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뷰 본문

직썰

어린아이에게 아편 약을 먹여야 했던 첫 노동절 당시 상황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1,568 읽음
댓글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 1년 전의 결의에 따라 역사상 처음 열린 메이데이 행사(1890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1890년 오늘(5월 1일)은 역사상 첫 번째 메이데이(노동절)였다. 많은 국가의 노동자는 저마다 자기 나라의 형편에 맞는 형식과 방법으로 메이데이 행사를 벌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일 총파업의 형태로, 독일과 영국에서는 5월 첫째 일요일에,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저녁 시간 대중 집회의 형식으로 첫 노동절 행사를 치렀다. 


노동자들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자 자본가들은 이들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가 확산하는 걸 막으려 갖은 애를 썼다. 자본가와 결탁한 국가 권력의 탄압과 방해가 이어졌지만, 노동자들은 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첫 노동절 행사, ‘노동이 멈추면 세계도 멈춘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선 5만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했고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선 80만 명이 동맹 파업을 결행했다. 벨기에에서는 34만 명이 행사에 참여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메이랜드, 토리노 등지에서 수십만 노동자들이 거리를 행진했다.


러시아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정치투쟁이 펼쳐졌고 프랑스 노동자들은 전국 138개 도시와 광산 지역에서 일손을 놓고 1871년의 파리코뮌(Paris Commune)의 전통과 경험을 이어 파업·집회·시위를 벌였다. 


영국에서는 5월 첫째 일요일에 메이데이 행사를 치렀는데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참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이 행사의 인상과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중앙위원회의 7개의 연단 주위로 수십만 이상의 노동자가 음악과 깃발에 맞춰 끝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밀어닥치고, 비슷한 수의 군중이 개별적으로 몰려들어 가세했다.……(메이데이는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으로) 영국의 노동자가 바야흐로 거대한 국제적인 대열에 합세하고, 드리어 오랜 겨울잠에서 깬 차티스트의 후손들이 전투 대열에 들어섰다.

역사상 첫 번째 메이데이가 성대하게 베풀어질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초반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진 결과였다.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지만, 당시 노동자 계급의 삶은 참혹했다.

노동자의 가족은 판잣집이나 지하실의 구질구질한 방에서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집에서 두 가족 이상이 살기도 했다. 그나마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한 편이었다. 많은 노동자가 움막 속에서 합숙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공원의 벤치나 길거리에서 밤을 지내기도 했다. 먹는 것은 형편없었고, 입는 것 역시 누더기였다. 아버지가 받는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 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젖먹이를 가진 어머니조차도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집에 남은 어린아이는 아무리 울어도 젖을 주는 사람이 없어 온종일 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어린아이가 우는 것을 막기 위해 아편을 넣은 약(팅크)을 먹이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것을 먹이면 위가 마비되므로 어린아이가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해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을 먹이면 체질이 약화하여 어린아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아이들은 6~7세가 되면 공장이나 탄광으로 일터를 찾아 나가야만 했다. 특히 탄광의 갱도에서는 말을 이용하여 수레를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혁대로 자기 몸과 석탄 상자 4, 5개를 실은 수레를 연결해 끌어내는 일을 했다.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굴속에서 중노동으로 시달리다 보니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형적인 신체를 갖게 되곤 했다. 특히 구루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도 못 가고 바로 공장에 들어가 어른들 틈에 끼어 밤늦게까지 기계 앞에서 씨름하게 되니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정상적인 발달이 불가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엥겔스(Friedrich Engels),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1845) 중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기계라고 생각하고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Luddite)’을 벌였지만, 기계를 부수어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적이 기계가 아니라 자본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노동 계급의 각성과 국제 조직

영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결했고 10년 동안의 차티스트(Chartist) 운동을 벌여서 1847년에 10시간 노동법을 쟁취했다. 뒤이어 1856년, 호주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따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1864년에는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제1 인터내셔널)를 창립했다.


1884년, 미국노동총동맹은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해 1886년 5월 1일에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1886년 5월 1일, 노동자 34만 명이 시가행진을 벌였고, 19만 명이 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이 노동을 멈추자 세상도 멈추었다. 이날 노동자들은 목 놓아 ‘8시간 노동과 8시간 휴식, 8시간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을 노래했다.

▲ 1886년 5월 4일 시카고의 헤이마켓 (Haymarket) 광장에서 벌어진 헤이마켓 사건을 묘사한 판화

이틀 후 파업 농성 중인 ‘맥코믹(McCormick) 농기계 공장’에 난입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튿날, ‘헤이마켓(Haymarket) 광장’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가 벌어졌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노조 지도자 한 명이 연설을 시작했을 때, 기동대원 180여 명이 들이닥쳐 집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1886년,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affair)’

노동자들이 ‘평화 집회’라고 항의하는 순간, 누군가가 던진 폭탄이 터져 경찰과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무자비한 경찰의 폭력 진압이 잇따랐다. 이튿날부터 자본가들과 언론은 노동자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주요 노동조합 지도자 대다수가 증거도 없이 체포돼 기소됐다.

1887년 11월 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파슨스·스파이즈·피셔·엔젤 등 4명의 노동자에 대한 교수형 공개 집행됐다. 스파이스는 교수대에서 “언젠가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교살하는 당신들의 명령보다 훨씬 강력해질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들의 시신은 기차 편으로 월드하임 묘지로 향했는데, 2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


이후,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파슨스 등을 순교자로 기리기 시작했다. 1889년에는 파리에서 제2 인터내셔널이 결성됐다. 이 대회에서는 1890년 5월 1일 “모든 사람, 모든 도시에서 동시적으로, 1일 8시간 노동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적 시위를 조직한다”고 결의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0년 5월 1일, 첫 메이데이 행사가 열린 것은 이 결의의 결과였다. 


처형된 앨버트 파슨스의 아내 루시는 4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고 1893년 6월에 헤이마켓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바로 그날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알트겔드(John Peter Altgeld, 1847~1902)는 복역 중이던 필덴 등 3명을 특사로 석방했다. 


이 진보 정치인은 “헤이마켓에서 있었던 폭탄 투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고 범인이 경찰관에 대한 적개심으로 단독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 관련 재판기록을 분석해 8명의 피고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노조 지도자 8명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 루시 파슨스가 모금 운동을 통해 1893년 6월에 순교자들의 묘지에 세운 헤이마켓 순교 기념비

▲ 1909년 미국 뉴욕시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에서 노동자들이 행진을 벌이고 있다.

129돌 메이데이, 그리고 한국

▲ 민주노총의 2019 메이데이 포스터

2019년 한국의 메이데이는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은 여전히 불온한 언어이고 노동의 권리는 가위눌리고 있다. 노조 조직률이 10%가 되지 않는 나라, 대통령 후보가 공공연히 ‘노조’를 적대시해도 아무 일도 없는 나라의 메이데이는 1890년, 129년 전 그날보다 얼마나 진화했을까. (관련 글: 노동 2제(題) - 불온한 시대, 불온한 언어)


근 10년 동안 인상률 한 자릿수에 정체됐던 최저임금이 정권교체 후 2018년(7530원) 16.4% 인상에 이어 2019년에는 10.9% 올라 8350원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1만 원도 되지 않는데도 급격한 인상이라는 소상공인의 반발과 함께 고용 부진의 원인으로 지적되면서 잔뜩 꼬이기만 했다. 민주노총이 ‘계산도 어렵게 바꿔놓은 최저임금, 복잡해도 결론은 임금삭감’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다. 


2019 메이데이 행사를 벌이는 민주노총의 요구는 ① 날로 악화하고 있는 임금·소득 불평등 해소, ②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저임금노동 일소, ③ 노동소득분배구조 개선 등이다. 특히 고 김용균 씨의 희생에도 바로잡히지 않고 있는 불합리를 겨냥하고 있는 간접고용 4대 공동요구안은 ⓵ 안전하게 일할 권리, ⓶ 차별적 처우의 금지, ⓷ 단체행동권 보장, ⓸ 불법 파견 확인 시 정규직 전환 등이다. 


2019 메이데이 투쟁의 주 슬로건은 “노동개악 저지! ILO 협약 비준·노동기본권 쟁취”다.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이라고 자랑이 넘치지만, 정작 결사의 자유(제87호·98호), 강제노동 금지(제29호·105호)는 아직도 비준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결사의 자유를 비준하지 않아 해고자 몇 명을 조합원으로 뒀다고 전교조는 2013년, 합법노조의 지위를 잃었다. 그게 2019년 한국 노동의 현주소다.

*이 글은 2017년 같은 날의 글을 보완했다.


**참고 

- 역사학연구소, ‘메이데이 백년의 역사’(서해문집, 2004) 
- 이상돈 누리집 책 소개: 제임스 그린, ‘헤이마켓에서의 죽음’(2006)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직썰 추천기사>

작성자 정보

직썰

    실시간 인기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잠시 후 다시 시도해 주세요 Please try again in a mo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