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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철수작전 중 군 물자 버리고 1만 피난민 구한 빅토리호

조회수 2019. 12. 16. 16: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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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5일, '흥남철수작전' 시작하다.
▲ 1950년 12월 24일 흥남철수작전이 끝날 때 유엔군은 흥남 항만 시설과 남아 있는 미국 보급품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장진호 전투, 그리고 흥남철수

1950년 12월 15일, 한국전쟁 중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함경남도 흥남항을 통해 해상 철수를 시작했다. 12월 23일까지 아흐레 동안 이뤄진 흥남철수로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국군과 유엔군 등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완전하게 철수시켰다.


1950년 12월, 당시 서부전선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막혔다. 활로는 해상 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같은 해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이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가 이끄는 미국 제10군단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12월 13일까지 혹독한 추위 속에서 17일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3만 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이 올리버 P.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곧 포위됐고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만 명의 중공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러한 상황에서 철수를 위한 전투를 이어나갔으며 중공군의 사상자를 늘려가며 포위를 돌파했다. 제10군단의 흥남철수작전은 유엔군의 북한 철수의 마지막 단계였다. 유엔군이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장진군청 소재지인 하길우리에 이르자 현지 주민을 비롯해 함흥 방면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주변 계곡이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의 결정적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유엔군은 12만 중공군과 싸우면서 흥남으로 후퇴해야 했다.

피난민들은 유엔군을 따라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피해 함흥, 흥남으로 후퇴했다. 원산에 주둔해 있던 미 제3사단도 중공군이 남쪽 퇴로를 막자 흥남으로 이동해왔다. 이때 집결 병력은 10만 5천여 명이었다.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한국 정부는 12월 4일 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아울러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 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했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해 많은 북한 주민이 북한을 떠나 월남했다. 중공군의 역습으로 위급한 상태에 있던 유엔군은 육로와 동해안 방면으로 신속하게 후퇴했다. 유엔 해군은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됐다.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 명령이 내려왔고 곧 미 합참이 철수를 승인함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이 개시됐다. 12월 11일부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싣기 시작해 14일에 선적이 완료됐으며, 다음날 흥남부두에서 전차 상륙함(LST: Landing Ship, Tank)이 출항한 것이다.

▲ 흥남부두에 모인 피난민들은 거의 30만에 이르렀다.
▲ 탈출 중인 피난민들. 전쟁기념관 사진

이후 12월 23일까지 차례로 유엔군 부대와 국군 제1군단이 흥남철수를 완료했다. 병력 10만 5천 명과 각종 차량 17,500대, 물자 35만 톤에 더해 항공기로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t의 물자를 철수했다. 대규모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수행한 흥남철수작전은 전투력을 최대한으로 보존한 만큼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길 수 있었다.

피난민 9만 1천 명도 배를 탔다

여기까지는 어떤 전쟁에서라도 있을 수 있는, 성공적인 철수작전이었다. 그러나 흥남철수는 작전의 주 대상인 군 전투력보다 마지막에 끼워 넣은 피난민 철수로 더 큰 조명을 받고 그 주역들이 기림을 받았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중에서

흥남철수가 개시된 흥남부두엔 철수할 군인 말고도 30만을 넘는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그들 역시 병력과 마찬가지로 배를 타야만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던 존재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1892~1979) 장군은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1917~1951) 장군과 통역인 현봉학(1922~2007)의 설득에 그는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했다. 피난민의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LST 한 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했지만, 30만의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여 명이었다.

▲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난민 철수를 결정한 주역들

작전에 동원된 배는 군함과 민간 함정 등 모두 193척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로 태울 수 있는 피난민의 숫자는 고작 13명뿐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1914~2001) 선장은 배에 실은 무기를 버리고 사람을 태우라고 명령했다. 결국, 배에 실려 있던 25만 톤의 군수 물자는 버려지고 피난민 1만 4천여 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가 유기됐는데,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으로 이를 모두 폭파했다. 그리하여 전쟁의 포화 속에 피어난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었다. 


16시간이 걸려 피난민들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3일 흥남에서 출항했다. 그리고 이틀 후 12월 25일, 빅토리호는 크리스마스의 기적과도 같이 2박 3일 동안의 극한 상황 속에서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경남 거제도에 도착했다. 항해 기간에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 미군들은 그들의 이름을 ‘김치1’, ‘김치2’… 그리고 ‘김치5’로 지어줬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

피난민 수송에 크게 이바지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기네스북에 ‘단일 선박으로 최다 인원을 구출한 배’로 등재됐다. 이 배가 다시 주목받은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였다. 이 배로 경상남도 거제로 온 월남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난 문재인(1953~) 대통령은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 박물관에 건립된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 헌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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