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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

조회수 2019. 4. 3. 10: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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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

* 2018년 4월 3일 직썰에 발행된 글입니다. 2019년 4월 3일 내용을 업데이트했습니다.

▲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만든 제주 4·3 70주년 포스터

올해로 4·3항쟁이 70돌을 맞는다. 사람으로 치면 칠순을 맞는 셈이지만 이 슬픈 역사는 아직도 진실의 해원에 이르지 못했다.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 공포(2000)된 지 18년, 대통령(노무현)이 사과(2006)한 지 12년째다. 형식적으로는 이 비극적 역사의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아야 마땅하다.


보수 우파 세력들의 4·3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시작된 것은 2008년 이후 연속으로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부터다. 이들이 부르대는 주장과 논리는 늘 거기가 거기다. 이들은 4·3이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친북좌파들이 주도한 ‘무장폭동’이라 주장하고 진압 작전에 참여한 군경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학살마저 정당했다고 강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 정권 9년 동안 이명박, 박근혜는 한 번도 4·3 행사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4·3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에둘러 드러내면서 극우 세력들의 도발을 묵인했다.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한 2014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러는 각료나 여당 국회의원들이 ‘개인 의견’이라는 형식으로 4·3의 폄훼에 동참하기도 했다.

70돌, 공감과 연대로 상처가 치유돼야

국가가 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이 국가폭력을 사죄하고 묵은 상처를 위무하고자 하는데도 여전히 4·3이 변방의 잊힌 역사로만 기억되는 이유다. 제주 4·3의 지역성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70년은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4·3을 우리의 삶과 역사로 받아들이는 필요한 동시대인들의 공감과 연대는 아쉬움을 남겼다.


‘5·18광주민중항쟁’은 그것을 ‘광주사태’로 인식하는 우리 사회 일각의 인식 때문에 ‘광주’를 쉽사리 넘지 못하고 있다. 광주의 비극을 ‘우리의 역사와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적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제주의 4·3항쟁도 여전히 이 남단의 아름답고 슬픈 섬에 갇혀 있다.

▲ 동백꽃은 잎이 일시에 떨어지는 꽃으로 4·3 영혼들이 그처럼 소리 없이 스러져 갔다 하여 4·3의 상징이 됐다.
출처: ⓒ한겨레
▲ 4.3 당시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힌 귀순 제주도민들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 4.3 당시에 산으로 피신했던 제주도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1948년 5월 촬영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제주 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건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제주 4·3을 대한민국이 아니라 고립된 변방의 역사로만 이해하는 어떤 이들에게 건네는 역사적 정언명령인지도 모른다.

“제주 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

또 ‘4·3 동백꽃 배지 달기 캠페인’을 벌이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제주도 전역에 핏빛으로 피어나는 동백꽃은 다섯 장 꽃잎이 일시에 떨어지는 꽃으로 4·3 영혼들이 그처럼 소리 없이 스러져 갔다는 의미 때문에 4·3의 상징이 됐다.

▲ 동백꽃 달기 캠페인은 4·3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구하는 손길이다.

1988년 여름에 단체여행객으로 처음 제주를 만났던 나는 2000년대 이후 수학여행 인솔교사로 세 차례나 더 제주도를 찾았고, 2010년에는 가족과 함께 제주를 한 바퀴 돌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가르치면서 4·3을, ‘잠들지 않는 남도’를 이야기해줬다.

- 슬픈 섬, ‘잠들지 않는 남도’(2007. 4. 17.)

- ‘순이 삼촌’은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2009. 4. 3.) 

- 순이 삼촌과 너븐숭이, 그리고 4·3 예순두 돌(2010. 4. 4.) 

- 4·3 예순세 돌에(2011. 4. 3.) 

- ‘비목’과 ‘잠들지 않는 남도’ 사이(2015. 4. 5.)

2010년에는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펴고 있는 ‘완전한 4·3 해결을 위한 2009 전국 4·3 유적지 순례’가 경상도 북부지방의 소도시 안동을 찾았을 때 이를 기사로 쓰기도 했다. (관련 기사: 뭍에 있는 안동이 제주 섬의 4·3과 무슨 상관?)


4·3 70돌을 앞두고 인터넷으로 ‘제주4·3평화재단’과 ‘4·3평화공원’, ‘제주4·3아카이브’ 등의 홈페이지를 둘러봤다. 

▲ ‘제주 4·3 신문자료집’.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펴냈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에도 제주와 제주 사람들은 여러 경로로 4·3의 진상과 진실을 밝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책과 영화로 형상화됐고 홈페이지와 아카이브 등에 역사의 기록으로 쌓였다. 4·3은 더디게나마 사람들과의 공감의 폭을 넓혀온 것이다.

30여만 명 도민 가운데 2만 5천~3만 명이 희생된 4·3은 두말할 것 없이 참혹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였다. 그것은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의 ‘4·3 사건일지’에서 집단학살에 해당하는 사실을 발췌해 보면서 매우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집단학살은 토벌대뿐 아니라 무장대에 의해서도 자행됐다. 방화, 집단총살, 암매장, 수장 따위의 끔찍한 범죄의 끝자락(1950.8.20.)에 252명의 무고한 죽음으로 학살은 막을 내렸다. (학살일지 참조)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된 이들의 주검은 당국의 제지 때문에 6년 만에야 수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 유족들은 적당히 유골을 맞춰 132기의 봉분을 만들고 거기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붙였다는 이야기는 4·3이 얼마나 반인륜적인 비극이었던가를 환기해 준다.

출처: ⓒ제주관광정보센터
▲ 백조일손지묘. 주검을 구분할 수 없어 유족은 적당히 유골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 그림은 제주 출신으로 4·3을 형상화해 온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연작 중에서

이제 ‘변방의 역사’에서 ‘우리 모두의 역사’로

이산하 시인이 장편서사시 ‘한라산’에서 ‘학살의 숲’을 노래했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름답고 슬픈 섬, 피에 젖은 유채꽃으로 노래 불리었던 4·3의 현장에서 동백꽃으로 스러졌던 3만 섬사람들의 영혼은 지금도 온 섬에서 핏빛으로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4·3 동백꽃 배지 달기 캠페인에 참여하거나 4·3의 제단에 마음속 국화 한 송이를 올리는 것은 제주 밖 사람들이 제주 사람들에게 보내는, 우리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공감과 연대다. 그리고 그러한 공감과 연대를 통해서 비로소 4·3이 제주를 넘어 이 땅 사람 모두의 역사로 승화될 수 있을 터이다. 

4·3의 정명을 위하여 (19.04.03. 추가)

올해 제주 4·3은 71돌을 맞는다.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지난해 처음으로 “제주 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라는 구호로 제주 섬에 갇힌 4·3의 역사를 대한민국 역사로 천명하고자 했었다. 제주의 고통스러운 현대사가 고립된 변방에서 비로소 광장으로 나선 것이었다.


4월 7일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70주년 국민문화제 ‘70년, 끝나지 않는 노래’가 베풀어졌다. ‘4·3과 동백꽃’이 마침내 광화문으로 온 것이었다. 그것은 4·3이 제주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보였다. 


현직 대통령으로 12년 만에 참석한 국가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며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주 4·3은 앞날이 순탄하리라고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특별법 제정과 대통령의 사과, 국가 추념일 지정에도 불구하고 4·3을 여전히 ‘좌익 공산세력의 폭동’으로 보는 극우 보수세력의 인식은 변화하지 않고 있다. 


어렵사리 가해자와 피해자가 손을 잡았지만, 4·3은 여전히 ‘사건’으로 머물러 있다. 어쨌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한 광주항쟁과 달리 4·3은 그냥 ‘4·3’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조차 ‘4·3사건’인데, 이 건조한 이름을 피해 제주는 4·3에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날짜만으로 된 중립적인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4·3평화재단’, ‘4·3평화공원’ 등과 같이 관련 단체나 시설의 이름에 ‘평화’를 붙인 것은 제주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일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추념식에서 뜬금없이 ‘비목’을 불러야 했던 사람들은 이제 마음 놓고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역사의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변방의 역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로, 4·3이나 4·3사건이 아닌 ‘4·3항쟁’과 같은 정명을 얻는 시간은 얼마나 더 많은 세월 동안의 투쟁과 인고가 필요할 것인가.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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