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14개월 앞둔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안타까운 죽음

조회수 2019. 7. 2. 13: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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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승려, 시인이자 강골의 독립운동가였다.

* 2019년 6월 29일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서거 75주기였습니다. 2018년 6월 28일 작성된 글을 재발행합니다.

▲ 만해는 동지들에 의해 다비된 뒤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혔다. 만해 내외의 무덤 앞에 꽃다발이 놓였다.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열반하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우거 심우장(尋牛莊)에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1879~1944) 큰 스님이 오래 앓던 중풍으로 별세했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반대편 산비탈에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이 강골의 독립운동가는 열네 달 후에 올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향년 65세.


만해는 기미년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선언서 작성에 참여해 공약 3장을 추가하는 등 3·1운동을 주도했고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신간회(1927)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3·1 운동 뒤 3년간 복역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과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만해 대선사

동시에 그는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며 구태의연하게 현실에 안주하는 교계의 자세를 통렬히 비판한 탁월한 불교 개혁가였다. 그의 저서 <불교유신론>(1910)은 불교중흥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 시론이었다.


또 만해는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1926)을 펴냈다. 여기 실린 88편의 시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만해는 불교적 사유와 상상력에 기초해 우리 시의 전통에서 부족했던 형이상학적 깊이를 시에 더해 준 시인으로 기억된다. 


만해는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이다. 이름으로 널리 불리는 용운(龍雲)은 법명(불도에 귀의한 제자들이 받는 새 이름)이고 만해(萬海, 卍海)는 법호다. (법호는 승려의 아호로 ‘사명당 유정’에서 사명당은 법호, 유정은 법명이다.)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을 익혔고 14세에 혼인했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이 있었다. 바야흐로 근대로 문을 열던 시기 나라의 위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터이다.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의 생가터.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됐다.

1896년 열일곱에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해 출가했다. 오세암에서 선(禪)을 닦다가 다른 세계에 관한 관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했다. 1905년 재입산해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해 정식으로 득도(得度)했다. 


불교에 귀의한 뒤에는 주로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했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수행과 교육, 포교, 종단 운영, 승려 인권과 결혼 등을 다룬 이 역저에서 그는 참선과 염불당의 폐지, 승려의 결혼 등 파격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았으나 그의 논지는 구태의연한 현실에 안주한 채 퇴행하고 있는 불교를 향했다. 


만해는 불교 청년운동의 선구자, 지도자로서 불교개혁을 이어갔다. 그는 1910년 항일 불교 차원의 임제종(臨濟宗) 운동 당시부터 각 사찰의 불교 청년을 조직화해 민족불교를 지향하는 임제종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조선불교회’, ‘불교동맹회’를 조직해 불교 대중화에 나섰다. 1920년대에 그는 불교 자주화, 불교 대중화 노선을 견지하면서 불교개혁을 추동했고 많은 불교 청년들의 지지로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추대됐다.

▲ 백담사 만해기념관 앞 만해 흉상
▲ 설악산 백담사 경내에 세운 만해 시비 . 그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새겨져 있다.

만해는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했는데 이때 3·1 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1878~1958, 3·1운동 민족대표, 뒤에 변절 ) 등과 교유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그는 중국 동북삼성(三省)으로 가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 백용성(1864~1940) 스님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참여했다.

평생을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산 강골의 삶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만해는 육당 최남선과 충돌했다. 그는 내용이 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마지막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더하는 데 데 그쳤다. 만해는 3·1운동의 주모자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돼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만해는 형무소 안에서 스스로가 정한 옥중 투쟁 3대 원칙,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을 지키기 위해 면벽 참선에 매진해 일제의 심문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심문이 시작되면서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참회하는 자술서를 쓰는 동지들을 향해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만해는 법정에서 왜 말이 없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인가. 나는 할 말이 많다.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구했다. 재판장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수백 년 동안 부패한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 문명이 뒤떨어진 것이 합하여 망국의 원인이 된 것이다.

원래 이 세상의 개인과 국가를 막론하고 개인은 개인의 자존심이 있고 국가는 국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니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니, 금번의 독립운동이 총독 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것인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

4천 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다 하자면 심히 장황하므로 이곳에서 다 말할 수 없으나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내가 지방법원 검사장의 부탁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감옥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보면 다 알 듯하오.”
▲ 만해 한용운의 친필. 독립기념관 소장하고 있다.
▲ 망우 공원 묘역 안의 만해 어록

1926년 만해는 백담사에서 탈고한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표제시 ‘임의 침묵’은 불교의 윤회설과 공(空)사상에 바탕을 두고 임을 잃은 슬픔과 그 초극의 의지를 경어체와 여성적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는 만해 시의 백미다.


만해는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주도적으로 결성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의 소임을 맡았다. 신간회는 광주학생항일운동(1929)이 일어나자 현장에 진상조사위원을 파견해 시위를 지원하는 등 민족운동을 지도해 갔다. 


만해는 1930년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해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썼고 1935년에는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연재하는 등 이후 소설 여러 편을 발표했다. <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고자 배경을 청나라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을 묘사해 일제에 대한 저항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진보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소설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만해가 만년에 살았던 심우장. 일제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일부러 북향으로 터를 잡은 집이다.

1937년에 일송 김동삼(1878~1937)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는데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만해가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해 심우장에서 오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는 이시영·김동삼·신채호·정인보·홍명희 등과 교유했다. 모두 일제에 협력은커녕 일상적 타협마저 거부했던 강골의 지사들이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1880~1936)의 유해를 이듬해 청주에 봉안한 뒤 그 비문은 쓴 이가 만해였다. 최남선이 변절하자 그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해 본척만척했다는 일화는 지사 만해의 풍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 거부, 학병출정 반대운동도

그는 죽는 날까지 일제에 대해서 비타협적 태도로 일관했다. 중일전쟁(1937)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강연 협조 등도 거부했음은 물론이다.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했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친일 부역자들이 강연으로 일간지 기고로 학병 지원을 독려하던 때에 그는 단호한 반대 투쟁에 나섰다.

▲ 심우장에 들어서 있던 만해기념관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하여 재개관 (1990) 하였다.
▲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있는 만해문학박물관. 백담사 만해마을 안에 있다.

1938년에는 그가 직접 지도해 온 불교 계통의 민족투쟁 비밀결사 단체인 만당(卍黨)사건이 일어났다.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그도 서대문 형무소에 재투옥됐다가 석방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만년에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의 생계는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방응모, 만공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줬다. 그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했다.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생했을 때 만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이튿날인 6월 29일 만해 한용운 대선사는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5세로 열반에 들었다.

▲ 시집 <님의 침묵>(1926)

1962년 정부가 만해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한 이래 그를 기리는 사업이 줄을 이었다.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1967년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고향인 충남 홍성의 남산공원과 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3년에는 신구문화사에서 <만해 전집> 6권이 간행됐다. 1989년에는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생가터가 충남 기념물로 지정됐고 이듬해에는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세워졌다.

“우리나라에 귀한 사람 하나가 만해”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됐고 만해기념관(남한산성),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 만해기념관은 충남 홍성 생가와 남한산성, 그리고 백담사에도 세워져 모두 3개소에 이른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의 백담만해마을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됐다.


만해는 동지들에 의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뒤에 그가 53세 때 혼인한 부인 유씨가 그의 옆에 묻혔다. 지난 6월 중순 찾았던 망우리 사잇길, 만해 묘소 앞 상석에는 누군가가 바친 꽃다발이 모셔져 있었다.

만해와 동시대를 살았던 당대의 선지식(善知識) 만공(滿空, 1871~1946)은 만해가 입적한 뒤에 아예 서울에 가지 않았다. 그는 만해를 일러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 그 하나가 만해였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임종했던 북향집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란 많은 삶을 마감하면서 만해는 마침내 소를 찾을 수 있었을까.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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