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오늘, 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지다

조회수 2019. 12. 16. 1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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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바다를 지켜낸 장수의 최후는 장렬했다.
▲ 전(傳) 충무공 이순신 상(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1598년 오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1545~1598)이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향년 53세. 일곱 해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 임진왜란(1592~1598)에서 바다를 지켜낸 장수의 최후는 장렬했다.


이순신은 한성 마른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소년기에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했다.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그 벼슬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이 충무공, 무술년 노량바다에서 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1592년 5월 2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면서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6월 16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잡혀 있던 포로들을 구해낸 옥포해전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는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

7월 8일에는 거북선으로 사천 선창에 있던 왜군을 공격해 적선 30여 척을 쳐부순 사천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쳐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으니 이 전투가 한산도대첩이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불화가 깊어졌고 1597년에는 출정의 명을 거부했다 투옥돼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해 전사하게 되자 그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해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다. 


10월 25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 전투가 명량해전이다. 명량대첩으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1597~1598)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 노량해전 기록화. 이순신은 명나라 연합함대와 함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적탄을 맞아 전사했다.

1598년 12월 15일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 군사 1만5천 명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과 함께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과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인 200여 척을 격파했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시작했다.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왼쪽 겨드랑이에 적탄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위당 정인보의 ‘이 충무공 사적 비문’은 이 노량해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8일 밤 사천, 곤양으로부터 적선 500여 척이 남해 앞바다로 들어오니, 노량을 넘으면 순천이다. 공이 순천서 나올 도적들의 길에 복병을 늘어놓고 몸소 마주 나와, 들어오는 적을 노량에서 만났다. 그 밤에 달이 밝았다.

“이 원수가 없어진다면 죽어 한이 없겠나이다.” 하늘을 우러러 빌고 나서, 적선 200여 척을 무찌르는 동안에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한창 독전하는 가운데 적탄이 좌액(左腋)에 박혀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나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는 그만 숨이 끊기었다.

공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옆에 있었다. 그대로 기를 두르고 북을 쳐, 한낮이 다 되기 전에 적선을 거의 다 깨뜨렸다.

만일 명군의 내통이 없었던들 순천 있던 적마저 살아가지 못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이 지난 뒤는 여러 군데의 적이 한번에 씻은 듯이 없어져서,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 위당 정인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충무공 사적 비문)’ 중에서

당시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선 가운데 100여 척을 나포하니 왜군은 겨우 50여 척의 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이 된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곱 해 동안 이어진 왜란은 끝나고 피폐해진 나라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기록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

그의 부음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됐으며, 좌의정이 증직됐고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세워졌고, 1793년(정조 17)에 이순신은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려져 통영 충렬사(1614년 건립,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1601년 건립,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1706년 건립, 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됐다. 


이순신은 시문에도 능해 시조, 한시, <난중일기> 등을 남겼다. 그의 유품 가운데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유물들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됐다. 명나라 신종이 그에게 준 8종 15개의 유물인 통영의 ‘충렬사 팔사품(八賜品)’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돼 있다. 


이순신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렴하며 효심 깊은 선비의 모범이었다. 무장으로서도 그는 뛰어난 지도력과 지략을 갖춰 해전마다 승리를 거둬 적에 바다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가 세종 임금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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