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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수도로 결정된 건 바로 이 '게임' 때문이다

조회수 2019. 12. 4.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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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동전으로 가끔 하는 게임이다.

* 2016년 7월 29일 직썰에 게재된 글입니다.

조선의 500년 수도 한양. 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서울에 동상을 세운다면 누가 적당할까? 


많은 후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봉 정도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려 말 동북면 촌구석에서 군대를 훈련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이런 군대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야망을 일깨운다. 결국,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다.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제갈량이었고 장자방이었다. 풍수가 좋다며 국토 남단 산골짝으로 들어가는 천도하자는 주장을 막았던 사람도, 안산 옆이 좋으냐 인왕산 아래가 좋으냐, 왕이 남향으로 앉느냐 동향으로 앉느냐 등의 시시콜콜한 시비까지 자기 뜻을 관철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삼봉 정도전(1342~1398)

개국 일등 공신이었던 정도전. 그러나 그는 훗날 태종 이방원에게 목숨을 잃고 500년 동안 역적으로 기록된다. 한 때 그의 시를 좋아하는 것마저 금기시될 정도였다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바로 이 혐의를 썼다.) 하지만 그가 신생 왕조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그 수도 한양의 초석을 닦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종 때 명신 신숙주는 정도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정도전) 선생이 만들었으며 영웅 호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선생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경복궁 및 창덕궁 등의 궁궐 이름, 숭례문 및 돈의문 등 한양 도성 성문의 이름을 지은이도 그였다. 그중 경복궁의 정전이라 할 ‘근정전’(勤政殿).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해야 한다’며 이름 지은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매우 교훈적이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중략)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 빨리한다 했으니, 신은 이것으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풍수를 논하며 천도를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풍수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일갈했던 그다. 그 모습 그대로 정도전은 그 명명을 통해 왕의 할 일을 깨우쳐 주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신(新)수도 건설본부장’ 정도전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도 한양은 또 한 번 크게 흔들린다. 이성계의 후계자로 왕의 막내아들 방석을 밀었던 그는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는다.

종로구에 가면 재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곳이다. 이 동네의 어원은 잿골이다. 이름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잔뜩 재를 뿌려놓아 그렇다. 왕자의 난 때 죽어간 병사들의 피는 강물을 이뤘다. 지독한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에 재를 뿌려댔다. 그것이 동네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 피 가운데에 신수도의 건설자 정도전도 끼어 있었다.


이 피 냄새가 싫어진 이들 가운데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 신의왕후 한 씨의 무덤을 찾는다는 핑계로 개성으로 돌아간 후 한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 재천도였다. 수십만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궁궐을 지은 지 수년 만에 한양은 또다시 버려질 위기에 처한다. 그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겨 온 것은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 이방원이었다. 


한양은 이방원 스스로 권력 정상에 올라섰던 왕자의 난의 무대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운 하륜이 무악 천도론을 외치고 나오면서 또다시 혼란에 빠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 500년 도읍지였던 개경, 이방원의 일등 공신이라 주장하는 하륜의 무악, 이미 백성들의 피땀으로 궁궐을 쌓은 한양. 이 셋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태종은 기상천외한 수법을 사용한다. 바로 엽전던지기다.

세 곳을 수도 후보로 두고 엽전을 세 번씩 던져 한 곳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엽전의 한 면은 길, 다른 면은 흉으로 정한 뒤 길이 많이 나온 곳을 정했다. 예를 들어 개경에 엽전 세 번을 던져 길이 두 번, 흉이 한 번 나왔다고 치자. 한양이나 무악에서 길이 세 번 다 나오지 않으면 수도는 개경이 된다. 동률을 이루면 다시 한 번 같은 방식으로 엽전을 던진다.


그 결과 단 곳만이 2길 1흉이 나온다. 나머지 두 곳은 1길 2흉. 이 2길 1흉의 주인공이 바로 한양이었다. 이미 “점을 쳐 놓고도 딴 소리 하는 자는 종묘를 능멸하는 이들이다”는 임금의 선언이 있은 뒤라 군말도, 투덜거림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가 태종 4년인 1404년이었다. 왕조 개창 이후 시작된 천도 논의가 무려 10년에 걸쳐 종결된 것이다. 무려 엽전던지기로 말이다. 


태종 이후에야 한양은 500년 도읍으로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청계천이 뚫려 도시를 관통하게 한 것도 이때였다. 현재의 상설시장 격인 시전행랑을 만들어 상업지구를 조성하고 도시의 미관과 생활 환경을 고려한 명실상부한 도성의 모습을 갖춘 것은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청계천이 동서를 가르고 종로통에 상점이 운집하고 광화문 앞에 관청들이 늘어섰던 오늘날의 서울의 원형이 확립된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계획 수도 한양은 10년의 세월을 거쳐 형성됐다. 한 나라의 수도가 풍수가 좋다는 이유로 계룡산으로 들어갈 뻔도 했고, 다시 개경으로 도로아미타불 되기도 했다. 결국, 엽전던지기로 결정된 역사가 좀 겸연쩍긴 하다. 하지만 서울은 순식간에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함께한 도시로 성장한다.

* 외부 필진 김형민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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