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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모르던 할머니가 숫자 배우고 가장 먼저 한 일

조회수 2019. 5. 21.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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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 교육'을 예능으로 끌어온 MBC '가시나들'

한때 ‘가시나’는 ‘억압’과 동의어였다. ‘계집아이’의 방언일 뿐인 그 단어가 야만의 시대와 조응하며, 그 대상인 여성들의 삶을 옭아맸다. ‘가시나가 무슨…’이라는 말은 거대한 벽이었다.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꿈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가사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오빠와 남동생을 뒷바라지해야 했다.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가야 했고, 걸핏하면 밥상을 뒤엎는 남편들에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로지 그들이 ‘가시나’였기 때문이었다. 


김훈은 <연필로 쓰기>의 ‘할매는 몸으로 시를 쓴다’라는 꼭지에서 “나보다 5~10살 정도 연상인 세대에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노인들이 많았다. 남성보다도 여성 노인들의 문맹이 더욱더 심했다. 조혼, 육아, 남녀차별, 가사노동, 생산노동, 시집살이처럼 여성의 생애에 유습된 억압이 그 배경이었다”고 쓰고 있다. 또, “문맹 노인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전쟁, 이산, 이농, 기아, 가난, 억압의 시대고를 개인의 삶으로 치러냈다”면서 “그들의 생애는 당대사에 편입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 19일 처음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 <가시나들>은 ‘가시나’라는 단어에 덧입혀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부터 과감히 걷어냈다.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들’(가.시.나)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 경남 함얌의 다섯 할머니(이남순, 박무순, 김점금, 박승자, 소판순)는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할머니들을 위한 문해 학교에서 말이다. 


선생님으로 학교에 찾아온 배우 문소리는 “공부도 시작하고... 뭐... 사랑도 좀 시작하시고...”라고 웃음을 이끌어냈다. 할머니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부터 할머니들에게 ‘가시나’는 희망의 단어다. 시작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나’였기에 할 수 없었던 일들과 펼칠 수 없었던 꿈들, ‘가시나’였기에 강요받았던 삶과 견뎌내야 했던 짐들을 <가시나들>을 통해 조금이나 풀어낼 수 있을까.

<가시나들>은 ‘인생은 진작 마스터했지만 한글을 모르는 할매들과 한글은 대략 마스터했지만 인생이 궁금한 20대 연예인들의 동고동락 프로젝트’를 담았다. 한글 수업 파트너로는 (여자) 아이들 우기, 위키미키 최유정, 우주소녀 수빈, 이달의 소녀 이브, 배우 장동윤이 출연했다. 그들은 할머니들과 1:1로 짝꿍을 이뤄 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는다. 할머니들의 옆자리에 앉아 도움을 주는 식이다. 그리고 방과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 함께 하루를 보낸다.


첫 수업시간을 맞아 할머니들과 짝꿍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묻고 답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 발표까지 한다. 짝꿍만 나가는 줄 알고 손을 번쩍 들었던 소판순 할머니는 자신도 나오라는 말에 “나는 뭐 읽을 줄도 모르는데.. 조졌네~ 조졌어~”라며 웃음을 자아냈다. 


이남순 할머니는 “편안히... 편안히 살다가 가는 기지!”라며 담담히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지보다 어떻게 죽을지를 더 많이 생각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박승자 할머니는 ‘잉꼬부부’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말한다. “이 나이에 글도 모르고 우짜꼬”라며 쑥스러워하던 박무순 할머니는 흥겨운 춤사위를 보여줬다. 김점금 할머니는 문소리와 생일이 같다는 말에 “아이고 오늘 기분 대낄(대길)”이라며 기뻐했다. 


이후 할머니들은 의성어·의태어를 공부하고, 속담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들은 개가 ‘공공’ 짓는다고 했다. <가시나들>은 이를 틀렸다 하지 않고, 함양에서 개는 ‘공공’ 짓는다고 결론을 내리고 넘어갔다. 교과 과정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 할지라도 ‘틀렸다’고 단정 짓지 않는 열린 태도가 좋았다. 할머니들에게 필요한 건 지적이나 평가가 아니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언어로 자신들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걸 들어주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할머니는 배우면서 어떤 단어가 제일 좋았어요?”
“좋고 나쁘고 뭐... 저.. 저기 우리 일 이 삼 사도 모르니까 큰아들한테 야야 느그 집에 전화할라 카믄 이거 어느 자 어느 자를 누르야 되노 그래 그칸 게 글자를 인자 가르키면서 고래 눌르라 캐요. 그래 인자 그걸 눌르고 저 박무순이 어머니가 글을 좀 아니까 배워보구로 그래가지고 인자 한교도 나간 기라 그래 나가가지고 아들네 집에 전화 눌르던 걸 들여다 본께 아하 아이고나 이 글자, 이 글자 아이고 이 글자가 그리 가는 기구나 싶어서 그래 눌른 게 되는 기라. 신기한 기라 이 글이... 글이 신기한 기라.”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할머니들과 짝꿍들은 쑥을 씻거나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어떤 단어가 제일 좋았냐는 이브의 질문에 이남순 할머니는 큰아들에게 전화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글자를 알게 돼 신기했다고 말했다. 또, 가정방문을 온 문소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우린 시대를 잘못 타고났거든. 얼마나 배가 고프면 벽을 뜯어 묵었을까. 저거 있잖아 벽 발라놓은 거, 그걸 돌아누워 갖고 다 뜯어먹었다니까”라고 말하는 박무순 할머니의 이야기에 숙연해진다.


소리 내 웃다가 갑자기 짠해졌다가, 다시 미소가 번졌다가 어느새 마음이 아린다. 그러나 결국에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시나들>을 만난 시청자들의 심리 변화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가시나들>은 자극적이지 않게 할머니들의 인생을 담아냈고, 한글을 배우는 모습과 짝꿍들과의 소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그 안에 웃음과 감동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는 프로그램이다. 말 그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고 노는’ 요즘 예능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가시나들>은 정부와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문해 교육’을 예능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 실제로 문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시와 일기를 모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김훈은 이를 “정부가 시행한 노인정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이라 평가하면서 “노인을 보호나 관리, 수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인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여서 그들의 말을 사회적으로 통용시켜 주었다”고 높이 샀다. 이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가시나들>은 기존의 노년 세대를 대상으로 했던 예능(MBC <사남일녀>, KBS2 <절찬상영중>)과 달리 할머니들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을 젊은 세대의 공경을 받아야 하는 대상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또 다른 의미의 소외라는 걸 알고 있다. <가시나들> 속에서 할머니들은 함께 공부하며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또, 짝꿍들과도 교우라는 동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훈은 할머니의 글을 읽고 나서 “할매들은 감추거나 꾸미지 않는다. 할매들의 글을 읽으면서, 한 문명 전체가 여성의 생명에 가한 야만적 박해와 차별을 성찰하는 일은 참혹하다. 그리고 그 야만 속에서도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존해온 할매들의 생애 앞에서 나는 경건함을 느낀다”고 썼다. ‘가시나’라는 이유로 일평생 수많은 억압을 받으며 살아왔던 할머니들에게 지금이라도 발언권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가시나들>과 할머니들을 응원한다.

* 외부 필진 버락킴너의길을가라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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