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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독립군으로 3만 일본군 대파해 '3대 전투'로 꼽히는 이 전투

조회수 2019. 10. 23. 17: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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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가 시작됐다.
▲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 3천여 명이 3만이 넘는 일본군을 청산리에서 대파한 한국 독립군의 3대 대첩 중 하나다.

1920년 10월 21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에서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총사령관 김좌진) 제2제대가 일본군 보병 19사단 야스카와 지로의 전위부대 200여 명을 교전 20여 분만에 전멸시켰다. 첫 전투의 승리로 청산리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좁게는 이 백운평 전투를 이르지만 이후 전개된 김좌진(1889~1930)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교전 끝에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를 포괄한다.

백운평 전투로 시작된 청산리 대첩

뒷사람들이야 전설처럼 전승되는 이 독립전쟁의 승리에 환호하고 말지만, 나라를 잃고 타국 땅에서 일본군과 맞서고자 독립군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제는 토벌 작전뿐 아니라 중국 관헌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통해 독립군과 한인들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 기지를 설치해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간도 지방의 독립군 부대의 활동은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해지고 있었다.

1919년 8월에 서일·김좌진·이장녕·김규식·최해·정훈·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 연성소(사관학교)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출처: ⓒ독립기념관
▲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사용한 소총과 탄약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1868~1943)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곤 했다. 홍범도가 이끈 봉오동 전투도 독립군의 침공 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대한독립군의 홍범도는 7월 11일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해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승리했다. 일제가 만주 일대의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운 것은 이런 상황이 이어질 때였다. 

일제는 독립군이 대거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 안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면 식민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1920년 8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꾸렸다.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던 제19보병사단을 간도에 투입해야 했는데 일본군 대병력이 국경을 넘으면 국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일제의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

이에 일제는 중국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을 끌어들여 훈춘의 일본영사관 약탈 사건을 조작했다. 중국 영토 ‘무단 침입’이라는 중국 내 반발도 막고 대륙 출병을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의 요청으로 중국 마적단이 습격하자 이를 한국 독립군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미리 대기해 놓은 대군을 즉각 투입했으니 이것이 바로 ‘훈춘 사건’이다.

출처: ⓒ독립기념관
▲ 청산리 전투의 전적지인 어랑촌의 옛 모습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9천여 명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14사단 등 모두 2만여 명에 달하는 군단급 병력을 간도에 투입해 검문 검속을 강화하고 한인사회와 독립군을 탄압했다. 일본군은 중국 정부와 군에 독립군 탄압을 압박했으나 독립군에 호의적인 중국 측 인사들은 단속 대신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 기지를 버리고 험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9월 중순께부터 한 달여 동안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 집결한 것은 이러한 상황의 결과였다.

만주의 독립군 토벌을 위해 동원된 일본군 병력은 3만~3만 5천 정도였다. 실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이보다 적은 2만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에 맞설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의 전투 병력은 3천여 명에 1천여 명의 비전투원이 물자 수송, 보급, 자금과 무기, 탄약, 식량 조달 등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동지대는 화룡현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정 지역으로 진군해 왔다. 일본군이 북로군정서군을 추격해 오자 총사령관 김좌진은 백운평 바로 위쪽 고갯마루와 계곡 양쪽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동지대의 선발 보병 1개 중대와 19사단 야마다 연대의 야스카와가 이끄는 전위대 병력이 백운평 안으로 진입하자 청산리 골짜기에 매복하던 독립군들은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독립군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응사하던 일본군 200명은 교전한 지 20여 분 만에 전멸했다.

뒤이어 야마다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하면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골짜기 아래의 일본군이 고지 위에서 공격하는 독립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200여 전사자를 남긴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발표한 이 백운평 전투정보(독립신문 제88호)는 다음과 같다.

“맹렬한 급 사격을 가한지 약 20여 분 만에 한 명의 잔여 병사도 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명이더라.”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인근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완루구, 어랑촌, 천수동 전투에서도 승리

홍범도 부대는 한때 남북에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났다.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가 빠져나간 자리에 진입한 일본군 토벌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해 공격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독립군과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한 셈이었다. 오후 늦게 시작돼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400여 명의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의 김좌진 부대는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부대를 기습해 일본군 기병 중대를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에 주둔하던 아즈마 부대의 일부였다. 

일본군의 반격을 내다본 김좌진은 병력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됐던 김좌진 부대를 도왔다. 밀림으로 피신하느라 식량이 바닥나 사흘 가까이 굶다시피 한 독립군들은 소나무 껍질과 솔잎을 먹으면서 전투를 계속했고 끝내 5천 명가량의 아즈마 부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

날이 저물자 독립군은 철수하기 시작해 다음 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를 따라 상류로 이동했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 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급습했다.

▲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 사진
▲ 청산리 전투의 현장인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세워진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해 대피했다가 전열을 정비해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했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했다. 퇴각한 일본군이 다시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엿새간에 걸친 청산리 전투는 막을 내렸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했지만, 독립군 측은 전사자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른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간도 학살과 청산리 주역들의 앞날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뿐 아니라 이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한 만주 지역 동포들의 승리이기도 했다. 가난한 농민들은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마련할 수 있게 했고 식량과 피복을 대었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직접 밥을 지어 독립군을 독려했고 탐지한 정보를 알려서 독립군의 작전에 도움을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지청천 장군의 대전자령 전투(1933)(관련 기사: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와 함께 한국 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평가된다. 청산리의 승리는 한국 독립군은 물론, 임시정부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사기를 드높였고 중국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긴 했지만, 독립군 부대와 재만 한인들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 장완린(중국 작가)
▲ 순국지 근처에 세워진 김좌진의 동상. 중국 헤이룽장성 해림시의 한중우의공원 앞에 있다.

봉오동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약 두 달 동안 독립군의 근거지라고 여겨져 온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했다.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소의 학교가 불에 타는 ‘간도 학살’(경신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더는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옮겨갔다. 1921년 1월에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Iman)에 도착했다. 이범석 등도 이들을 따르고 있었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무르주 자유시(알렉세에프스크)로 옮겨갔다.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믿고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죄다 반납한 채였다. 러시아행을 탐탁지 않게 여긴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와 기념비

만주로 되돌아온 김좌진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활동하다 통합조직인 신민부 활동을 거쳐 한족 총연합회 활동으로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한족 총연합회와 대립하고 있었던 조선공산당 측과 사상적으로 반목하던 김좌진은 1930년 1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41세. 광복 후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홍범도는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돼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했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청산리 전투의 전모에 대한 통일된 자료는 없는 듯하다. 자료에 따라 병력 규모, 전과 등의 차이가 컸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되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김좌진 평전>(박환),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장세윤)을 참고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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