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보다 퇴보한 자유한국당의 5·18 인식

조회수 2019. 5. 21. 09: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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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망언' 징계조차 못 하는 자유한국당
출처: ⓒ사진공동취재단
1996년 8월 26일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전두환·노태우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 및 주모자 처벌에 관한 최초의 근거가 된 것은 1995년 12월 21일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다. 이 법은 민주당 정권에서 제정된 법률이 아닌, 김영삼 대통령 시절 신한국당*이 여당이던 시절 만들어진 법이다. 신한국당은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거쳐 지금의 자유한국당이 됐다.


*신한국당: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김영삼의 통일민주당·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후신. 


물론, 이 때 신한국당이 5·18 특별법에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애초 5·18 특별법은 민주당계 정당에서 꾸준히 발의돼왔으나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1995년 검찰이 12·12 및 5·18 관계자들을 불기소하자 김영삼 정부에 여론의 역풍이 불었다. 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여당에 명령에 가까운 형태로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하지만 민주자유당은 당론으로 특별법 제정 반대를 강하게 주장했다. 실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도 신한국당 1명(최재욱) 및 자민련* 의원 19명이 반대했다. 이 때 강재섭 등 민주정의당계는 아예 불참했다.


*자민련(자유민주연합): 1995년 3월 김종필 등 신민주공화당계 인사들이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만든 정당

출처: ⓒSBS 캡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 검찰

그러나 당시 신한국당에서의 5·18 특별법에 대한 반대 기류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발단이 됐던 검찰의 12·12 및 5·18 관련자 불기소 자체가 성공한 쿠데타는 사법적인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검찰 수뇌부의 판단에서 발로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였던 김윤환이 소급입법이라는 관점에서 당론을 반대로 정했던 것은 일종의 법리 투쟁의 느낌이 더 짙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당시 서울지검은 내란 증거를 입증할 수 없다며 무혐의를 주장하는 파렴치함을 자랑스럽게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 운동 자체에 대한 정체성 논쟁을 오히려 자유한국당에서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과거 전두환·노태우가 이끌던 민주정의당의 직계 후예들도 국회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회의장을 떠났을지언정 지난 2월 8일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최한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처럼 지만원 등의 사람들을 의원회관에 불러 놓고 북한이 개입했네, 안 했네 같은 잘못된 사실을 따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력하게 징계해야 마땅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날 망언을 쏟아낸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 중 고작 한 명(이종명)만 징계 조치했을 뿐 황교안 대표는 모르쇠로 일관 중이다. 


솔직히 이해는 한다. 징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징계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일단 여론이 나쁘니 한 명 정도는 본보기로 잘라내더라도 그들 자신의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생각은 전두환 씨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징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자는 말에 “Good Idea”라고 반응했던 그때 그들처럼 말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그들에게서 어찌 그렇게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물론 훌륭한 공안검사셨던 황교안 대표의 그 근본이 어떻게 바뀌겠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출처: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황교안 대표

그런데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론으로 특별법 발의 직전인 1995년 10월까지 5·18 특별법을 끈질기게 반대하던 민주자유당이 어째서 일부를 제외하고는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이는 95년 10월 19일 당시 민주자유당의 박계동 의원이 폭로했던 노태우 비자금 사태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비자금 사태가 92년 대선에서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 여당은 노태우의 사법처리를 기정사실화하며 비자금의 대선자금 유입이 드러날 시 대국민 사과를 예고까지 한 바 있으며 그전까지 대선자금 공개는 하지 않기로 했었다. (재미있는 게 이때 대변인으로 이를 발표했던 사람이 바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다.)


그 이후 벌어졌던 일은 우리들의 기억대로다. 먼저 김종인 씨(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게 됐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손을 다정하게 맞잡고 재판정에 서게 됐다. 당시 비자금을 폭로했던 박계동 의원은 이후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척을 지고 한나라당에서 활동하다 2006년 술집 동영상이 터지며 정치 생명이 끝나버렸다. 이분이 국회에서 흔들었던 신한은행 계좌 조회표는 2003년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이 그대로 이어받아 디스켓을 복사기에 복사한 종이로 뭇 사람들에게 작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사실 5·18 특별법은 제정되지 못할 뻔 했다가 당시 범여권의 정국 돌파용으로 간신히 낙점돼 통과된 비운의 특별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20년이 넘게 지나서 의원회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의안정보시스템이 통곡을 할 일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망월동 국립묘지도 우리가 만들었는데 홀대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했다고 한다. 일단 저번 의원회관 사건 관련자 징계부터 확실히 한 뒤 처우 개선을 바라도 바라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망월동 국립묘지도 솔직히 등 떠밀려서 만드신 것 아닌가. 말은 똑바로 하자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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