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과 쿵푸킥

조회수 2019. 5. 13.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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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출처: 에릭 칸토나

90년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었던 에릭 칸토나라는 축구선수가 있다. 대단한 실력과 카리스마로 세계적인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초로 비영국인 출신 주장을 맡았던 선수다. 축구선수들이 의례 그렇듯 칸토나는 발을 잘 썼다. 이 선수는 가끔 그 ‘발’을 엉뚱한 곳에 쓰는 게 문제였다. 많은 축구팬의 기억 속에 이 선수가 악동으로 각인된 사건이 있다.


1995년 1월 25일 크리스탈팰리스전. 상대 선수에게 주먹감자를 날린 칸토나가 심판에게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칸토나를 향해 상대편 서포터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 순간, 축구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칸토나는 자신에게 야유를 날리던 관중 매슈 시먼스를 향해 뛰어가 날라차기를 먹였다. 이른바 ‘쿵푸킥’ 사건이다. (칸토나는 실제로 쿵푸를 배운 적은 없다고 한다.)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아연실색했고 다음날 칸토나의 쿵푸킥은 영국은 물론 유럽의 모든 1면을 장식했다. 이 킥 한방으로 칸토나는 화려했던 선수 경력에도 불구하고 = 쿵푸킥으로 기억되는 신세가 됐다.

출처: 유튜브 캡처
칸토나의 쿵푸킥과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

순간의 분기를 참지 못한 대가는 너무나 뼈아팠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은 관중을 적으로 삼은 에릭 칸토나에게 벌금 2만 파운드와 함께 120시간 사회봉사, 9개월 출전 정지라는 초유의 중징계를 내렸다. (원래 칸토나에게는 최소 2주간의 구금형이 내려졌으나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 전화를 해 선처를 부탁하는 바람에 120시간 사회봉사로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 팀의 주장이자 최고의 선수를 잃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선두를 블랙번 로번스에게 내주고 시즌을 망친다.


선수는 경기장 안에서 상대팀 선수와 맞서야 한다. 선수가 관중과 싸워서는 안 된다. 모든 스포츠 경기에 적용되는 (너무 당연하기에 명문화되지도 않는) 제1 원칙이다. 그 대원칙을 어겼던 에릭 칸토나는 지금까지도 비매너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최근 이것과 비슷한 일이 한국정치에서 일어났다. 자유한국당 팀의 '주장'인 나경원 원내 대표는 11일 대구에서 열린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상대 정파의 지지자들에게 린치를 가했다.

출처: ⓒ연합뉴스
11일 문재인 정부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나경원 원내대표

나경원의 달창 발언은 그 표현의 저열함도 놀랍지만, 경기장 안의 선수가 경기의 기본 규칙을 파기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이는 정치권에 난무하던 기존의 막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기존의 막말들이 그라운드 안에서 상대 선수에게 가해지던 반칙이었다면, 나경원의 달창 발언은 선수가 관중석에 똥물을 뿌린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나경원 대표는 ‘그게 그런 뜻인 줄 몰랐다’며 서둘러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 말의 출처가 어디였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이 설화의 본질은 자유한국당 팀의 주장 나경원 대표가 상대팀을 응원하는 관중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고 모욕했다는 것이다. ‘달창’을 조금 수위가 낮은 다른 말로 바꿔 썼다 한들 행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출처: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대대표

달창 발언은 나경원의 쿵푸킥이다. 흥분한 선수가 상대팀을 서포터에게 린치를 가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같다. 관중/유권자가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상대팀 팬들은 언제나 야유를 보낸다. 때로 그 행동이 도를 넘어서면 관중도 징계를 받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선수가 직접 관중을 응징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농부는 밭을 응징하지 않는다.


관중이 야유를 보낼 때마다 선수가 관중석을 넘어 간다면 축구라는 스포츠는 어떻게 될까? 상대의 지지자들이 야유를 보낼 때마다 정치인이 대거리를 한다면 정당은, 대의정치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협회 사무국은 관중에게 발차기를 날린 에릭 칸토나에게 9개월 출전 정지라는 초유의 중징계를 내렸다. 선수가 관중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다시는 경기장에서 그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경원 대표는 유권자에게 혐오의 언어를 쏟아내며 게임의 대원칙을 어겼다. 한국 정치가 민주주의라는 매너 게임을 지속하려면 그에게 어떤 ‘징계’를 내려야 할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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