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가 일제 패망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
1941년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포고
1941년 12월 9일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일본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항일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만이었다.
임정의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뤄졌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로 대표되는 의열투쟁은 한국 독립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환기한 성과를 거뒀으나 이후 일제의 보복을 피해 임정이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1940년 충칭으로 옮겨온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했다.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한 광복군은 초기엔 총사령부 체제로 출발했으나 뒷날 병력과 부대 편제를 갖춰나갔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김원봉이 부사령관에 임명됐다.
광복군은 충칭에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1지대를 두고 시안(西安)과 푸양(阜陽)에 각각 2지대, 3지대를 설치했다. 광복군의 운영 유지 비용 등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그리고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부담했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로부터 중국 돈 10만 원을 기부받았다.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은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창설 이후 한동안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있었으나 1944년에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면서 독자적인 군사 행동권을 얻었다. 대일 선전포고 이후 1943년에는 한국광복군의 일부 대원이 영국군에 파견돼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밖에도 광복군은 포로 심문·암호 해석·선전 전단 작성·대적 회유 등의 심리전과 선무공작에도 참여했다.
해방 직전 임정과 김구 주석은 미국에 제주도 점령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승리를 얻는 일은 해방 이후 임정과 광복군의 위상과 관련해 매우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였다. 임정은 끈질긴 노력 끝에 미국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의 전신)과 연합 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국내침투 '독수리 작전'의 무산과 해방
연합군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국내에 침투해 미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전개하려는 이른바 ‘독수리 작전’은 광복군의 대일 항전의 백미가 될 뻔했다. 이 작전에 따라 사전트 소령이 이범석과 함께 서안 2지대에서, 윔쓰 중위는 김학규와 함께 부양 3지대에서 광복군에게 비밀 특수훈련을 실시했다.
1944년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배속된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도 이 훈련에 참여했다. 광복군 중위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 김준엽 등과 함께 3개월에 걸쳐 이 훈련을 받았다.
2001년 4월 비밀 해제된 미군의 일급비밀 문서에서 ‘냅코 프로젝트’라는 오에스에스(OSS)와는 또 다른 연합 작전이 구상됐음이 밝혀졌다.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카탈리나섬에서도 한반도 진공을 목표로 한인 요원들이 비밀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는 바로 이 훈련에 참가했던 박순동이란 이를 모델로 창조된 인물이다.
광복군은 총사령관 지청천, 제2 지대장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비행대까지 편성했고 8월 13일이 한국 후방 상륙 D-데이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안타깝게도 침투 직전 일본이 항복하면서 시행되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소련이 1주쯤 늦게 대일본 선전포고(1945. 8. 8.)를 했더라면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8. 6.)가 한 주일쯤 늦추어졌다면 그래서 작전이 계획대로 국내로 진입할 수 있었더라면 이후 역사의 전개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전후 국제 사회에서 전승국의 지위를 가질 수도 있었고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 분단의 비극도 맞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김구의 소회도 이 점에 맞춰져 있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해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해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해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해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은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했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됐다.”
- 김구, <백범일지> 하권(399쪽) 중에서
독수리 작전의 무산이 바로 미군이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등의 정치적 상황으로 전개됐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에 진주한 미군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과 미군정의 질서 확립에 협력한다는 조건으로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허용했다.
해방 이후 개인 자격으로 환국한 광복군은 대거 육군의 창설 대원이 됨으로써 대한민국 육군은 한국광복군의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후 역사는 그와 무관하게 전개됐다. 육군의 수뇌부가 군국주의의 후예들로 구성되는 일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대(1948~)부터 16대(1963~)까지의 육군 참모총장 13명 가운데 12대 최영희 총장을 뺀 12명 전원이 일본군(학도병 포함)과 만주군 출신이다. 이 가운데 5명이 정부가 죄질이 가장 나쁘다고 공식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고 6명(이응준, 신태영, 정일권, 이종찬, 백선엽, 이형근)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뒷사람들이 역사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식민지 시기 역사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조국의 방패’라는 군이 그에 못지않은 흑역사를 간직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역사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여전히 시간인 셈이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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