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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썰

이승만 정권이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이승만 정적' 조봉암

2019년 7월 31일은 조봉암 서거 60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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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 31일 직썰에 발행된 글입니다. 내용을 추가해 재발행합니다.

▲ 법정에서 재판받는 죽산 조봉암

1959년 7월 31일 10시 45분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집행장으로 ‘머리를 산뜻하게 다듬고 평소에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은’(박태균, <조봉암 연구>) 사형수가 도착했다. 그는 대기하던 집행관과 형무소 간부들 앞으로 태연하게 걸어갔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는 무심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재심 기각 다음 날, 죽산 처형되다

집행관의 인정신문과 판결문과 재심 기각 사유 낭독 등 의례적인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에게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가슴에 붙은 번호는 2310, 본적은 경기도 인천시, 현주소는 서울시 충현동, 나이 61세의 이 사형수가 바로 한국 정치사에서 1세대 진보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죽산 조봉암(1899~1959)이었다. 집행관이 유언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 사형집행 보도(1959.8.1.)

출처ⓒ조선일보

유언에서 밝혔듯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던 조봉암을 이승만 정권은 간첩으로 조작해 처형했다. 이 최초의 ‘사법살인’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인민혁명당 사건 등 또 다른 사법살인으로 이어지면서 나라 안에 진보정당과 진보정치의 맥을 끊어버렸다. 


조봉암은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통일 방안으로는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다. 진보 정당에 대한 그의 구상은 1946년 6월 23일 인천시민대회에서 배포한 성명서에 드러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정당의 윤곽은 아래와 같다.

1. 연합국의 승리에 의하여 그들의 호의로 해방의 기쁨을 얻은 우리 조선 민족은 민주주의원칙에 의하여 건설함에 있고, 어느 일 계급이나 일 정당 독재나 전제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2. 조선 민족은 자기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민족 전체가 요구하는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고, 공산당이나 민주의원의 독점 정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3. 현재 조선 민족은 공산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으로 된 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으로써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는 것.

4. 우리 조선 민족은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연합국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며 또 진심을 협력하여서 건국에 진력할 것이요, 지금 공산당과 같이 소련에만 의존하고 미국의 이상을 반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

5.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것.”

최초의 진보정당 ‘진보당’ 창당

해방 전 독립운동 과정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 등에 참여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계속해 온 죽산은 1946년 5월 우익계 신문지상에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를 게재하면서 사상적 전환을 꾀하게 된다. 식민지 시기 동지였던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 형식을 통해 조선공산당의 정책과 활동을 비판했던 죽산은 같은 해 8월 기자회견에서 반공노선을 천명함으로써 사회주의와 결별했다.

▲ 제2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단. 왼쪽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1952 7. 10.)

▲ 죽산 조봉암은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조봉암은 대중적 인기가 매우 높은 정치인이었다. 이승만(1875~1965)은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된 농지개혁의 주무장관으로 죽산을 등용했다. 북한에서는 이미 해방 직후에 ‘무상몰수·무상분배’의 방식으로 농지개혁이 이뤄진 터 일제와 친일 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려 온 농민들은 정부의 농지개혁을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친일파 지주계급에 부정적이었던 조봉암을 지주 중심의 한민당을 견제하면서 농지개혁을 단행할 적임자로 보았다. 노회한 이승만은 친일파와 우파 일색의 인물들만으로는 미국과 유엔의 지지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해방 후 전향해 정부 수립에 참여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했다.(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 참고, 이하 같음) 


한민당의 제동으로 쉽지 않았지만 농지개혁을 치러낸 죽산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를 이승만은 경계했다. 두 차례에 걸쳐 국회부의장을 지낸 죽산이 2대 대선부터 이승만에게 도전하게 되면서 그는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으로 떠올랐다.

이승만의 정적으로 희생되다

죽산은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려 216만여 표를 획득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보수 독재자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조봉암은 당시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조봉암의 좌파 성향을 문제 삼아 야권 연합 운동을 접은 상태에서도 216만여 표를 얻었다. 그것은 야당이 지지자들을 향해 무효표가 될 ‘신익희 추모표’(대선 기간 중 사망)를 유도해 무려 185만여 표에 이르는 무효표가 발생한 가운데 거둔 성과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명실상부한 ‘진보 정치세력’을 대표하게 된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은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의 무자비한 정치탄압의 표적이 됐다. 조봉암이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것은 이승만 세력이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인 공작의 결과였다.

▲ 진보당 간부 구속을 전하는 동아일보(1958. 1. 14.)

이 독재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사법살인’에는 법조계가 동원됐다. 보수신문과 야당, 미국에서도 침묵 또는 ‘묵시적 동조’로 이 사법살인을 도왔다. 구속되기 전 측근들이 죽산에게 해외망명을 권했으나 그는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1958년 개정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다. 죽산에게는 간첩죄와 무기불법소지죄 등도 병합됐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통일방안으로 진보당이 제시한 ‘평화통일론’도 법정에 불려 나왔다. 검찰의 기소 이유는 거의 억지였다.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

▲ 조봉암 추모비(211년 12월)

▲ 망우리 묘소 앞에 세운 죽산의 어록비

▲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원 묘역에 있는 죽산 조봉암의 묘소 (2018년 6월 16일 촬영)

첩자 양명산을 내세워 불순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모략에도 불구하고 1심은 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용공판사를 죽이라는 등의 관제시위가 이어지고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이 세 차례나 조봉암 문제를 언급하는 등 압박 속에 마침내 고등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그것은 후대에 자행된 사법살인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절차였다.


재심청구도 기각됐다. 재심의 주심 판사로 대법원의 주심이었던 김갑수가 배당된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보통 사형수는 몇 차례 재심청구를 하고 확정판결 뒤에도 한두 해 정도 형의 집행이 연기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죽산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대법원 확정 판결 5달 만에, 재심 청구가 기각된 지 하루 만이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조봉암 전 진보당 중앙위원장에 대한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당을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군부대에 의해 불법 체포·감금된 증인의 진술 이외엔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사법살인은 52년 만에야 바로잡혔다. 


그러나 조봉암은 이미 흙으로 되돌아갔고 그의 평화통일론과 진보정치의 맥도 끊어졌다. 죽산의 진보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에 근접했던 진보정당이었으나 반공 주류 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채 역사의 무대에서 스러졌다. 외연을 늘리는 듯했던 통일 논의의 지평도 위축되고 오랫동안 사라져야 했다.

52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선고

2007년 9월 27일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의 조봉암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작업의 결과와 결정문을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보당 창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진보당이

“우리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근로대중을 대표하는 주체적 선도적 정치적 집결체이며 변혁적 세력의 적극적 실천에 의하여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착취 없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폐기·지양하고 주요 산업과 대기업의 국유 내지 국영을 위시로 급속한 경제건설, 사회적 생산력의 제고 및 사회적 생산물의 ‘공정 분배’를 완수하기 위하여 계획과 통제의 제 원칙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에서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견제하고 진보당 세력의 주권 장악 하에 ‘피 흘리지 않는 평화적 한국통일’을 실현한다.”

는 등의 강령·정책을 채택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이 허용하는 합법적 범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논의 또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비현실적인 북진통일론이 횡행하던 시대에 유엔을 통한 평화통일론을 주창했던 정치인 죽산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며 그가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규정했던 ‘진보주의’를 거듭해 읽어본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하 2019년 7월 29일 추가)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와 인천광역시가 주관하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60주기 추모제가 7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 선생의 묘지에서 열렸다. 인천 강화 출신의 죽산은 60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11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에서 서거했다. 


인천광역시는 민선 7기 박남춘 현 시장이 취임하면서 기념사업을 재개하여 묘역 정비, 선생의 사상과 정치 노선을 재조명하는 토론회 개최 등 기념사업을 벌여왔다. 올 연말에는 조봉암 어록과 연설자료집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죽산은 강화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하는 등 독립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했으나 그가 일제에 국방헌금을 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서훈을 반려해 왔는데 이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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