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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일어난 최악의 실수 5가지

조회수 2019. 11. 5.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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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오판 하나로 전투를 망친 다섯 명의 패배자
"전사에 길이 남을 영웅과 조롱을 받는 패배자는 전술적 실수로 결정된다."

- Stephen Wilkinson, 2007.

만약 야마모토 제독이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 갑판에 연료를 가득 채운 전투기를 대기시켜 놓지 않았다면 2차대전에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흘렀을지 한번 상상해보자. 히틀러가 베를린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런던을 포격하지 않고 계속 영국공군 기지를 공격했다면?


일개 부족이든 아니면 세계최강의 국가이든 전쟁터에서 저지른 잠깐의 실수로 그동안 쌓아 올린 명예를 잃거나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일을 틀어버릴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역사 속 최악의 실수로 전투를 패배로 이끈 다섯 사례를 살펴보자.

1. 갈리폴리(Gallipoli)에서의 해밀톤(Hamilton)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군 장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영국군은 사자와 같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참모장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휘관은 당나귀죠."라고 더 유명한 대답을 했다.


1915년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연합군은 독일 연합군인 터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갈리폴리를 공격했다. 영국 전쟁상인 키치너(Kitchener) 경은 이안 해밀톤 경에게 1915년 갈리폴리의 총책임을 맡겼다. 이안 해밀톤 경은 평소 온화한 성격을 지녔지만, 한번 화가 나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던 인물이었다. 이게 불행의 씨앗이었다. 


단호하고 전술적이며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는 지휘관이 원정에 나섰어야 했는데, 연합군은 조카의 지휘를 방해하지 않는 친절한 삼촌을 지휘관으로 모시게 되었다. 


터키 침공에 참전했던 그 유명한 윈스톤 처칠이라고 해서 항상 성공을 거뒀던 것은 아니다. 1915년 제독에 처음으로 취임한 처칠은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격할 욕심에 18척의 노후한 전함을 65km 길이의 좁은 다르다넬레스(Dardanelles) 수로로 밀어 넣었다. 수로의 서쪽에는 갈리폴리의 요새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처칠의 작전은 마치 구식 캐딜락을 몰고 바그다드 시내를 관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기뢰와 해안포에 5척의 전함을 잃었다.

1차대전까지만 해도 상륙작전은 전근대적이었다. 보트를 내려 이동하거나 아니면 이 그림에서와 같이 무장상선을 가까이 대고 임시가교를 만들어 상륙했다. 당연히 적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다. 갈리폴리에서는 영국군 지휘관들 때문에 영연방 국가들이 많은 희생을 치렀다.


처칠의 실패로 갈리폴리는 난공불락이라는 인식이 굳혀졌다. 터키가 현대식 군대나 최신식 포대를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라 워낙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터키의 오랜 숙적인 그리스도 갈리폴리를 공격해야 한다면 150,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키치너는 그들의 제안을 비웃었고 절반 정도의 병력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1915년 4월 25일 이른 아침 해밀톤은 야심찬 대규모 상륙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특수상륙정만 있었다면 ‘D-Day’의 복사판이었다. 영국 본토에는 강습용 특수보트가 있었지만 절대로 밖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군사기밀이어서 연합군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에 전함이 구명정을 줄줄이 매달고 해안에 다가가서는 줄을 끊고 구명정은 파도를 타고 밀려가다가 병사들이 노를 저어 상륙해야만 했다. 


구명정으로 상륙하는 병사들은 당연히 터키 기관총수들에게 더 없이 편한 목표물이 되었다. 그들은 증기선에서 병사들이 내려올 때마다 조준을 했고 처음 200명의 영국군 중에서 해안을 밟은 병사는 겨우 21명에 불과했다. 


해밀톤은 자신의 기함으로 세계최강의 HMS 퀸 엘리자베스 전함을 선택했다. 거함을 타고 멀리 있던 그는 해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사단장들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해안에 상륙한 부대 간, 그리고 전함과 해안 간의 통신도 나중에는 완전히 단절되어 하급장교들이 알아서 판단을 내리고 지휘를 할 수밖에 없었다.

Y 해변이라고 부르는 이 무방비지역에 상륙한 2,000명의 영국군은 터키군이 없는 절벽을 기어올랐다. 하지만 해밀톤의 새로운 명령도 없고 알아서 계획 B를 실행하는 지휘관도 없고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적도 없으니, 웅크리고 앉아서 커피나 끓여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멀리서 포성과 총성이 들렸지만 북쪽에 상륙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군(ANZACs)이 학살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의 숫자는 얼마 안 되었지만 기관총 덕분에 연합군을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0명의 토미(영국군)가 우회기동을 한다면 단 몇 시간 안에 전투를 끝낼 수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뉴질랜드군은 처음으로 참전한 전쟁에서 수백 명이 학살을 당하는 동안 영국군은 커피와 담배만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해밀톤의 마구잡이 계획 때문에, 뉴질랜드군이 피흘리며 확보한 교두보는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언제라도 무너질 상태였다. 영국군 군단 사령관 윌리엄 버드우드(Birdwood) 경은 즉시 철수시키자고 했지만 해밀톤은 "참호를 파고 버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힘들어도 이겨내야 합니다. 안전할 때까지 계속 참호를 깊게 파시오."라고 대답했다. 이 때부터 오스트레일리아군은 광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아무 생각없는 해밀톤은 키치너에게 "날씨도 도와주고 우리 병사들의 놀라운 사기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라는 전신을 보냈다.

1915년 4월 터키 진지로 돌격하는 영국 해군사단

연합군은 8개월에 걸친 무의미한 참호전 후에 결국 철수했다.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며 50만 명이 죽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터키보다 700명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매년 4월 25일 기념일이 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ANZAC의 날을 기념하며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흘린 피를 기억한다.

2. 프레더릭스버그(Vredericksburg)에서의 번사이드(Burnside)

프레더릭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 중 압도적으로 전력이 우세한 북군이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 것으로 유명한 전투로 암브로즈 번사이드 장군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래도 다른 장군들이 종전 후에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 반면, 번사이드는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졌다. 워낙 인기가 없는 인물이라 사이드 번즈라는 머리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번사이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링컨 대통령은 조지 맥클렐란(McClellan) 장군이 지나치게 신중하고 굼떠서 번사이드가 포토맥(Potomac)의 북군을 지휘하게 했다.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자 맥클렐란의 친구인 번사이드는 같은 실수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다른 종류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1862년 12월, 로버스 리의 반란군(남군)은 남군의 수도인 리치몬드(Richmond)에서 약 90km 떨어진 철도 종점 버지니아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병력을 나누었다. 번사이드는 재빨리 움직인다면 이 지역에 있는 적을 일거에 전멸시키고 리치몬드를 점령해서 전쟁을 바로 끝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번사이드는 그 당시로는 미군 역사상 최대규모인 118,000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리의 병력 중 일부가 프레더릭스버그를 수비하고, 나머지는 유명한 ‘돌벽(Stonewall)’ 잭슨(1861년 첫 번째 Bull Run 전투에서 보여준 확고한 수비로 붙여진 별명)의 지휘 하에 남쪽으로 6km 떨어진 프로스펙트(Prospect) 언덕에 대기하고 있었다. 제대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지도와 배치상황을 본다면 "압도적인 병력으로 즉시 프로스펙트 언덕을 점령하고 적군을 궤멸시킨 후에 북쪽으로 우회기동해서 프레데릭스버그의 적군을 청소하고 리치몬드로 전진한다. 그렇게 종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번사이드는 대신에 주력으로 프레데릭스버그의 수비군을 공격하고 조지 미에이드(Meade) 장군을 보내 프로스펙트 언덕을 공격하게 했다. 잭슨에게 밀려난 미에이드는 증원을 간절히 요청했지만 번사이드는 도시에서 병력을 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남군이 모든 다리를 불태웠기 때문에, 번사이드는 보트를 연결한 임시가교로 라파핸녹(Rappahannock)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북군 공병이 보트 위에서 무거운 널빤지를 옮기며 고생하는 동안 남군의 저격수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결국 공병의 희생을 무릅쓰고 임시가교를 통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상륙전을 펼쳤지만, 예상하지 못한 해동과 많은 비로 강 건너편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진흙밭으로 변했다. 도강하는 데에만 24시간이 넘게 걸렸고, 잭슨은 병력을 급히 움직여 프레데릭스버그의 수비군에 합세했다.

남군이 포진했던 돌벽의 모습. 일방적인 전투여서 진지가 상당히 깨끗하다.

당황한 번사이드는 포병을 동원해 프레데릭스버그의 수비를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남군은 미리 골라둔 가장 최적의 수비장소로 후퇴를 했다. 도시 서쪽에는 큰 돌을 쌓아 만든 농장의 돌담이 있었는데 이곳을 마지막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것이었다. 남군은 키 높이에 맞는 돌담에 서서 조준사격만 하면 되는 최고의 장소였다. 돌담 뒤에는 언덕이 있었고 리는 그 너머에 포병을 배치시켜서 북군의 대응사격을 피할 수 있었다.


번사이드는 돌담을 향해 14개 연대를 투입하는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렸고 남군은 다가오는 북군의 푸른 군복을 치명적인 일제사격으로 쓰러뜨렸다. 번사이드는 남군의 탄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정면공격에 집착했지만, 남군의 탄약은 전혀 모자라지 않았고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9번에 걸친 자살공격 끝에 12,000명의 북군이 들판에 쓰러졌고, 설상가상으로 12월 13일 저녁부터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들판에 버려진 부상자들은 죽어갔다.

3.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의 나바르(Navarre)

서양 군대가 동양 군대와 전투를 벌일 때에는 자만심이나 지나친 확신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일본 해군이 1905년에 쓰시마에서 제정러시아 함대를 전멸시킬 때에도 그랬고 1942년 성능이 월등한 미쓰비시 전투기를 모든 숙련된 일본 전투조종사들이 영국군과 미군의 그루만 와일드캣, 브루스터 버팔로와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를 마음대로 격추시킬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다. 1954년 베트남의 농부들이 디엔 비엔 푸에서 오만한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의 16,000명의 최정예군을 전멸시킬 때에도 다시 또 이런 실수가 반복되었다.


나바르 최악의 실수는 보 구엔 지압(Vo Nguyen Giap) 장군과 베트남 병사들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검은 파자마를 입은 농민이 비행기의 공수를 받는 요새에 틀어박힌 프랑스 포병과 외인부대를 이길 수 있었을까? 더구나 베트남은 단 한 대의 비행기도 가지지 못했는데도.

먼저 ROTC 신입생조차도 정글 안에 멀리 떨어진 디엔 비엔 푸에 왜 틀어박혔었는지 물을 것이다. 프랑스군은 커피에서 증원군까지 모든 것을 공수에 의존했지만 C-47만으로는 요새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바르는 포병의 원칙을 무시하고 저지대에 자리를 잡아서 베트남군의 날카로운 대공포가 착륙하는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활주로도 2개를 운용했었지만 베트남군은 포격으로 두 활주로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군수품을 낙하산으로 투하하는 지경까지 몰렸고 그나마 절반은 베트남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베트남군이 처음 공격하던 1952년 11월 디엔 비엔 푸는 전초기지에 불과했고 소수의 프랑스 수비대는 바로 밀려났다. 2차대전에서 패전의 굴욕을 당했던 프랑스로서는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었기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시 점령한 후에 지켜낼 생각이었다. 


나바르는 "지압은 병참선이 없습니다."라는 정보를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만 명의 농민이 트럭에서 내린 군수품을 자전거 또는 짊어지는 것으로 험준한 산을 넘어 디엔 비엔 푸에 있는 지압 앞에 날라주었다. 반대로 지압은 프랑스군의 병참선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게릴라가 공군기지에 침투해서 많은 비행기를 파괴했다. 그들은 지압의 명령대로 프랑스의 베어캣과 B26과 같은 전폭기는 내버려두고 수송기만 노려 폭탄을 던졌다.

프랑스 극동 원정군이 낙하하는 모습

나바르는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 보병과 기갑차량이 자유롭게 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4배나 많은 베트남군에게 포위되어 굶주려갔고, 농민들이 산을 넘어 끌고 온 포탄을 피하느라 참호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지압 장군은 포대를 산 뒤에 교묘하게 배치해서 프랑스군의 대응사격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결국 나바르는 자신이 그렇게 얕잡아봤던 훨씬 똑똑하고 전략적인 동양의 지휘관에게 대패했다. 냉방이 잘되는 하노이 사무실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나바르가 동굴에서 직접 병사들을 지휘한 지압을 이길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4. 아드와(Adwa)에서의 바라티에리(Baratieri)

1896년의 아드와 전투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영화는 1999년의 에디오피아 다큐멘터리가 유일하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과 에디오피아군이 맞붙었었다. 1964년 줄루 전쟁영화처럼, 아드와도 미국 헐리웃이 좋아할 모든 재료를 가지고 있었다. 험준한 지역에서 150,000명이 전투를 벌인 대서사시가 있었고 메레리크(Menelik) 2세의 부인 타이투(Taitu) 황후가 예비병력을 지휘해 이탈리아군을 패전으로 몰아넣은 극적인 장면도 있었다. 아드와는 선진 유럽군대가 낙후된 아프리카군대와 싸운, 문명시대와 야만시대가 충돌한 흔한 전투였고 전형적인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전투에서는 에디오피아군이 골리앗이었다는 점이 특별했다.

아드와 전투에는 악당 역할도 있었다. 오레스테 바라티에리라는 이탈리아 장군이었는데 이 악당은 에디오피아 지휘관과 군대를 너무 과소평가한 나머지 유럽이 아프리카에서 당한 가장 큰 패배를 겪었다. 모든 패배가 그렇듯이 바라티에리에게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억울한 감이 있지만 말이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나눠먹기 파티에 가장 늦게 참석했다. 영국, 독일, 스페인, 벨기에, 심지어 덴마크와 스웨덴까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탈리아가 노릴 수 있는 땅이라고는 가장 가난한 소말리아와 에디트리(Eritrea)가 고작이었다. 이탈리아가 두 나라 사이에 애매하게 놓인 에디오피아를 탐내는 것도 당연했다. 


이탈리아는 메네리크 왕의 호감을 사기 위해 수천 자루의 최신식 소총, 엄청난 탄약과 포탄을 과감하게 선물했다. 훗날에 이 무기들이 자신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분열과 술책을 써서 에디오피아를 병합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탈리아의 검은 의도를 알아차린 메네리크 왕은 미국와 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해 병사들을 최신식 무기로 훈련을 시켰다. 


바라티에리는 에디오피아군을 상대로 초기에 거둔 몇 차례 승리에 자만해, 로마에 가서는 메네리크를 철창에 가둬 데려오겠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아드와 일대는 가파른 바위 산 투성이인 황량한 지역이다. 이탈리아군은 지도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고 통신장비도 부족했으며 거친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군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투비를 아낄 욕심으로 바라티에리는 발사속도가 느린 레밍톤 소총으로 무장시켰는데 오히려 에디오피아군의 무장이 더 좋았다. 그는 이번 전투에서 오래된 탄약을 다 소진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세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유럽의 군대가 더 잘 무장된 아프리카 군대에 몰려 패배를 겪고 있다.

양쪽의 군대는 대치 상태를 한동안 이어갔다. 이탈리아군은 25,000명의 병력으로 사기가 이미 떨어진 에리트리아군이 대부분이었고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가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메네리크는 100,000명 이상의 전사를 동원했으며 이 중의 절반은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드와 일대가 워낙 황량한 지역이어서 두 군대 모두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고 어느 한 쪽의 식량이 빨리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메네리크 군대의 식량이 먼저 떨어졌고 그는 1896년 3월 1일에 군대를 철수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놀랍게, 철수 바로 전날 저녁에 이탈리아군이 전진하기 시작했다는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메네리크는 그들의 전진을 반기며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바라티에리는 이탈리아 수상인 프란세스코 크리스피에게서 즉시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겁쟁이로 취급받을 것이라는 힐난의 전보를 받았던 것이다. 바라티에리는 전투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적의 무장상태가 훨씬 좋았다는 것까지는 몰랐어도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선 지휘관들은 전투를 계속 재촉했고 결국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바라티에리는 야간기습을 생각했지만 지역이 너무 복잡했고 지도가 없는 부대에게는 너무 어려운 작전이었다. 4개 여단이 서로 충돌했고 부대의 사이가 2km 가까이 벌어지기도 했고 어떤 부대는 전장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결국 3월 1일 새벽이 밝으면서야 전투가 벌어졌고 정오를 넘기면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에디오피아군은 광적인 전사들로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이탈리아군 10,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에디오피아군은 17,000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에디오피아군의 피해가 더 컸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에디오피아는 유럽의 위협에서 벗어나 당당한 독립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5. 리틀 빅혼(Little Bighorn)에서의 커스터(Custer)

아마도 몬타나 리틀 빅혼 전투만큼 자세하게 분석하고 체계화해 재조명하는 전투는 없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과 200명의 미기병대가 완전히 전멸을 당했다. 이 전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제7기병대를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는지는 공격하던 수(Sioux) 족만이 알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가 되어서야 고고학 연구를 통해 약간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금발의 커스터가 기병대의 명예와 함께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장렬하게 전사한 막연한 이미지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시신, 총알과 탄약통 위치에 대한 고고학 조사에서 밝혀진 것은 커스터와 7기병대의 장렬한 최후보다는 이리 저리 쫓기다가 학살당한 패배에 가까웠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제7기병대의 최후. 실제로는 도망치다가 죽었다고 한다.

커스터는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했으며 상당히 오만한 성격으로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상관을 어떻게 하면 화나게 만들까 하는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제7기병대 추모 웹 사이트에서는 커스터가 "웨스트 포인트 역사상 최고의 학과에서 34번째 성적으로 졸업했다."라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 학과의 정원은 34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알려진 사실로는, 미기병대와 인디언 정찰대 210명, 5개 중대로 라코타 수족과 북부 샤이엔(Cheyenne)족을 정면 격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막대를 벌집 안에 집어넣고 돌렸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 벌어졌다. 이 전투는 커스터가 한 실수 중 가장 큰 실수이자 마지막 실수였다.

커스터가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던 인디언 부족들 사이를 깊숙이 들어가 활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평원에 살던 인디언은 최고의 기병부족이었으며 스페인이 말을 수입하면서 전해준 소총으로 무장하면서 무서운 총기병이 되었다.


커스터의 병력은 대부분 전투경험이 없는 징집병과 이민자였으며, 군마의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인디언 부족과 비교하면 마치 F1 레이싱에 픽업트럭을 몰고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말은 전투가 벌어지자 제 자리에 멈춰서거나 심지어 인디언에게 뛰어드는 자살행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평원의 인디언을 상대로 한 전투는 1820년대부터 시작해서 1890년 운디드 니(Wounded Knee) 전투까지 이어졌는데 단순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아니었다. 인디언은 토지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 토지소유는 마치 공기를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주인없는 땅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평원 인디언은 유목민족으로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음식, 옷과 도구를 제공하는 아메리카 들소였다. 서쪽에서부터 정착민이 밀려들고 철로가 놓이면서 들소가 거의 사라졌고 인디언 부족은 생존을 위해 저항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7기병대도 용서받지 못했다. 전장에서 발견된 기록을 보면, 커스터는 7,000명(여자, 아이와 노인을 포함한 부족 전체)이 넘는 인디언 캠프를 처음 발견하고는 당황했지만, 이제 막 50km 행군으로 지친 병사와 말을 공격에 나서게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는 인디언의 탈출구를 막으며 고지대를 차지했지만, 고지대로 올라오지 않으리라는 커스터의 예상과 달리 인디언은 고지대를 바로 공격했다.

제7기병대가 전멸한 위치에 놓인 묘석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알프레드 테리 소장은 커스터에게 지원군을 기다리라고 충고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스터가 무모한 전투를 벌일 때에는 지원군이 거의 다가간 상태였다. 왜 커스터는 테리의 경고를 무시했던 것일까? 일부 역사가들은 커스터가 노출되어서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마리 산도스라는 작가는 커스터가 대통령직에 욕심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틀 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릴 예정이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의 입지가 크게 올라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를 대는 자료들도 많다. 이 전투의 진실은 커스터와 함께 리틀 빅혼의 초원에 함께 묻혀있을 뿐이다.

* 외부 필진 우에스기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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