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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년 넘도록 친일파 추적에 목을 맨 이유

조회수 2019. 8. 15.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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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는 내게 쓰리고 아픈 추억이다.

* 본 글은 2017년 9월 9일 직썰에 발행된 정운현 님(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글입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 당시 남대문로 2가(현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쪽)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특위 해산 후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됐다.

반민특위는 해방 후 제헌국회가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을 목적으로 구성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이다. 초대 위원장에는 임시정부 문화부장(현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한, 경북 고령 출신의 김상덕 의원이 선출됐다.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전 화신 사장)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특위는 우여곡절 끝에 그해 8월 문을 닫을 때까지 친일파 청산을 위해 활동했다.


반민특위 설치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제헌국회는 일제하의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헌법 부칙에 근거해 법률 제3호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친일경찰 등 반민족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독립운동가 출신의 이승만 대통령조차도 이들의 편에 서서 거들고 나섰다. 국회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6.6사건)에 이어 1949년 6월 26일 민족진영의 거두 백범 김구가 피살되면서 특위는 마침내 와해되고 말았다.

반민특별재판부의 재판 광경. 악질 친일파나 유명한 친일파 재판 때는 방청객이 넘쳐나 법정 밖 복도에서도 재판을 지켜봤다고 한다.

반민특위는 우리 현대사에서 마치 생인손과 같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활동 기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중도에 문을 닫은 것이 그 하나요, 활동기록의 상당부가 유실돼 그 실상조차 알 수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이따금 친일파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바늘에 실처럼 따라 나오는 것이 반민특위다. 오죽하면 참여정부 시절 ‘제2의 반민특위’가 구성돼 국가 차원에서 두 번째로 친일청산 작업에 나섰겠는가.


80년대 후반부터 친일파 연구를 해오면서 나는 곳곳에서 반민특위와 마주쳤다. 더러는 사람으로 더러는 문서로, 또는 행사장에서. 아픈 생채기를 드러낸 채 내 앞에 나타난 반민특위를 나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사진 한 장, 문서 한 장을 입수하기 위해, 또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의 증언 한 토막을 듣기 위해 백방으로 뛰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 돼버렸다. 현재로선 더 이상 남아 있는 자료도 없고, 증언할 사람도 거의 다 죽었다. 반민특위는 이제 쓰리고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 반민특위 조사관 임명장 최초 입수 공개

90년대 중반, 지금은 심산김창숙기념관에서 일하는 홍소연 선생(전 백범기념과 자료실장)이 전화를 걸어와 독립운동가 후손 한 분을 만나 얘기를 좀 들어보고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 60대 초반의 여성이 남편과 함께 고급 승용차를 타고 회사로 찾아왔다. 김경자 씨(당시 63세)는 자신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소개했는데 남편의 직업은 도선사라고 했다.


김 씨의 부친 김철호 선생은 1901년 경남 통영 태생으로 1926년 중국 광동 중산대 재학 중 의열단에 가입해 선전출판부 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학창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10월 그는 의열단으로부터 일제 침략 원흉 처단과 주요 건물을 파괴하라는 밀명을 받고 극비에 귀국해 고향에서 지하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신간회 통영지회에 가입해 지하활동을 벌였다. 또 1929년 11월 조선박람회 개최를 기해 일제 요인 암살, 주요기관 파괴 공작 중 서응호·윤충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929년 12월 7일 출옥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신문 보도 등에서 확인됐다.

반민특위 경남조사부 김철호 조사관의 임명장(1949년 2월 1일)

한편 김 씨 등 자녀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집안 친척인 김용식 전 외무장관이 펴낸 회고록 <새벽의 약속>(김영사, 1993)을 통해 부친이 항일투쟁 활동을 한 사실을 알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보훈처에 포상신청을 했다. 그런데 보훈처는 김 선생에 대한 포상을 보류했다. 이유는 출옥 후의 행적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출옥 후에 변절했을 가능성이 있어 당장은 포상이 어렵다고 하더라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부친의 유품 중에서 찾은 것이라며 임명장 하나를 꺼내놓았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명의의 단기 4282년(1949년) 2월 1일 자 제4호 임명장이었다. 김 씨의 부친 김철호 선생은 반민특위 경남조사부 조사관으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로부터 임명장 사본을 입수한 나는 당시 자주 기고하던 경향신문사의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주간경향> 전신) 1994년 10월 27일 자에 단독으로 공개했다. 재판기록 외에 반민특위 관련 문건으로는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기사에서 “출옥 이후 해방까지 그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으나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임명된 사실로 미뤄 그가 변절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보훈처의 과도한 처사를 지적했다. 이 기사가 주효했는지는 몰라도 김철호 선생은 이듬해 1995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추서 받았다. 

2. 10년 걸쳐 <반민특위 재판기록> 풀어내

친일파들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곳곳에서 마주치는 게 반민특위였다. 그런데 정작 반민특위와 관련된 자료는 기껏해야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초부터 본격 활동을 개시하면서 문을 닫을 때까지 총 688명의 반민피의자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이들에 대한 재판기록은 도무지 접할 길이 없었다. 반민특위 활동이 종료되자 그 업무는 대검찰청과 대법원으로 이관됐고 관련 자료도 이관됐다고 했다. 어떤 분은 국회 사무처로 업무를 이관했으므로 국회도서관에 관련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곳까지 두루 살펴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반민특위 재판기록은 보관돼 있지 않았다.

반민특위 재판기록 원본. 조사관마다 필체가 다른 데다 한자투성이의 흘림체여서 해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보관 중이던 <반민특위 재판기록>의 일부를 영인본(총 17권)으로 출간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얼른 한 질을 구입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4년 뒤 현대사 연구자들이 모인 어떤 모임에 갔다가 반민특위 재판기록 얘기가 나왔다. 다들 ‘그림의 떡’이라는 반응이었다. 이유인즉슨 조사관들이 작성한 재판 관련 문서가 한자투성이인 데다 글씨도 제 각각이어서 해독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초서투성이의 한문을 읽어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재판기록의 원본 상태가 좋지 않은 곳도 적지 않았다. 어찌어찌해 결국 내가 재판기록 풀이를 맡게 됐다. 나는 그 무렵 간간이 친일파 관련 글을 기고해 오던 순국선열유족회의 기관지 <순국>에 1997년 8월호부터 연재하기 시작해 2006년 8월호에 마쳤다. 햇수로 꼭 10년간 연재한 셈이다. 이를 묶어 2009년 8월 도서출판 선인에서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으로 펴냈다.

꼭 10년 만에 풀이를 마치고 2006년에 묶어낸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

이 책에 수록된 64명(여성 2명 포함)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다수가 유죄를 받은 친일경찰을 비롯해 습작자(작위 세습자), 도회 의원(현 도의원), 중추원참의, 기업인, 군수업자, 종교인, 경방단 관계자 등이 포함돼 있다. 인물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검거-조사-기소(구속)-재판 등 일련의 과정을 담고 있다. 다만 일련의 재판 전 과정을 거친 거물 친일파들의 경우 자료가 방대하나 특위 조사 후 혐의내용이 경미해 풀려난 사람의 경우 관련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원전 17권 가운데 단독으로 한 권 분량을 차지한 사람은 경방 사장 김연수, 화신 사장 박흥식, 중추원참의 조병상 등 3인에 불과했다. 64명의 분야별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경찰 - 김찬욱 김창영 노기주 박종표 송병헌 유지창 윤장섭 이중화 장명원 장자관 전정윤 최준성 최탁

▲ 도회/부회 의원 - 김두하 김상홍 성원경 손재하 염경훈 오명진 오숭은(변호사) 허기엽 현준호 홍종철

▲ 중추원 참의 - 김연수 김원근 김화준 노영환 민영찬 이기승 이명구 장직상 한규복 현준호 홍종철

▲ 습작자 - 김정록 박정서 윤강로 이경우 이원구 조원흥

▲ 공무원 - 김덕삼 김창영 김혁 소진문 손영목(도지사) 오의관 이관석(公醫) 한규복(도지사)

▲ 군수업자 - 신용욱(항공기 제조) 이문환(철공업) 최진세(군납)

▲ 기업인 - 김연수(경방 사장) 박흥식(화신 사장) 현준호(호남은행장)

▲ 종교인 - 목사(김길창, 양주삼, 전필순) 승려(한능해) 궁사(이산연)

▲ 언론인 - 정인익(매일신보 편집국장) 홍순복(매일신보 충북지사장)

▲ 경방단 관계자 - 박순기 조병상 편무재

▲ 기타 - 이기권(관동군 협력) 이인희(경북 예천 재산가) 편덕렬(밀정)

3. 반민특위 관계자들 증언집 <증언 반민특위> 출간

<반민특위 재판기록> 영인본이 출간되자 반민특위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반가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료의 부족으로 아쉬움도 컸다. 반민특위에 불려온 반민 피의자 가운데 재판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은 1할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어떤 연유에선지는 몰라도 마지막 결심 공판자의 재판자료는 온전하게 보존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주요 피의자들의 재판자료는 전부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나에겐 오히려 재판기록 전체에 대한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94년 10월 반민특위 경남지부 김철호 조사관의 임명장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돼 특위 관련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게 됐다. 자료 수집을 위해 있을 만한 관공서 몇 군데와 개인을 수소문했지만 전부 허사였다. 특위 와해 후 격동기를 지내오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없앴거나 아니면 알게 모르게 유실된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자료 수집은 포기하고 대안으로 관계자 증언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나로서는 고육지책이었다. (앞서 1995년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함께 <반민특위 발족에서 와해까지>(가람기획)를 공동으로 펴낸 바 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을 지낸 이원용 선생(2002년 작고)

다행히 당시만 해도 특위에 관계했거나 특위를 취재했던 기자들이 몇 분 생존해 있어서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때 만나 인터뷰를 한 분으로는 이원용 특위 총무과장(중앙사무국장이 공석이어서 사실상 특위 사무국장이었음), 이병창 특경대 부대장, 임영환 총무과 서기, 조덕송(당시 국제신문 기자), 오소백(당시 합동통신 기자), 김정육(김상덕 특위 위원장 아들) 선생 등 총 여섯 분이었다. 이분들 가운데 생존자는 김정육(현재 82세) 선생뿐이다.


여섯 분 가운데 가장 유익한 얘기를 들려주신 분은 특위 관계자 가운데 최고위급 인사인 이원용 선생이었다. 이 선생은 특위 실무책임자인 총무과장 이외에도 위원장 비서관, 예산 집행관, 조사관 등 네 가지 업무를 겸하고 있어서 특위 업무 전반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 선생은 청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특위의 처음과 끝을 소상히 증언해주셨다. 특위 내 자리 배치는 물론 조회 때의 구령 내용까지 기억해내서 적어주셨다. 친일경찰 김태석, 도지사 출신의 김대우, 언론인 정국은 등을 체포해서 조사한 얘기 등도 자세히 들려줬다. 


반민특위 출입기자 가운데 오소백 선생은 특별히 기록해둘 만한 분이다. 당시 일간지 기자들이 통신을 많이 활용하던 시절이어서 통신사 소속 기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당시 오 선생은 편집국장으로부터 ‘반민특위에 미친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특위 취재에 열성을 보였다. 선생은 필자와 만났을 때 그 때의 일을 두고 “‘이건 누군가 지켜봐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 선생은 나중에 <특위 방청기>를 책으로 펴낸 바 있는데 반민특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부기해 둘 것은 반민특위 관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탄압을 받아 어렵게 생활했다는 점이다. 


반민특위 관계자 6인을 인터뷰하여 묶어낸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표지

책 말미에는 특별한 인물의 인터뷰가 부록으로 실렸다. 1980년대 초 제3국을 거쳐 망명한 후 한국으로 들어와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던 신경완(가명·1922년생) 씨 인터뷰인데 그는 ‘북한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남한의 주요 인사들의 납북경위와 북한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들의 최후를 처음으로 소개한 <압록강변의 겨울>(이태호 저)은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신 씨의 증언은 남한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친일파 청산실태를 뛰어난 기억력으로 생생하게 증언한 것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 선생은 나와 인터뷰를 한 지 꼭 3개월 뒤인 1998년 9월 18일 작고했다.

4. ‘제2의 반민특위’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근무

‘제2의 반민특위’ 친일규명위원회.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31일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출범식 장면. 오른편에 선 여성이 특별법을 발의한 김희선 전 의원

‘제2의 반민특위’ 친일규명위원회.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5월 31일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출범식 장면. 오른편에 선 여성이 특별법을 발의한 김희선 전 의원

특별법의 정식 명칭은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다. 이 법안은 당시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의 주도로 2003년 8월 14일 국회의원 155명이 발의해 같은 해 11월 국회 과거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위원회에 회부됐다. 2004년 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의과정에서 반려됐다가 같은 해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돼 3월 22일 정식 공포됐다. (법률 제7203호) 그러나 이 법안은 미처 시행하기도 전에 7월 14일 개정안이 발의됐다. 그 이유는 법 제정 과정에서 당시 다수당인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신)의 반대로 누더기 법안이 돼버린 탓이었다. 결국, 그해 12월 29일 원안 일부를 수정한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이때 법안 명칭 가운데 ‘친일’이 삭제된 채 2005년 1월 27일 정식 공포됐다. 위원회 사무실은 청계천 입구 옛 갑을빌딩에 있었으며, 직원 수는 조사관, 전문위원, 행정부 파견인력 등 110여 명, 연간 예산은 총 70~80억 원에 달했다.


위원회는 2006년 12월 6일 이완용 등 제1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을 선정·공개했으며 이듬해 12월 6일에는 민영휘, 송병준 등 제2기 친일반민족행위자 195명을, 2009년 11월 27일에는 제3기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명을 공개했다. 3기에 걸쳐 친일반민족행위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총 1,005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전부 관보에 게재됐다. 말하자면 이들은 ‘국가공인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 민간 연구소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4,389명이 수록됐는데 이는 선정기준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친일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시절의 필자(2006년 말)

위원회는 반민특위가 못다 한 숙제를 마무리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으나 한계도 없지 않았다. 우선 제도적으로 특별법에서 친일파의 범주를 ‘극렬분자’로 한정한 데다 지나치게 증거주의를 채택해 결과적으로 대상자 수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 위암 장지연 등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밖에 3부에서 추천된 위원들이 회의과정에서 과도한 이념논쟁을 벌였으며 위원 가운데는 역사 분야와 무관한 법률가(변호사, 법학자)가 지나치게 많아(초기 11명 중 5명) 위원들의 전문성 문제도 적지 않았다. 


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친일인사 명단과 조사결과를 4부 25권, 2만1,000여 쪽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로 발간하고 11월 30일 4년간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나는 2007년 말까지 2년 반가량 근무한 후 2008년 초 한국언론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초 위원회 참여를 제의받은 후 나는 근 20년 동안 친일파를 연구한 경험도 살릴 겸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참여했다. 그러나 강만길 위원장의 독선적인 기관운영 등으로 인해 나는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큰 기대를 하고 몸을 담았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 것은 나로선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위원회 시절 목격한 이런저런 일들을 언젠가는 비망록으로 남길 생각이다.

5. 노경식 극본 ‘연극 반민특위’ 대본 감수

지난 6월 말, 페이스북에서 인연이 닿은 원로 극작가 노경식 선생께서 이메일로 연극 대본을 하나 보내왔다. 놀랍게도 연극 제목이 ‘반민특위’였다. 노 선생은 내게 “혹여 망발은 없는지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다. 과거 내가 반민특위 관련 책을 몇 권 낸 것을 주목해 일종의 감수를 받고자 함이었던 같은 데 참고문헌에 내가 쓴 책도 몇 권 들어 있었다. 나는 원로작가가 체면 불구하고 일부러 부탁하신 것이어서 내용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연극 반민특위’ 포스터

‘반민특위’ 대본은 총 11장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올해 ‘늘푸른 연극제’에 올릴 예정이라고 했다. 도입부의 소개 글에 따르면 이 대본은 2005년에 첫 집필을 했으며 그해 문화예술위원회 ‘신작지원사업’에 선정돼 ‘극단 미학’의 공연으로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공연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후 재공연 기회를 찾다가 이번에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됐다고 했다. (8.11~20, 대학로 아코르예술극장 대극장)

‘연극 반민특위’ 공연 개막식 날 노경식 선생님과 함께

때는 반민특위가 한창 활동하고 있던 1949년 여름 서울, 장소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등 시내 여러 곳이 등장한다. 등장인물은 이승만 대통령,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태선 서울시경국장, 특위 조사관 등을 비롯해 대표적인 친일경찰인 노덕술, 최운하, 윤기병, 홍택희, 그리고 친일귀족 이기용, 춘원 이광수, 민족대표 33인 출신의 최린, 테러리스트 백민태 등이 등장한다. 하나 재미난 것은 중간마다 해설자 겸 반민특위를 취재하는 ‘정(鄭) 기자’라는 햇병아리 기자가 등장했다.


8월 11일 개막식 날 대학로에 있는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장 입구 로비에서 노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윽고 시간이 돼 막이 올랐는데 무대는 반민특위 본부에서부터 공판정, 경기도 포천 광릉 숲,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정 기자의 집, 남대문로 거리 등 종횡무진으로 넘나들었다. 재판과정에서 친일파들의 구구한 변명, 반민특위 반대 관제 데모, 이승만과 김상덕 위원장 간의 논쟁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한 시간여 동안 이어진 공연은 잦은 무대 변화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그간 논문, 저서, 학술발표회 등 학술의 영역에 국한돼 다뤄져 왔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형태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이 나로선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최근 들어 근현대사물이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역사가 역사책 속에만 갇혀 있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우리 민족의 통한인 반민특위를 대중적 공감대로 풀어내 장편 소설이나 영화로도 접할 날을 기대해 본다.

6.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일가 3대의 비극사

반민특위 관계자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6인 가운데 생존자는 김정육(82) 선생뿐이다. 그때 쌓은 인연으로 나는 김 선생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앞에서 소개한 ‘연극 반민특위’ 건으로 지난 7월 말 모처럼 전화를 드렸다. 연극 개막식 때 김 선생님을 초대하면 어떻겠냐고 노경식 작가에게 말씀드렸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기에 김 선생님의 일정이 어떠신지 일단 내가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전화 속 목소리에서부터 왠지 불길했다. 힘이 없고 참담한 분위기였다. 김 선생님께 연극 얘기를 들려드리고 참석 가능 여부를 여쭈었더니 어렵다고 하셨다. 작년에 심장 수술을 한 이후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드님이 대장암이 재발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셨다. 김 선생님의 아드님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유일한 손자다. 3대에 걸쳐 이 집안에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목도하게 되자 나는 목이 메는 듯했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위원장은 경북 고령 출신으로 일본 유학 시절인 1919년 ‘도교 2.8선언’의 주모자 가운데 한 분이다. 이후 의열단에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 문화부장(현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해방 후 제헌국회에 진출해 반민특위 초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돼 북에서 생을 마쳤다. 김 위원장은 아들 김정육 선생은 부친이 납북되면서 성장기를 어렵게 보냈으며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으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50이 되도록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40이 넘어서 만난 부인과 잠시 단란한 삶을 꾸렸으나 얼마 뒤 부인이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 하나 있는 아들마저 암으로 38세에 생을 접었다.


김 선생 집안의 딱한 사연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전하면서 모금 운동을 했는데 3일 만에 252만 원이 모였다. 며칠 뒤 김 선생님의 아드님이 입원해 있던 건대병원으로 문병을 가서 모금한 돈을 전해드리고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아드님은 지난 8월 25일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세 살짜리 딸과 만삭의 아내, 그리고 팔십이 넘은 부친을 남겨둔 채.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정부 요로에서 관심을 표명했다. 이낙연 총리는 조화와 함께 배재정 비서실장을 보내 대신 조문했다. 지난 5일 열린 국무회의 때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김 선생님의 거처를 알아보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서울시 산하 공공의료기관인 서울의료원(원장 김민기) 측은 김 선생님의 건강 문제를 돌봐드리겠다고 밝혔다. 감사한 일이다.

김상덕 위원장의 손자 김진영 씨의 빈소. 김 위원장의 아들 김정육 선생과 손부가 빈소를 지키고 있는 모습

새 정부 출범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유공자 예우 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밝혀왔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얘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반가운 일이다. 독립유공자 김상덕 선생이 반민특위 책임자를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 김정육 선생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이런저런 탄압을 받았다. 그 후 김 선생의 집안에 불어 닥친 잇따른 불운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반민특위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인 김정육 선생의 삶은 허망하게 막을 내린 반민특위를 닮았다. 부친과 아내, 그리고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을 김 선생을 생각하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아직도 막을 내리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빠져들고 만다.

* 외부 필진 정운현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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