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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대접받고 싶던 조선 청년이 일왕 저격을 결심한 이유

그의 이름은 '이봉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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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치카와 형무소 형사자 위령탑. 이봉창이 순국, 김지섭, 박열이 수감된 곳이다.

조명하 의거(1928년 5월 14일)

▲ 조명하 의사의 동상. 서울대공원에 세워져 있다.

1928년과 1932년 10월 10일 조명하 의사와 이봉창(1900~1932) 의사가 각각 타이베이 형무소와 도쿄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조명하는 히로히토의 장인인 일본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독검으로 찔렀고 이봉창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폭탄으로 저격한 이다.

조명하에게 찔린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이듬해 1월 죽었고,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에 말과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화를 면했다.

거사의 성패는 갈렸지만, 일제는 두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했다. 4년의 시차가 있긴 하지만 같은 날짜에 스물넷, 서른두 살의 조선 청년 둘이 일제에 희생된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지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극한의 길이었다.

조명하(1905~1928)는 황해도 송화 출생이다. 풍천마을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가난해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군청의 고용원으로 일하며 강의록으로 독학했다. 황해도 출신인 김구, 노백린(1874~1925)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한다.

조명하가 “항일을 위해서는 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며 처자식을 두고 일본으로 떠난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1926년 9월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간 조명하는 오사카전기회사, 아다치 메리야스 상점 등에서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녔다. 그해 말 나석주(1892~1926)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나자 이듬해(1927) 그는 대만을 거쳐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향했다.

그는 중간 기착지 타이완 타이중의 부국원 상점에서 일했다. 어느 날,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이자 황족인 일본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조명하는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일본군 대장을 쓰러뜨린 스물넷 청년의 단독 거사

칼 쓰는 법 등을 익히면서 구니노미야를 기다리던 조명하는 1928년 5월 14일, 무개차를 탄 지나가던 구니노미야를 향해 독을 바른 칼을 던졌다. 조명하의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 운전사의 어깨에 꽂혔다.

조명하는 현장에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다. 조명하의 거사는 실패인 듯했지만, 구니노미야는 결국 목덜미 상처 때문에 이듬해 패혈증으로 죽었다. 의열단도 한인애국단도 아닌, 오직 혼자서 결단하고 실행한 거사는 마침내 일제의 육군 대장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같은 해 7월 18일, 조명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석 달이 지난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단신 일본 제국주의 응징에 나섰던 이 혈기왕성한 청년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가 처형 직전에 남긴 유언은 뒷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해방 조국은 1963년 3월 1일 조명하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78년에는 타이완 타이베이시 한인 학교에, 1988년 5월 14일에는 의거 6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공원에 조명하 의사의 동상을 세워 그의 희생과 투쟁을 기리고 있다.

이봉창 의거(1932년 1월 8일)

▲ 백범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봉창 의사의 동상

이봉창(1900~1932)은 서울 사람이다. 용산의 문창 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했다. 1919년 이후 일을 그만두고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1925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됐고,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그는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했다. 일본에서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여자와 술과 도박 등 향락을 즐기면서 사는 전형적 ‘모던 보이(modern boy)’의 모습을 보인다.

일본인 못지않게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일본의 조선인 차별을 반일 민족의식으로 잇기보다는 일본인으로 대접받고 싶어 했다. 그가 일제에 순응적인 조선인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것은 ‘덴노(天皇)’의 ‘성안(聖顔)’을 보려 히로히토의 즉위식에 참석했다가 조선인으로 밝혀져 유치장에 억류된 경험이 결정적이었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 이봉창이 형무소에서 쓴 수기 형식의 자술서 중에서

이봉창이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온 것은 1931년이었다. 그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통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나게 된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데다가 일본 옷에 게다를 끌고 다니던 그를 임정에서는 ‘왜 늙은이’라 하면서 매우 경계했다.

그러나 백범은 그의 진정성과 말하는 태도가 범상치 않다고 여겨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서 그가 ‘의기 남자’로 ‘살신성인’할 결심을 품고 왔음을 알게 된다.

“제 나이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 김구, <백범일기> 중에서

1931년 2월 이봉창은 김구의 지시대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인쇄공장과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일하며 일본인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가끔 백범과 만나면서 정식으로 임정이 양성하는 항일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히로히토 암살계획을 세웠다.

오랜 준비 끝에 이봉창은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김구와 기념촬영을 했다.

▲ 이봉창은 임정의 백범을 찾아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1년 12월 13일에 위 선서문을 썼다.

이봉창은 12월 17일 일본 우편선을 타고 도쿄로 향했다. 12월 28일 이봉창은 아사히신문에서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이 거행되며 이 식전에 일본 황제가 참석한다는 기사를 읽고 1월 8일을 거사 날짜로 잡았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1월 8일에 물품을 방매(放賣)하겠다”고 전보를 치고 수류탄을 손질했다. 운명의 1월 8일 이봉창은 오전 8시에 폭탄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들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가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것은 오전 11시 44분에서 45분 사이였다.

수류탄은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터졌지만, 그 위력은 변변치 못했다. 이봉창은 이내 자신의 거사가 실패한 것을 알았고, 자신이 한 일이라고 밝히고 바로 체포됐다. 일경이 난폭하게 그를 제압하자 이봉창은 “도망치거나 숨지 않을 테니 난폭하게 굴지 말라”고 일갈하고 경시청으로 연행됐다.

그가 던진 수류탄으로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부상했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 청년이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사건은 이후 항일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일왕 향해 던진 폭탄, 임정을 살리다

무엇보다도 이봉창 의거는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임정의 건재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는 윤봉길 의거의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국제적 지원까지 얻게 되는 등 침체 일로의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봉창에 대한 공판은 구형과 선고, 단 두 번으로 끝났다. 1932년 9월 30일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선고되는 순간에도 이봉창의 태도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고 전한다.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봉창은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32세. 그의 유해는 도쿄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사이타마 현 우라와 시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됐다. 백범은 이봉창이 처형되던 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해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했다.

▲ 백범은 해방 뒤, 윤봉길, 백정기, 이봉창 등 삼의사의 유해를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사진은 유해 봉환 장면.

▲ 삼의사 묘역.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봉환해 여기 안장했다. 맨 왼쪽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봉환해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 묘역이 삼의사 묘다. 효창공원 백범기념관 앞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봉창 의사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이봉창 의거는 비록 실패했지만, ‘1930년대 한국 독립 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또 ‘일제가 신격화한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데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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