AK 소총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1919~2013)를 불러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 기계공은 2년 전인 2013년 12월 23일에 사망했다.

연 25만 명 살상하는 치명적 무기 AK-47

소련이 만든 치명적 무기로 연 25만 명을 죽인다는 이 돌격형 소총은 핵폭탄보다 더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개발한 지 70년이 넘었지만, 이 소총은 전 세계에 1억 정이 유통됐다. AK는 평균 가격 100~300달러로 스마트폰보다 싼 살상 무기로 암시장에선 10달러에 거래되기도 했다.


AK의 성공 비결은 분해와 조립이 매우 간단해 1시간이면 조작법을 습득할 수 있는 단순함이었다. 미국에서 개발된 M-16 소총 역시 매우 단순한 구조였지만, AK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특전사 화기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1977년 특수전 교육에서 ‘적성 화기’를 배우면서 AK 소총을 기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워낙 오래된 일이지만 분해할 때 부품이 한꺼번에 주르르 쏟아지곤 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몇 발이었던가, 우리는 AK 소총의 실탄 사격도 했다. 용수철처럼 세차게 튀어나오는 탄피를 찾느라 주변을 뒤지곤 했던 기억도 아련하다.

칼라시니코프 사망일, 12월 23일

▲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 사망한 인물인데도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에 대한 이력은 자료마다 상이하다. 러시아 알타이 지방에서 태어난 칼라시니코프를 JTBC에선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부농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에 앞서 부농에 대한 숙청이 이뤄질 때 그의 부친은 시베리아로 추방됐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래리 커해너(Larry Kahaner)가 쓴 <AK47>(이데아, 2019)에도 칼라시니코프의 이력은 정확히 기술돼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숙청돼 알타이의 쿠리야 마을로 추방됐다고 하는 것으로 미뤄 부농 출신이라는 점이 훨씬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칼라시니코프의 학력도 몇몇 자료가 서로 달라 위키백과에선 중졸, JTBC에선 초등학교 졸업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위키에서는 그가 공업학교(중학 3년+고등2년, 도합 5년)에서 제대로 기계 제작을 배운 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역시 5년제 공업학교 졸업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 1949년의 칼라시니코프

최종학력이 어땠든 간에 그는 기계에 각별한 재능을 보였던 모양이다. 14살에 브라우닝 권총을 혼자서 수리하는 기염을 토했고 공업학교를 졸업 후 철도공으로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취미로 총기를 분해 조립하곤 했다. 그는 1938년 소련군에 입대, 전차병으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기계 설계와 제작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칼라시니코프는 1941년 독일-소련 전쟁 때 전차장으로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고 후송된 후 총기 설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패주 당시 소대장이 독일군의 기관단총 MP40 같은 총기가 필요하다고 안타까워하자 거기 대응하는 총기의 개발을 시작했다.

▲ AK-47의 개발 동기가 된 독일군의 기관단총 MP40(위)과 이를 개량한 돌격소총 MP44(아래)

그러나 그가 처음 만든 기관단총은 결함이 많아 실패했다. 이미 ‘따발총’이라고 불리는 PPSh-41이 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라시니코프의 총기 설계 재능을 인정한 소련군은 그를 조병창에 배치해 총기 개발에 전념하게 했다.

소련군의 돌격소총 AK-47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군은 전쟁 말기 독일군의 신무기인 자동소총 MP-44(STG44)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와 비슷한 신형 무기를 장차 소련군 주력 개인화기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이 총기에 붙은 STG는 ‘돌격소총’을 뜻하는 독일어 슈투름게베르(Sturmgewehr)의 줄임말로 히틀러가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돌격소총은 전투 소총탄과 권총탄의 중간 정도 위력을 가지는 탄을 사용하는 자동소총이다. 기관단총보다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면서 경기관총보다 가벼우며, 기존의 전투 소총보다 전장이 짧으며 다량의 실탄을 휴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한 제식 소총은 돌격소총이다.

▲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AK-47은 소련군 제식 소총으로 채택돼 이듬해부터 배치됐다.

1946년 출시된 설계안 가운데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소총이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아 소련군 제식 소총으로 채택됐다. 이 총기는 1947년 첫 배치를 시작하면서 AK-47(Avtomat+Kalashnikov+1947년)이라고 명명됐다.


이 공로로 칼라시니코프는 1949년 스탈린 훈장을 받았고 1951년 육군 상사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도 그는 설계관으로 일하며 AK-47의 개량형 소총 AKM, AK-47을 베이스로 한 RPK 분대 지원화기, PK 다목적 기관총 등 소련군의 주력 총기들을 설계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사회주의 노력 영웅 칭호 2회에다 레닌 훈장까지 받았다. 1969년에는 육군 대령 계급이 수여됐고 1971년에는 대학을 다니지 못했으나 공학박사 학위가 수여됐다. 소련 붕괴 후에도 그는 민영화된 조병창의 주임 설계관으로 재직했다. 


1994년에는 75세 생일 축하 선물로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종신 육군 중장계급을 받았다. 2009년 11월에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칼라시니코프에게 러시아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아들도 그의 뒤를 이었는데 빅터 칼라시니코프는 Bizon PP-19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 숙명적 라이벌인 AK-47과 M16 개발자의 만남. 스토너는 AKM을, 칼라시니코프는 M16A2를 들고 있다.

소련에 돌격소총 AK-47이 있었다면 미국에는 유진 스토너(Eugene Stoner, 1922~1997)가 개발한 M16이 있다. AK가 제삼세계에까지 진출할 동안 M16이 AK에 대적할 무기로 등장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실패가 뒤따랐다.


조지 패튼 장군이 “이제까지 만들어진 최고의 전투 도구”라고 불렀던 M1(설계자의 이름을 따 ‘개런드’라고도 불렀다.)은 제2차대전의 주력화기였지만 무겁고 투박했으며 탄창에 8발밖에 들어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자동화기가 아니었다.

M16의 굴욕

이를 대체할 화기 연구는 미국과 유럽 동맹국 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유진 스토너(Eugene M. stoner)가 설계한 경량 소총 AR10을 개량하여 만든 AR15로 정리된 것은 1963년에 이르러서였다. M1을 기초로 개량된 미국의 전투 소총 M14는 밀림에서 ‘조우전’을 치러야 하는 베트남전쟁에서 AK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 AR15는 M16으로 이름을 바꿔 베트남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군이 베트남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되면서 AR15는 M16으로 이름을 바꿔 베트남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총알이 막히고 고장이 잦아서 실제 미군들은 근접전에서 훨씬 우월하다고 믿는 AK를 노획해 쓰곤 했다. 실제로 군은 이를 금지했지만, 특수부대는 허가를 받아 AK를 사용했다. 


AK는 땅속에 묻혀 있어도 30발을 발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데이비드 H. 해크워스의 베스트셀러 <전사의 심정으로>에 실려 있었다. 기지 건설공사 중에 땅속에서 베트콩 병사와 AK를 발견한 해크워스는 이 총으로 30발을 발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고.

“바로 이것이 우리 병사들이 필요하고 하고 가질 자격이 있는 총기였다. 병원처럼 깔끔하게 닦지 않으면 막혀버리는 M16이 아니라.”

AK나 M16은 소련·동구권과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소총으로 각각 1억 정이 넘게 제작돼 팔렸다. 자본주의 미국의 유진 스토너는 큰돈을 벌었지만, 특허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의 제도 때문에 칼라시니코프는 소액의 연금으로 생활해야 했다. 보드카 브랜드 세계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바 있던 그는 영국 기업가의 제의를 받아 ‘칼라시니코프 82프루프 보드카’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 말년에 참회 편지

▲ 보드카와 칼라시니코프

이 동서 진영을 대표하는 자동소총의 개발자들은 1997년에 러시아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개발한 소총을 각각 평가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개발한 병기가 얼마나 많은 병사와 민간인을 살상한 것인지를 성찰하고 있었을까.

▲ 무기의 일생을 다룬 역저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의 보도에 따르면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는 사망하기 몇 달 전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에게 AK-47에 의한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를 묻는 참회의 편지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신문은 “키릴 총대주교는 칼라시니코프를 위로했고 그를 진정한 애국자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과거 칼라시니코프는 자신이 AK-47을 만든 것은 조국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반복해서 밝혔었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그는 자신이 만든 총기가 초래한 숱한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떠올린 것일까. 


AK-47은 숱한 생명을 앗았지만, 칼라시니코프는 천수를 누리고 2013년 12월 23일 자신의 거주지인 러시아 자치공화국 우드무르티야 수도 이제프스크 한 병원에서 숨졌다. 향년 94세. <러시아의 소리> 방송은 그의 장례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소비에트 전설의 무기 설계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위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AK-47 자동소총 일제사격으로 배웅했다.”

▲ 2015년 12월 22일 JTBC <뉴스룸> 중 ‘내일’의 한 장면

출처ⓒJTBC 캡처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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